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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illiams" - Greatest hits.(Alhambra궁전의 추억外)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6. 1. 10. 21:05

"Tarrega"의  Alhambra궁전의 추억을 비롯한 여러 작곡가의 기타협주곡을 "존 윌리엄스"의 감미롭고 힘찬 기타연주로

들을수있는 음반입니다. 특히 "비발디"의 기타협주곡은 정통 클래식기타의 참맛을 느낄수 있습니다.

자세한 곡설명이 후면에 자세하게 실려있는 이음반은 1974년 cbs 레코딩 입니다.

 

 

 

 

존 윌리암스 (John Williams, 1941 ∼)
세계에서 가장 다재다능하며 존경받는 기타리스트 중의 한사람인 존 윌리암스는 국제적인 무대에서의 연주와 그의 뛰어난 음반들을 통해 현대 기타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고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번 태생의 존 윌리암스는 4살때부터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신동이었다. 아버지 밑에서 처음 10년간 공부한 그는, 1952년 런던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음악 세계에 있어 일대 전환이 된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시에리아에 있는 카지아노 음악원 (Accademia Musicale Chigiana di Sieria)에 입학, 5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저 유명한 기타의 마법사 세고비아와 함께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어린 존 윌리암스가 학생들 중 처음으로 독주회를 완벽히 개최, 전례없는 영예와 찬사를 한껏 받게 된 것은 거장의 앞날을 말해주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그의 학구열과 재능은 영국 왕립음악학교(the Royal College of Music)에서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우면서 단단한 초석을 쌓게 되었다.
1958년, 17세에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한 그는 완벽한 테크닉과 그만의 철학적 세계로 음악을 구도,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때 세고비아가 '기타의 왕자가 출현했다'라고 한 말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1962년 러시아와 파리, 마드리드에서의 잇단 연주회는 존 윌리암스를 세계적 거장으로 올려놓는 시금석이 되었다. 1963년에 일본과 미국에로의 진출 이후 그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져 전세계 어느 곳에든지 그의 음악이 흘러 나오게 되었다.
또한, 러시안 룰렛의 처절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 영화 '디어 헌터'(1979년 마이클 치미노 필름)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제2의 음악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줄리안 브림, 파코 페냐, 이작 펄만, 배니 케설, 클레오 레인, 안드레 프레빈 등과 함께 연주 활동을 벌이며 그의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안드레 프레빈과 같은 작곡가는 존 윌리암스 연주에 깊은 매력을 느껴 그를 위해 기타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최근, 패트릭 고어, 레오 브루어, 토루 타케미츠와 같은 많은 작곡가들은 존과 더불어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곡을 많이 작곡하고 있다. 또한 줄리안 브림과의 듀엣 앨범 Together는 20세기 후반 영국에서의 기타의 황금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존 윌리암스는 음악의 최우선을 대중과 더불어 공감할 수 있는 것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같은 열정이 결실을 맺어, 저 유명한 런던 로니 스코트 재즈 클럽에서 연주회를 가진 최초의 고전 음악가가 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그는 1979년 급기야 5인조 그륩 'SKY'를 결성, 확고부동한 명성을 쌓게 된다. 그들의 연주 실황은 레코드와 TV를 통해 유명세를 더하게 되고 특히,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그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또한 최근에는 현대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 1992년 새로운 그룹 'ATTACCS'를 결성하였다. 존 윌리암스는 SONY CLASSICAL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20살 때부터 정식 계약,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대부분이 레코딩되어 끊임없는 호평을 받고 있다 .
2000년대에 들어 부쩍 제 3세계의 음악에 관심을 쏟고 있는 존 윌리암스는 2001년 그가 결성한 그룹인 "존 윌리암스와 친구들(John Williams and Friends)" 과 함께 아프리카의 음악을 재해석한 음반 "The Magic Box"(Sony Music, 2001)를 발표하였다. 세네갈, 카메룬, 콩고 (구 자이르), 남아프리카 공화국, 마다가스카르 등의 음악을 담은 이 앨범과 함께 그는 미주, 유럽, 호주 등으로 월드 투어를 마쳤으며, 올해에는 베네수엘라 작곡가의 기타곡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다.

"존 윌리암스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연주를 보여주었다. " -- The New York Times
"존 윌리암스의 물 흐르는 듯한 테크닉과 예술성은 관객 맘을 사로잡았다.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인 존 윌리엄스는 전통 플라멩고에서 느낄수 있는 미묘한 감정과 바하의 바로크 음악에서의 풍부함을 동시에 표현해 보였다. " -- The Michigan Daily
"기교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존 윌리암스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기타의 최고봉이다." -- Winnipeg Free Press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타레가 이 에익세아(Francisco de Asís Tárrega y Eixea, 1852년 11월 21일 ~ 1909년 12월 15일)는 스페인기타 연주가작곡가이다. 카스텔론의 비야레알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음악원을 다녔으며, 뒤에 그 음악원의 교수를 지냈다. 명곡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비롯하여 많은 연습곡과 전주곡을 기타를 위하여 작곡하였다. 근대 스페인의 가장 우수한 기타 연주가이다.

