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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쟝드롱(Maurice Gendron)"의 "드보르작"첼로협주곡 外.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20. 2. 20. 21:32

"드보르작"의 첼로협주곡은 유명 첼리스트들은 거의가 음반을 내고있는 명곡 입니다.

여기에 잘 알려져 있지않은 첼리스트가 "모리스 장드롱"입니다. "카잘스"의 사사를 받은 "장드롱"의

드보르작은 또하나의 명반이라 할수있고, Lp 또한 귀한편이라 "루드비히 힐셔"의 드보르작과 함께

첼로의 진수를 만날수 있고, "론도94"와 "고요한 숲"은 덤인 이음반은 1968년 필립스 社 레코딩 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는 첼리스트가 한 사람,"모리스 장드롱"이 있었습니다. 이 첼리스트는 어느 날, 당대에

내 노라 하는 예술인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첼리스트는 프랑스의 유명한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 ( Picasso, Pablo Ruiz y , 1881.10.25~1973.4.8 )를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신출내기 첼리스트는 당대 미술계 거장인 피카소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도 피카소와 같은 유명 예술인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주체 할 수 없는 기쁜 마음과 가슴 벅참 으로 그와 인사를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그를 만난 것을 기념하고 평생을 간직하고자 피카소에게 자신의 첼로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피카소는 잠시 생각 후, 흔쾌히 이 첼리스트에게 그려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피카소는 이 첼리스트와 약속 이후 10년 동안이나 이 첼리스트에게 그림을 그려 줄 생각은커녕 아무 말도 없었기에 이 첼리스트는 그만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쑥 피카소가 자신이 그린 첼로 그림을 이 첼리스트에게 내밀었고 이 첼리스트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피카소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피카소는, “ 자네로부터 첼로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10년 동안 매일 첼로를 그리는 연습을 했고 이제야 첼로 그림이 마음에 들어 자네에게 선물을 하는 것 일세 “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평소 연습벌레로도 잘 알려진 이 첼리스트는 바로 프랑스의 유명한 첼리스트 모리스 장드롱 ( Gendron, Maurice ) 이라는 사람으로 1985년 우리나라에 내한공연을 가지기도 했던 아티스트이기도 합니다.

 

이 일화에는 음악계와 미술게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로 이 일화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술이라는 것은 결국 오랜 세월이 쌓여야 비로소 완성됨을 이야기 할 수도 있겠으나 반면에 자신이 한번도 해 보지 않은 입체파 그림이 아닌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피카소가 들인 10년간의 노력과 연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제 막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어쩌면 무명에 가까운 신출내기 첼리스트를 위하여 10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했다는 것이 피카소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까요.


모리스 장드롱, Maurice Gendron (December 26, 1920 - August 20, 1990)

프랑스의 첼리스트.

첼로를 가장 귀족적으로 다루는 연주가이며 현악기 중 가장 관능적이고 비극적 음감을 갖고 있는 첼로에 자애롭고 따뜻한 애정을 주어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 속성을 변모시켜 그 어떤 악기보다도 고매한 품격을 갖추게 한 사람이며,냉철한 지성을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프랑스적인 화려한 에스프리를 농축시킨 음악이 그의 음악이다.
제2차대전 이후에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앙드레 나바라(Andre Navarra), 폴 토르틀리에(Paul Tortelier), 베르나르 미슬랭(Bernard Michelin) 등 뛰어난 첼리스트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장드롱도 그중 한 사람이다. 

 

모리스 장드롱은 1920년 남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천재적인 음악성을 갖고 있어서 이미 3살 때 악보를 읽었고 5살 때는 특별히 제작된 소형 첼로로 수업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어려서 니스 음악원에 들어가 장 마고(Jean Margot)로 부터 첼로를 배웠으며,14세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제라르 에킹(Gerard Hekking)문하에서 수업하고 첼로과(科)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프라드로 가서 카잘스에게 사사하여 그 기량을 연마했다.

2차 대전후 독주자로 활동을 시작했고 1947년엔 프로코피에프의 첼로 협주곡을 유럽에서 초연 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이 연주에서 그의 능력이 높이 평가됐고,그 무렵부터 프랑스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쟝 프랑세와 함께 컴비를 이뤄 세계 각지에서 연주했다.

그런가 하면 프라도의 카잘스 음악제에 참가해 그의 지도를 받았고,카잘스의 지휘로 파리 라무뢰 관현악단과 함께 보케리니와 하이든의 200회 탄생 축하 음악회를 열었다.

한편,메뉴힌 남매(Yehudi Menuhin, Hephzibah Menuhin)와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빌렘 멩겔베르크(Willem Mengelberg), 헤르만 쉐르헨(Hermann Scherchen)의 지도를 받아 지휘 공부를 시작하여 라무뢰 관현악단,런던 필,본마스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지휘자로서의 명성도 쌓았다.
한때 교직에도 있었으나 1950년 경부터 독주가로서 활약하기 시작하여,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가서 공연하여 좋은 평을 얻었다.
프라드의 카잘스 음악제에도 자주 참가했고,메뉴인이 주관하는 바드 음악제에도참가하면서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쟝드롱은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소홀하지 않아 1954년부터 서독 자르브뤼켄 음악대학에서 후진을 지도했고,1970년부터는 폴 토르틀리어의 후임으로 파리 음악원 교수에 취임했다.

예후디 메뉴힌이 이끌고 있는 영국의 '메뉴힌 학교'의 교수로도 활약하였다.

모리스 장드롱은 1990년 눈을 감았으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악기는 스트라디바리를 사용했다.

 

그가 남긴 레코드로는 레파드 지휘,런던 교향악단 반주에 의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제1번>,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 G장조>,하이팅크 지휘,런던 필하모니 관현악단 반주에 의한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예후디 메뉴힌(Yehudi Menuhin),헵치바 메뉴인(Hephzibah Menuhin) 남매와 협연한 브람스의 <피아노 3중주곡 제2번>등이 파퓰러한 곡이면서 그의 특기가 잘 발휘된 레코드다.
그밖에 그의 스승 카잘스가 라무뢰 관현악단 반주를 지휘한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제2번>,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 Bb 장조>결합반이 재미있다.

 

프랑스 출신 첼리스트의 주법은 프랑스의 바이올린 주법과도 상통하는바 있어 아주 우아하고 세련되어 있다.
기교를 억제하면서 표현을 부드럽게 하고 음색의 아름다움을 품위있게 살린다. 
둔중(鈍重)한 첼로가 가벼운 악기로 변한다. 첼로에서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뽑아내는 것이 프랑스첼리스트들의 특기다.
장드롱은 기품의 높이에서는 푸르니에를 따르지 못하나,그러한 프랑스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다소 개성이 약해서 선배들의 그늘에 묻혀 버린 감이 없지 않다.

 

...“내가 처음 공부할 때는 카세트도,TV도 없었고 오직 악기와 악보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오히려 잘된 것이었죠.

    궁극에 이르면 예술은 결국 고독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장드롱이 지난 1985년 내한했을 당시 ‘객석’ 과의 인터뷰에서 한말이다.

그도 토르틀리에에 못지않게 어렵게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연주로 토르틀리에와 좋은 대조를 이뤘다.
이러한 연주풍은 그의 말대로 고독 속에서 음악을 만들며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한다.

-빈들 에서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