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 이어 소개하는 "이탈리아의 해럴드"는 "Colin Davis"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의
멋진 협주와 함께 연주되는 "Wehudi Menuhin"의 비올라 협주곡으로, 1악장에서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듯한 하프연주와
함께 시작되는 "예후디 메뉴인"의 그윽한 비올라연주, 그뒤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폭풍연주와 어울려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1834년 작곡된 그의 두번째 심포니이며,악장마다 전개되는 특별한 주제는 4악장 내내 긴장하게 만듭니다.
이음반은 1963년 EMI 레코딩 입니다.
"베를리오즈(1803~1869) "이탈리아의 해롤드 (Harold en Italie, Op.16)"베를리오즈에게 바이런은 깊은 예술적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낭만주의 시대 영웅적 시인이자 당대 유럽 젊은이들의 가슴을 들끓게 했던 바이런의 <차일드 헤럴드의 편력>을 음악화 하려는 의욕은 파가니니의 비올라 협주곡 위촉을 통해 현실화된다. 여기에서 비올라를 독주 악기로 선택한 것은 새로운 비올라를 구한 파가니니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가니니가 독주 부분에 불만을 가져 이 곡을 거부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부분을 리스트가 피아노로 옮긴 2중주의 형태도 널리 소개되어 있으며 색다른 멋이 더해진다.베를리오즈는 파가니니가 원했던 기교 과시용 비올라 협주곡은 그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표제 교향곡과 같은 성격을 지닌 장대한 곡을 완성한다. 삶과 세상에 대한 비관 속에서 탈출구를 찾아보려는 젊은이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방황, 다채로운 편력을 노래한 바이런의 작품 가운데 이탈리아편을 주목하여 음악화 한다. 멀티미디어적 감각을 지녔던 베를리오즈에게 비올라는 시의 주인공이자 방황하는 헤럴드를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베를리오즈는 리스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의 파노라마와 같은 음향 세계를 선구적으로 다채롭게 그리고 있다. 1830년 문제작 <환상교향곡>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지, 4년 후 1834년에 나온 작품으로 과감한 시도와 착상이 베를리오즈 특유의 세련된 오케스트라 술과 융합된 걸작이다.제1악장 <산 위의 헤럴드>이탈리아 각지의 산을 방황하며 고통스럽게 삶과 세계를 탐험하는 헤럴드를 그린다. 느리고 비감 어린 오케스트라의 서주 후에 등장하는 비올라의 노래는 간절함과 유장함을 담고 있다. 구원을 찾는 젊은이의 구도자의 심경과 방황의 마음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이 선율은 곡 전체의 고정 악상으로 등장한다.
1악장 (Harold in the Mountains: Scene of melancholy, happiness and joy)
Sir Thomas Beecham, Conductor
Royal Philhamonic Orchestra, 1951 녹음제2악장 <순례자의 행진>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을 통해 죄를 참회하면서 구원을 바라는 순례자들과 만난 헤럴드. 그 속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코랄풍의 경건한 울림으로 시작된다.
2악장 (March of the Pilgrims singing their Evening Prayer)
Sir Thomas Beecham, Conductor
Royal Philhamonic Orchestra, 1951 녹음제3악장 <세레나데>아브루치에서 듣는 세레나데. 감미로움과 감각적인 울림을 통해 잊혀졌던 쾌락과 세속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듯하다. 다양한 악기들이 절묘하게 조합하여 베를리오즈 특유의 서정성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3악장 (Serenade of an Abruzzi mountaineer to his beloved)
Sir Thomas Beecham, Conductor
Royal Philhamonic Orchestra, 1951 녹음제4악장 <건달패의 술판>헤럴드는 건달들의 술판에서 어지러움과 폭력을 보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이끌리는 헤럴드 자신의 욕망과 그를 거부하는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비올라의 주제가 거듭 등장하며 앞의 악장들과 달리 빠르고 격정적인 울림과 흐름이 주목할만하다.
4악장 (Brigands' orgy: Reminders of the preceding scenes)
■ 예후디 메뉴힌, Yehudi Menuhin (1916-1999)
미국태생의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
20세기에 활약한 바이올리니스트들 가운데 오랜 세월동안 가장 존경받은 연주자,가장 커다란 공적을 다방면에 걸쳐서 이룩한 위대한 연주자이고,지휘자이고,교육가이고,예술행정가였던 인물이다.
예후디 메뉴힌만큼 찬란한 시절을 보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을까.
아마도 미샤 엘만이나 프란츠 폰 베체이.브로니슬라프 후베르만.바샤 프르지호다.야샤 하이페츠 정도가 그와 같은 영예를 누렸을 것이다.
그만큼 메뉴힌은 한 시대의 총아로서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했다.
그러나 그 시기는 1940년대에 이미 종말을 고했다는 것이 메뉴힌의 비극이었다.
1920~30년대가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으며,이후의 시기는 메뉴힌에게나 그를 지켜보는 이들 모두에게 상처로 작용했다.
어떻게 천재로 각광받던 한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가 순식간에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것일까.
