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의 피아노 연주는 그이름 그삶 만큼이나 독특하다. 가늘게 부드럽게 안겨오다가, 때로는 강렬하게
몰아치는 "미켈란젤리"의 피아노 연주는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날의 감동을 충분히 느끼게 합니다.
Carnaval,Op.9 와 Faschingsschwank aus Wien,Op.26 이 녹음되어 있는 이음반은 1957년 BBC 녹음의 모노음반 입니다.
-미켈란젤리(이탈리아 출생 1920.1~1995.6)-
완벽 주의자인 "미켈란젤리"는 완벽한 기교와 맑은 음색을 자랑하는 연주실력과 섬세한 곡 해석능력을 겸비한 피아노 연주자로, 특히 베토벤·브람스·슈만·드뷔시·라벨의 곡에 정통했다. 그러나 완벽주의와 독단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예정된 공연을 갑자기 취소하거나 연주회 도중 무대에서 뛰쳐나가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3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0세 때 밀라노 음악원에 들어가 주세페 안포시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933년 졸업하여 한동안 의학으로 진로를 바꾸기도 했다. 1939년 제네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1946년 런던, 1948년 뉴욕에서 데뷔해 비평가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고 국제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의 공군 조종사로 복무한 몇 년간은 연주활동이 부진했다. 1950년대초 건강상의 문제로 연주여행이 힘들어지자 피아노 교습을 하기도 했다. 1964~69년 브레시아에서 국제 피아니스트 아카데미를 조직·주관했으며, 제자로 마르타 아르게리히와 마우리치오 풀리니를 배출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1920-1995)는 공연과 리코딩 관계자에게 늘 ‘요주의 인물’이었다. 공연 직전이나 리코딩 중간에 연주를 취소시켜버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취소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건강상의 문제에서부터 악기 문제, 홀의 음향 문제, 청중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연주회 당일에는 하루 종일 극장 안을 왔다 갔다 하며 피아노 소리를 체크했으며, 음이 완전히 조율되었다고 느껴지기 전까지는 연주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중들은 그가 만족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베를린 연주회에선 두 시간이나 시간을 끈 적도 있었다. 파리에선 손이 시렵다면서 연주를 거부했고, 브레렌츠에선 청중이 세 번이나 기침을 했다고 앙코르를 거부했다. 취리히에선 에어컨이 켜져 있다고 연주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리를 비난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연주하지 않는다. 오직 나와 작곡가를 위해서 할 뿐이다. 그 자리에 청중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호로비츠가 그랬듯이 미켈란젤리가 자신의 피아노를 전 세계로 가지고 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피아노는 진동이나 기온 변화를 겪으면 세심하게 조율해야 하고 메커니즘이 손상되기 쉬운데다 운송료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연주가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미켈란젤리의 스타인웨이는 그가 가는 곳마다 트럭이나 비행기에 실려 전속 조율사와 함께 그를 따라다녔다. 어쩌다 피아노를 가져가지 못할 경우에는 악기 선택에 매우 까다로운 주문을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일본에서 예정된 첫날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다. 그의 피아노가 일본까지의 긴 여정으로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주최 측은 그의 여권을 압류하고 그에게 상당한 위약금을 부과하는 등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미켈란젤리는 그 후 일본에서의 연주회는 물론 방문도 절대 하지 않았다.
-로베르트 슈만(독일출생.1810.6~1856.7)-
슈만은 피아노 음악, 가곡(리트), 관현악곡의 작곡가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적인 피아노곡들 중에는 1840년 아내가 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을 위해 작곡한 곡들이 많다. 6세 때 처음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1822년에 시편 150절에 곡을 붙임으로써 최초로 작곡을 했다.
그는 당대 유명한 피아노 선생이었던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비크의 9세 된 딸 클라라를 알게 되었다. 클라라의 18번째 생일에 그녀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비크에게 결혼승낙을 요청하여 1840년 9월에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 해 2~12월의 11개월 동안에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가곡들 대부분을 작곡했다. <미르텐>, 하인리히 하이네와 요제프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인 2개의 <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과 같은 연가곡들과 그밖에 수많은 가곡들을 작곡했다. 1856년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아버지는 서점 운영자이자 출판업자였다.
4년간 사립학교를 다닌 뒤 슈만은 1820년에 츠비카우 고등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8년 동안 공부했다. 6세 때 처음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1822년에 시편 150절에 곡을 붙임으로써 최초로 작곡을 했다. 그는 연극(희극 1편, 공포극 2편)과 시 등 문학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가 번역한 호라티우스의 송가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1827년에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에게 음악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독일의 시인 장 파울 리히터로부터는 문학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이 두 사람으로부터의 영향은 깊고 지속적이었다.
