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의 바이얼린과 첼로를 위한 2중협주곡,Op.102는 클레식을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유명한 곡이며,
음반도 갇고있을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 이곳에 소개하는 "페라스"와 "토르틀리에"가 연인들의 사랑얘기 같은연주하는
이음반은 두사람의 연주가 가히 신의 경지에 있음을 보여준다. "파울 클레스키"가 지휘하는 "로열 필" 오케의 연주 또한
환상적인 이 음반은 1963년 EMI 레코딩 입니다.
"브람스"의 마지막 관현악 작품으로 1887년 작곡되었으며 그 해 10월 18일 쾰른에서 "브람스"의 절친한 동료이자
후원자인 '요제프 요아힘'의 바이올린과 '하우스만'의 첼로, 작곡가 본인의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흔히 "이중 협주곡(double concerto)"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브람스"가 직접 붙인 이름은 아니고 "브람스"사후에 붙혀진 것으로 추정 됩니다.
1악장- Allegro. ,2악장- Andante.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독일)"는 음악여행중, 그의 생애중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세명의 동료를 만나는데, 작곡가
"슈만"과 그의 아내이자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등 세명 입니다. "슈만"은 "브람스"가 쓴
곡에 깊은 감명을 받고 "브람스"를 '베토벤'의 후계자 라고 음악계에 소개를 하고 다녔고, "브람스"의 음악활동에 날개를
달아주어 세상의 기대를 한몸에 받게 하였습니다. 또 '요아힘'을 위해서 유일한 바이올린협주곡을 작곡했고, '슈만'이 죽고
난후에는 '클라라'와 그의 가족을 돌보면서 '클라라'와도 더욱 깊은 관계가 됩니다.
3악장- Vivace non troppo.
크리스티앙 페라스(1933~1982)의 연주는 본능적이고 직관적이다. 고작 13세의 나이에 직업 음악가로 발을 내디딘 그는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지휘자 카라얀으로부터 “다른 연주자들을 압도하는 천재성”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페라스의 연주는 청년기의 본능적인 뜨거움, 좀 더 나이 들어서는 섬세함과 유려함으로 높은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이 천재적 바이올리니스트의 삶은 불운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1982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음악칼럼니스트 이영진은 눈부신 영광과 급격한 추락의 삶을 살았던 그를 “하늘을 날다 추락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이카로스”에 비유하면서 “직관적이고 탐미적인 음악세계를 보여줬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평했다.
폴 토르틀리에(1914~1990)
역동적인 연주로 유명한 폴 토르틀리에는 프랑스의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 교육자였다. 1914년 파리에서 태어난 토르틀리에는 어려서부터 첼로를 배웠고, 열두 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4년 뒤인 1930년에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1등상을 수상하며 음악원을 졸업했고, 이듬해에 프랑스 라무뢰 오케스트라와 랄로 협주곡을 협연하며 정식 데뷔를 했다.
토르틀리에가 처음부터 독주자로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졸업한 뒤에도 파리 음악원에 남아 화성학과 작곡을 공부했는데, 이 시기에 몬테카를로 오케스트라에 첼로 수석으로 입단해 1935년부터 2년 간 연주를 했다. 그는 이후에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 등을 거치며 십 년 넘게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생활했다. 이 시기까지는 수석 첼리스트로서 관현악곡의 독주 파트를 맡아서 연주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47년에 영국의 지휘자 토머스 비첨(Thomas Beecham)의 권유로 런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음악제에서 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의 독주 파트를 연주할 기회를 얻었다. 이 무대는 토르틀리에가 독주자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본격적인 독주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돈키호테〉는 토르틀리에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는데, 1947년 런던에서 토머스 비첨이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음반과 1973년 드레스덴에서 루돌프 켐페(Rudolf Kempe)가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녹음한 음반이 남아있다.
"폴 클레스키(1900~1973)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폴란드 출신의 가장 뛰어난 지휘자였던 파울 클레츠키는 20세기를 그 자신의 역사로 만들었다.
그는 1900년 3월 21일, 폴란드 중부의 우치(Lodz)에서 'Paweł Klecki'라는 본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후에 독일식 스펠링인 파울 클레츠키(Paul Kletzki)로 바꿨다.