너무 많은 수수께끼에 둘러 싸인채 메뉴힌은 삶에서 죽음쪽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몇 년 전,그가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아직 그가 살아있었던가?....하고 말이다.
물론 그는 자신에게 모든 영감이 사라진 1950년대에도 줄기차게 연주와 레코딩을 하고 있었으며,적어도 메뉴힌 왕국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톤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으며,아슬아슬하게 리듬을 타고 있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일정도로 메뉴힌의 연주는 안쓰러움과 회한이 교차한다.
하지만 베토벤 협주곡의 마지막 3악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으며,그는 여기서 마지막 영감의 불꽃을 터뜨렸다.
1959년의 녹음과 70년의 레코딩으로 사그러져가는 메뉴힌의 예술의 흔적을 감지할 수 있다.
예후디 메뉴힌은 미국 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지휘자(대부분 영국에서 보냈으며,후에 영국시민이됨)이다.
메뉴힌은 1916년 러시아계 유태인의 자녀로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3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그는 7살 때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신동이었다.
그는 루이스 퍼싱거(Louis Persinger),게오르게 에네스쿠(George Enescu),아돌프 부쉬(Adolf Busch) 밑에서 수학하였다.
메뉴힌은 3세때 지그문트 안커(Sigmund Anker)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28년,그의 나이 12세때 Beethoven Concerto의 놀랍고도 성숙한 연주는 그를 세계 최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었다.
이미 10대 시절에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연주활동을 펼쳤고,그리하여 20세가 되기 이전에 이미 대가의 소리를 들었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의 음반을 통해서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청년 시절 파리로 건너가 에네스쿠(George Enescu)의 문하에 들어가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그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후일 두 사람은 사제지간을 떠나서 가장 친밀한 우정을 유지시킨 사이로 발전했다.
그는 크라이슬러(Kreisler)의 우아함과 엘만(Elman)의 공명,하이페츠(Heifetz)의 기교를 결합하고 싶다고 말하곤 하였다.
메뉴힌은 2차대전중에는 연합군을 위한 연주회와 1945년 4월 이후에 자유롭게된 Bergen-Belsen(베르겐벨젠) 수용소에 작곡가인 Benjamin Britten(벤자민 브리튼)과 함께 가서 연주하기도 하였다.
1947년 홀로코스트이후 화해의 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유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문화와 유태인문화를 교류시키는 일에 정열을 쏟기도 했다.
실제로 그로부터 감동받은 수많은 독일 작곡가들이 그에게 각별한 우정을 나타냈는데,특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를 알게되어 그에게 많은 지원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메뉴힌은 사회운동가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도 했다.
그후 메뉴힌은 화려한 색조와 풍부한 낭만주의 표현의 연주로 초기에 성공을 거둔 이후 2차대전동안의 쉴틈없는 연주와 어린시절 무분별한 훈련으로 육체적,예술적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주의깊은 훈련과 공부,명상과 요가로 이러한 역경을 이겨냈으며 연주자로서 롱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다시금 순도 높은 스타일로 해석의 깊이와 힘을 느끼게 해주는 연주를 들려줌으로써 세계 최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 로서의 위치로 오르게 되었다.
1940년대와 50년대,메뉴힌은 연주와 녹음 모두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되는데,특히 바르톡의 독주 바이올린 작품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바르톡 자신도 메뉴힌이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데 깊은 감사를 갖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진력했다는 사실은 연주자와 작곡가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1952년 요가 수행자인 이옌가(B.K.S. Iyengar)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우정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옌가가 런던,파리,스위스,그밖의 여러나라에서 요가를 가르쳐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이 일로 요가가 많은 서방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메뉴힌은 자신의 음악세계의 외연을 확대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1962년 그는 타고난 음악교사의 자질을 살려 영국 잉글랜드 남부에 위치한 Surrey(서리)의 작은 마을 스톡 다베논(Stoke
d'Abernon)에 메뉴힌 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캘리포니아 힐스보로우에 있는 Nueva School에 음악과정을 도입하기도 했다.
1965년 음악및 교육분야에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80년대 그는 재즈 바이올린계의 명인 Stephane Grappelli(스테판 그라펠리)와 함께 재즈 음반을 녹음했으며,시타르의 달인 라비 샹카르(Ravi Shankar)의 도움으로 인도음악에 심취하여 요가수행법을 배웠다.
1990년에는 지휘자로서 아시아청년관현악단(Asian Youth Orchestra)과 함께 첫 아시아 순회 연주 - 일본,싱가포르,홍콩,대만 - 를 하였다.
1999년 3월 12일 기관지염 합병증으로 인해 베를린에서 타계하였다.
20세기의 마지막 연대를 지휘자,교수,음악의 대변자로서 자임하며 지낸 메뉴힌은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노신사로 대접을 받았다.
세계 도처를 여행하며 종교와 사회, 환경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6개의 레슨', '미완성의 여행' 등이 있다.
메뉴힌 국제 바이올린 콩쿨은 금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예후디 메뉴힌(1917~1999)을 기리기 위해 1983년 창설된 뒤로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의 등용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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