같은 해에 슈만은 몇 개의 가곡을 작곡했고, 이것들은 모두 악보로 출판되었다.
1828년에 슈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와 법적 보호자(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음)의 강압으로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법률공부보다는 노래 작곡, 피아노 즉흥 연주, 리히터의 양식을 모방한 자전적 소설 쓰기 등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몇 개월 동안 그는 프리드리히 비크라고 하는 당대 유명한 피아노 선생에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비크의 9세 된 딸 클라라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막 성공적인 연주회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1829년 여름 슈만은 라이프치히를 떠나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그곳의 법학교수인 안톤 프리드리히 유스투스 티보는 음악미학 저술가로 알려져 있었고 티보의 영향으로 슈만은 초기 합창음악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었다. 슈만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양식을 따라 왈츠를 작곡했고(이 곡들은 나중에 그의 피아노 연주곡 〈나비 Papillions〉에 다시 사용됨), 결국 법률을 포기하고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다.
마침내 1830년 10월 어머니로부터 라이프치히에 가서 비크 교수와의 피아노 수련기간을 가져도 된다는 허락을 얻게 되었다. 비크는 슈만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고된 연습을 견뎌낼 수 있는 의지와 능력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슈만의 작품 1번은 변주곡 모음으로, 1831년에 출판되었다. 오른쪽 손가락 하나를 다치는 바람에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희망은 좌절되었지만, 그로 인해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그에게 불행한 일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 시기에 피아노곡을 많이 작곡했는데, 이것들은 곧바로 출판되거나 혹은 이후에 개정판으로 재출판되기도 했다.
비크의 제자인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과의 연애로 2곡의 중요한 피아노 작품이 탄생되었다.
첫 곡 〈사육제 Carnaval〉(1835)는 애인이 살던 '아슈'라는 고장의 철자이며 슈만 자신의 이름에도 들어 있는 A, S, C, H를 A음-E♭음(독일어 Es의 'S'에 해당함)-C음-B음(독일의 음이름 'H'에 해당함)을 활용해 만들었고, 2번째 곡 〈교향적 연습곡 Études symphoniques〉(1834)은 애인의 아버지가 만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그 여자와의 연애는 1년 정도 지속되었지만, 헤어지기 오래 전부터 슈만은 당시 16세였던 클라라 비크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클라라는 슈만의 사랑에 응답을 했지만, 아버지 비크의 명령에 따라 관계를 끊었다. 슈만은 16개월 동안 자신을 내팽개쳤고, 그동안 절망과 체념의 반복상태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 Fantasy in C Major〉로 표현하는 한편 술에 만취해서 지냈으며, 다른 여자들에게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심지어 그는 클라라에 대한 비방을 담은 글을 〈신음악지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 싣기도 했다(슈만은 일찍이 1834년 이 신문의 설립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1835년 이후부터 이 신문의 편집자이자 주요주주였음). 클라라가 처음으로 재결합을 원하는 기미를 보이자 1837년 9월 13일 그녀의 18번째 생일에 슈만은 정식으로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비크에게 결혼 승낙을 요청했다.
비크는 그의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하지 않고 회피했다.
당시 슈만은 전생애 중 가장 왕성한 창작기에 접어들었고, 특히 상상력이 넘치는 일련의 피아노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러나 클라라가 경제적 불안을 이유로 결혼할 수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가 여전히 결혼 승낙을 지연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행복한 상태는 아니었다. 1839년 6월 15일 클라라의 공식적 언급으로 결혼 승낙을 얻어내기 위한 법적 소송절차를 밟게 되었지만, 계류상태로 1년 이상 지체되었다. 슈만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비크 측의 항소가 있었고 상급 법정까지 올라갔지만, 비크 측이 슈만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는 데 실패하자 결국 1840년 9월 12일에 두 사람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해 초반에 슈만은 거의 12년 동안이나 손을 놓고 있던 분야인 가곡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다. 1840년 2~12월의 11개월 동안에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가곡들 대부분을 작곡했다. 〈미르텐 Myrthen〉, 하인리히 하이네와 요제프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인 2개의 〈가곡집 Liederkreise〉, 〈시인의 사랑 Dichterliebe〉, 〈여인의 사랑과 생애 Frauenliebe und Leben〉 등과 같은 연가곡들과 그밖에 수많은 가곡들이 이 기간에 작곡되었다. 클라라는 슈만에게 작곡의 영역을 넓혀 관현악 부분에도 손을 댈 것을 요구했다. 슈만은 그때까지 5차례에 걸쳐 피아노와 관현악 작품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에 그쳤으며, 심지어 교향곡 G단조까지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둔 상태였다.
