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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Casals"가 연주.-"부루흐"의'Kol Nidrei'."슈만"의'Traumerei'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9. 11. 13. 20:29

"엘가"의 첼로협주곡은 워낙 유명한 곡이라 클래식을 듣는 매니아 들은 한두장의 음반은 갖고 있으리라 생각되며,

지금까지 본인이 소장한 "엘가"첼로협주곡 중에서는 "뒤 프레"의 연주를 가장 좋게 듣고 있었는데, "카잘스"의

이음반은, 뛰어난 곡 해석과 '카잘스' 특유의 첼로음색은 다른 연주가 에게서는 느낄수 없는 첼로의 맛을 냅니다.

열정적인 연주와 음악 속에서 그대로 묻어 나오는 작곡가와 연주가의 감정은 듣는이로 하여금 첼로의 감흥 속으로

푹 빠져들게 합니다. "아드리안 볼트"가 이끄는 "BBC 심포니"와의 협연 또한 최고라 생각되고, 이음반 후면에 녹음된

"부루흐"의 'Kol Nidrei' 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등의 소품들도 첼로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음반은 우리에게 생소한 Wre(World Record Club)社 에서 1930년 최초로 녹음 되었습니다.

-"카잘스"가 연주하는 "막스 부루흐"의 '콜 니드라이'(연주시간11분55초).-

 

-이음반 후면의 "Schumann"의 "어린이들의 정경" 중 7곡"Traumerei(트로이메라이,"꿈")" 입니다.-

 

파블로 카잘스(1876~1973.스페인)

재능 있는 한 소년에서 20세기 첼로의 전설이 되기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로의 전설, 영원한 첼로의 성자로 불리는 파블로 카잘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카탈루냐 벤드렐 마을의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건반음악에 관심을 가진 카잘스는 9세부터 오르간 연주를 시작했다. 뛰어난 재능과 노력 덕분에 아버지가 몸이 아플 때면 대신 가서 오르간 연주를 할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

오르가니스트를 꿈꾸던 카잘스가 첼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1세 무렵 마을에서 열린 피아노 트리오 연주회를 본 후였다. 처음 본 첼로의 음색은 카잘스를 매료시켰고 그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회상했다. “첼로의 첫 음을 듣는 순간 순을 쉴 수도 없을 만큼 압도되었습니다. 무언가 부드럽고 아름답고 인간적인 빛이 내 속을 가득 채웠죠. 그날부터 첼로를 사 달라고 매일 졸랐죠.”

부모님으로부터 4분의3 사이즈 첼로를 선물 받은 카잘스는 바르셀로나 음악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했다. 이곳에서 그는 그를 첼로로 이끌었던 일전의 피아노 트리오 연주회에서 첼로를 연주했던 호세 가르시아(Jose Garcia)에게 첼로를 배웠다. 음악원 재학 시절, 카잘스는 학교가 끝나면 ‘토스트’라는 카페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여기서 유명한 작곡가 이삭 알베니스(Isaac Albéniz)를 만나게 되었다. 카잘스의 재능을 알아본 알베니스는 그를 유명한 음악학자인 기예르모 모르피(Guillermo Morphy) 백작에게 보냈고, 그곳에서 음악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백작을 통해 독일어와 문학, 철학 등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얻은 카잘스는 백작의 도움으로 왕실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했다.

                     
 
1897년 카를로스 3세의 훈장을 받으며 스페인 왕실의 인정을 받은 그는 유럽 각지를 다니며 연주를 시작했다. 스페인 내전 등으로 인해 연주를 중단해야 하는 시련도 있었으나 카잘스는 꾸준히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유럽 연주를 하던 1919년에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온 카잘스는 고국 음악계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80여 명으로 구성된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Pau Casals Orchestra)를 창단했다. 강도 높은 연습을 진행하고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에르네스트 앙세르메(Ernest Ansermet) 같은 지휘자를 초빙하면서 실력을 끌어올렸고 모든 운영비용을 사재를 털어 충당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는 1936년 파시스트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습격하며 해산되었고, 이후 카잘스는 남프랑스로 건너가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자크 티보(Jacques Thibaud)와 알프레드 코르토(Alfred Cortot)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이루어 세계 각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부활시킨 장본인

파블로 카잘스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부활시킨 인물로도 유명하다. 바르셀로나 음악원 재학 시절인 열세 살 무렵 우연히 한 서점에서 낡은 악보를 찾게 된 카잘스는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홀로 악보를 탐구하고 연습한 끝에 비로소 이 곡을 세상에 알렸다. 카잘스의 연주 이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 가치가 알려지면서 오늘날 첼리스트들의 필수 레퍼토리가 되었다. 카잘스는 60세가 되어서야 이 곡을 음반으로 녹음했다.

1961년 카잘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 백악관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1971년에는 UN의 날을 맞아 뉴욕 UN 평화 메달의 수상자인 카잘스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카잘스는 자신이 작곡한 〈미국에 대한 찬가〉(Hymn to the United Nations)와 〈UN 찬가〉를 직접 지휘하며 음악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이날 그는 고향인 카탈루냐의 민요 〈새의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 카잘스는 생의 말년을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엘 페세브레’(El Pessebre)라는 이름의 집에서 보냈다. ‘말구유’라는 뜻을 가진 이 집은 카잘스가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 카탈루냐를 생각하면서 지은 집이었다. 매일 아침 바흐의 평균율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한 카잘스의 하루는 말년에도 여전히 음악과 함께였다. 왕성한 연주 활동은 아니었으나 이곳에서도 음악 축제를 만들었고 고국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이 세계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져 난민 구호 협회와 평화 캠페인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년 후인 1973년 9월 말, 카잘스는 심장 발작을 일으킨 후 산후안의 아우힐리오 무토오 병원에서 97세를 인기로 세상을 마감했다.

백악관에서 연주하는 파블로 카잘스(1961년)
바르셀로나에서 치러진 파블로 카잘스의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