어린 시절, 바르샤바에서 에밀 믈리나르스키(Emil Mlynarski)에게 바이올린을바이올린을 배웠고, 1914년부터 5년 동안 우치 필하모니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경험을 쌓았다.
1921년 베를린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기 전까지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아울러 작곡가가 되기 위한 음악 공부도 병행하여 계속하였다.
1921-1933년까지 베를린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작곡과 지휘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 푸르트벵글러의 추천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데뷔하였다.
1933년, 클레츠키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독일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이탈리아로 피신하였다.
클레츠키는 이탈리아 밀라노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들을 가르쳤으나,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반 유태인 정책으로 1936년 러시아(구,소련)로 이주하였고, 다시 스탈린의 대학살을 피하여 스위스에 정착하였다.
특히 홀로코스트 기간중에 클레츠키는 부모를 비롯하여 누이가 나치스에 의해 학살당했으며, 그는 이러한 나치스의 행위들로 인하여 작곡에 대한 의욕과 정신세계를 파괴했다는 이유로 1942년부터 작곡을 하지 않았다.
클레츠키는 스위스 영주권을 취득하여 제네바에 살면서 루체른 음악제를 비롯하여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는 유럽 각지는 물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이스라엘 등지에도 초청되었으며, 이 때부터 이스라엘 필하모니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자주 지휘했다.
그뒤 1954-1955년에는 리버풀 필하모니의 지휘자가 되었고, 1958-1961년에는 미국 댈러스 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초청되어 그곳을 근거지로 미국의 여러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하였다.
1967년 앙세르메의 뒤를 이어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4년간 활약하다가 1970년 자발리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후 1973년 3월 5일, 영국 리버풀에서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관현악단(Royal Liverpool Philharmonic Orchestra)과의 리허설 도중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파울 클레츠키는 풍유롭고 독특한 낭만주의 음악 해석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구스타프 말러가 있었으며, 그는 젊은 시절부터 2차 대전을 전후한 때에 이미 가장 중요한 말러 해석가 중 하나로 꼽혔다.
1954년 4월과 5월에 걸쳐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텔아비브에서 영국 콜럼비아 레이블을 위해 녹음한 말러 <교향곡 1번>과 <교향곡 9번>은 오랜 세월 동안 긴밀한 협력관계를 일구었던 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앙상블이 돋보이며, 푸르트벵글러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던 클레츠키의 낭만적인 접근법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클레츠키는 이후 1961년에 빈필과 함께 <교향곡 1번>을 다시 한번 녹음하지만, 이스라엘 필과의 이 녹음은 그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스라엘 필 역시 지금은 듣기 힘들어진 전성기의 역동적인 힘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또한 차이코프스키, 시벨리우스 등 낭만파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을 즐겨 다루었다.
그의 음악은 유창할 뿐만 아니라 아주 엄격하여 구성력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슈만의 교향곡에서 두드러진 특성을 보이는 것도 클레츠키의 그와 같은 음악성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음반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로맨티시즘의 색채가 대단히 농후하다.
따라서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 제1번>, 소프라노 에미 로제와의 협연에 의한 말러의 <교향곡 제4번>, 그리고 테너 무레이디키와 바리톤 피셔-디스카우를 독창자로 한 말러의 <대지의 노래> 등이 그의 음악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로열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지휘한 챠이코프스키의 <1812 서곡>, 무소르그스키의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도 좋은 연주이다.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으로는 힌데미트의 교향곡 <화가(畵家) 마티스>, 루토슬라프스키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등이 있다.
협주곡 앨범으로는 피아니스트 폴리니의 협연과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연주에 의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피아니스트 샹송 프랑스와의 협연과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 연주에 의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수연(秀演)이다.
'교향곡,협주곡,관현악,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Rimsky Korsakov"- "Scheherazade"(세헤라자드-"연아의 스파이럴") (0) | 2018.06.26 |
---|---|
"Rachmaninov"심포니 No.2 - Simon Rattle지휘 (0) | 2018.06.18 |
"Maurice Andre"- 트럼펫 협주곡. (0) | 2018.05.01 |
"졸탄 코다이"의 "갈란타 무곡"- 런던심포니 연주(Istavan Kertesz지휘).[탄노이 사운드]. (0) | 2018.04.30 |
"Julian Lloyd Webber(줄리안 로이드 웨버)"의 첼로(Delius첼로협주곡). (0) | 2018.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