슈만은 1841년 1~2월에 교향곡 1번 B♭장조를 작곡했고, 이 곡은 3월 31일 독일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지휘에 의해 라이프치히에서 연주되었다(관현악단). 또한 4~5월에 〈서곡과 스케르초, 종곡 Overture Scherzo, and Finale〉을, 5월에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Phantasie〉을 작곡했다.
〈환상곡〉은 1845년에 두 악장을 추가하여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A단조로 확대되었다. 또다른 교향곡 D단조는 6~9월에 작곡되었고, 3번 교향곡 C단조가 스케치되었다. 3번 교향곡 가운데 스케르초 악장만이 피아노 곡 〈다채로운 작품 Bunte Blätter〉 13번 작품99로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관현악곡에 대한 열의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1842년 6월부터 1843년 1월에 걸쳐 슈만은 여러 편의 실내악곡을 작곡했고,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도였다.
1843년 그때까지의 작품 중 가장 의욕적인 시도였던 '세속 오라토리오'(원래 오페라로 계획되었음) 〈낙원과 요정 페리 Das Paradies und die Peri〉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토머스 무어의 〈랄라 루크 Lalla Rookh〉에 기초한 곡이다. 12월 4일 이 작품의 초연을 계기로 슈만은 지휘자로 데뷔했지만 그는 지휘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한편 〈낙원과 요정 페리〉를 작곡하는 동안 라이프치히 음악원이 설립되었다.
이 음악원의 원장은 멘델스존이었고, 슈만은 이 음악원의 피아노 연주, 작곡, 총보독법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이것도 적성에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1844년초 몇 개월 동안 클라라와 러시아 순회연주를 했는데, 이 여행에서 슈만은 클라라보다 제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자의식으로 괴로워해야 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슈만은 〈신음악지〉의 편집장 직을 사임했다. 8월에 괴테의 〈파우스트 Faust〉를 오페라로 만들기 위해 몇 곡을 작곡했지만, 이 작업은 심각한 신경쇠약으로 중단해야만 했고, 결국 슈만은 라이프치히로 휴가를 가게 되었다.
1844년 12월부터 1850년 9월까지 슈만과 클라라는 드레스덴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그의 건강은 차츰 회복되었다. 1845년 12월 교향곡 2번 C장조를 쓰기 시작했지만, 청신경 장애로 인해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거의 10개월 동안을 허송세월해야만 했다.
라이프치히와 빈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결국 더이상 좋은 일거리를 찾지 못한 슈만은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음악감독 자리를 수락했다. 처음에는 일이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1850년부터 이듬해까지 첼로 협주곡 A단조, 교향곡 3번 E♭장조 〈라인 Rhenish〉을 작곡했고, 10년이나 끌던 교향곡 D단조를 순식간에 다시 써서 4번 교향곡으로 출판했다.
슈만은 8차례에 걸쳐 기부금 연주회를 지휘했지만, 성격상 사람들과의 마찰이 드러났고 지휘자로서의 단점이 명백해졌다. 수차례에 걸쳐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었고, 혼란 속에서 리허설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852년 12월에 슈만은 사퇴를 권고받았지만 거절했고, 1853년 10월에는 급기야 합창단원들이 슈만이 지휘하는 멘델스존의 〈발푸르기스의 첫날밤 Die erste Walpurgisnacht〉 연주를 거부해 결국 지휘봉을 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54년 2월 10일 슈만은 전부터 그를 괴롭혀오던 귓병으로 '아주 고통스런' 통증을 호소했고, 이어서 환청 증세가 나타나 천사가 불러주었다는 선율 주제를 듣고서(이 선율은 실제로 슈만이 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에 흔적이 나타나 있음) 피아노 변주곡 몇 편을 작곡하기에 이르렀다.
2월 26일 정신병원에 입원을 자청했고, 다음날 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다(슈만은 이미 1830년대에 적어도 3번 이상이나 자살을 기도했음). 3월 4일에 본 근처 엔데니히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거의 2년 반을 지냈으며, 한동안은 클라라를 비롯해 친한 친구들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브람스와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인 요제프 요하임의 1~2차례 방문을 계기로 심한 정신혼란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클라라는 1856년 7월 27일까지 면회가 금지되었으나 마침내 종말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슈만은 그녀를 알아보는 듯했지만, 2일 뒤에 죽기 전까지 거의 말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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