 

알람브라(아랍어: الحمراء, 스페인어: Alhambra)는 아랍어 말 그대로 "붉다"라는 뜻을 지닌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이다. 1238년부터 1358년 사이에 지어졌다.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 지역에서 머물던 아랍 군주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그라나다 시의 남동쪽 경계에 있다. 현재에는 이슬람 건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르네상스식 건물이 카를로스 1세 때 추가되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한국어로는 알함브라 궁전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알함브라는 영문 식으로 그냥 읽는 경우이다. 아랍어가 스페인어로 굳어져서 쓰이고 있는 Alhambra라는 이름은 스페인어에서 h가 묵음이므로 "알람브라"라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한국어로 옮겼을 때 공식명칭은 알함브라 궁전이 아닌 알람브라 궁전이다. 전체 궁전은 해발 740m의 고원에 위치하는데 너비는 205m에 달한다. 서북서, 동남동의 방향으로 건물이 뻗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142,000 m²이다. 견고하게 쌓아진 벽이 있으며 주위에는 13개의 타워가 있다. 다로 강이 흘러가며 깊은 골짜기를 이루며 그라나다 지역을 양분한다. 아사비카 계곡이 있으며 주위에는 알람브라 공원이 남서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무어인종과 스페인의 미술을 결합한 형태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아랍 계열 인종의 거주가 막바지에 치달을 무렵이었으므로 알람브라 궁전은 안달루시아 지방 미술의 절정기 하반부를 장식한다. 이슬람 왕국의 직접적인 영향권 밖에 있었으므로 예술가의 창작 배경이 더욱 자극될 수 있었던 점도 알람브라 궁전 내의 독특하면서도 왕궁의 위엄을 드높인 한 요소가 되었다. 우아한 기둥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으며 종유석이 솟아 있는 듯이 외부가 이뤄져있어 공기 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가미된다. 웅장한 아랍 문화의 유적이 새겨져 있으며 수많은 왕이 이곳을 거쳤다. 1492년 기독교 세력이 재정복하면서 정복자들이 궁전을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흰 빛깔의 도료로 바뀐 것도 이때 이뤄진 일로서 도금과 회화 작업도 이 시기에 추가되었고 기존의 가구는 개보수되거나 혹은 없어졌다. 카를로스 1세(1516-1556)는 당대 르네상스 양식으로 궁전의 건축 양식을 수정하는 한편 겨울 궁전을 허물어버렸다. 펠리페 5세(1700–1746)는 주위 전각과 내부 방을 이탈리아 식으로 바꾸는 한편 무어 인의 양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완성도를 가미하였다.

수세기 동안 스페인의 지배 하에서 이슬람의 영향은 상당 부분 손상되었다. 1812년 프랑스의 세바스티앙 백작이 건물에 딸린 몇 개의 탑들을 철거하여 버렸다. 1821년 지진으로 더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복구는 1828년부터 이뤄져 183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페르난도 7세가 추진했던 이 계획은 이후 후대에 이르러서도 계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무어 인 출신의 시인들은 궁전을 "에메랄드 속의 진주"라고 표현하였다. 건물의 반짝이는 광채와 고급스러운 배경 때문이었다. 여름에는 꽃과 잔디가 자라나며 대개 장미와 오렌지 나무 등 자민족이 좋아하는 작물을 많이 심었다. 그러나 1812년 웰링턴 공작이 영국산 느릅나무를 비롯한 다수의 종을 들여오게 되었다. 공원 주위에는 유럽산 지빠귓새인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며 분수대가 많이 있다.

오랜 기간 동안 별다른 관심없이 많은 피해를 받았음에도 알람브라 궁전은 무어 예술의 극치를 가장 잘 표현하는 곳으로 남아 있다. 대부분의 건물은 폐쇄적인 건축을 지양하여 작은 전각도 중앙을 향해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외부는 언덕의 굴곡을 없애어 평평하게 하도록 하였고 대신 내부에는 웅장함을 가미하기 위해 고도 차이를 이용하였다. 내부에는 대리석 기둥과 아치 형의 건물이 나타나기도 한다. 투명하게 드러나는 천정도 볼거리이다. 따라서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통하고 전체 공간을 밝고 우아하게 한다. 파란, 빨강, 금빛 노란색이 잘 어우러져 있어 시간과 빛의 노출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