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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 가는 음악(3)-("산울림"-'아니벌써' '불꽃놀이'). ("노고지리"-'찻잔' '오두막'). ("솔개트리오"-'여인' '떠난사람').("소리새"-'그대 그리고 나','별아가씨').<한국의 트리오>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21. 5. 27. 22:13

1980년대 초,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는, 특히 중구 소공로를 비롯한 도심에서는 직선제 개헌과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로 연일 시끌벅적 했는데, 이때부터는 넥타이부대 까지 시위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것을 막기위해 쏘아대는 최루탄 가스로 인해 남대문에서 신세계백화점 일대는 연일 매케한 연기와 지독한 냄새 때문에 비염이라는 반갑지않는 콧병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의 가요계에서는 억눌린 마음을 털어 내기라도 하는듯 그룹사운드가 유행하였고,

여기에 소개되는 '트리오'들도 이시기에 탄생 하였습니다. 

1977년 데뷔 앨범을 발표하여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으로 선풍을 일으킨 "산울림"을 비롯하여, 역시 산울림의

'김창완'이 기획 연출한 "노고지리" 그리고 1981년 결성된 "솔개트리오('한정선' 대신,'한영'으로 바뀌어 "소리새"로 )"

등은 우리나라의 남성 트리오의 중심 역활을 해왔는데, 지금은 벌써 타계한 멤버가 나오는등 격세지감을 느낌니다만, 

1980년대 초, 당시에 인기를 누렸던 노래 들을 모아 당시의 추억 속으로 찾아 갑니다.

<1977년 발매-김창완(기타, 보컬), 김창훈(베이스 기타, 보컬), 김창익(드럼,타계함)으로 결성된 산울림의 노래>

-첫번째 "아니 벌써" (그시절 低價의 M/M 카트리치로 많이들어 소리골 손상이 심하지만, 이것도 그시절의 추억?)- 

-두번째 "불꽃놀이"-

<1979년 발매-'한철수(리더기타)' ''한철호(드럼)' '홍성삼(베이스)' 3명으로 결성된 "노고지리" 의 노래들>

-첫번째 '찻잔'-

-두번째 "오두막"-

<1985년 발매-'한정선(타계)'이 주축으로 '김광석' '황영익' 으로 결성된 "솔개 트리오"의 노래들>

"솔개트리오"는 한정선, 김광석, 황영익이 멤버로서 1980년에 결성되었으며 "그대 그리고 나"를 국민 애창곡으로 만든

포크송 그룹 '소리새'의 전신이 된 그룹이며, 이곡의 작사 작곡자 "한정선"솔개트리오의 노래 전곡을 작곡한 천재

뮤지션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아직도 못다한 사랑"은 아직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첫번째 "여인"-

-두번째 "떠난 사람"-

<외로운 여자>

"어쩌다 그녀가 내마음 몰라줄때면 나는 잊어야하는 고독을 미워하는 이유를 버린 여자

*사색은 오늘도 변함 없지만 모두가 타인처럼 기어이 나를 잊고 떠난다면 너무 외로운 여자

어디에 그토록 뜨거운 가슴을 달래려 하나요 음~~~~~

갈곳은 아직 많지만 반겨줄 사람은 없는 여자.

 

'한정선'은 1980년과 9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 "솔개트리오"의 멤버이자 작곡가 이다. ‘짠물 집시’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인천 출신의 통기타 명수들인 '한정선', '황영익', '김광석(가수 고(故) 김광석과 동명이인)'으로 구성된 이들은 ‘아직 못

다한 사랑’ 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한정선'이 건강상 이유로 탈퇴하자, '한영'을 영입해서 "소리새"

를 결성하여 불후의 명곡 '그대 그리고 나'를 탄생 시켰다.

-첫번째 "그대 그리고 나"-

-두번째 "별 아가씨"-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파트'라는 주거문화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이때는 명품아파트 같은것은

없었고, 주택공사(지금의 말많은 LH공사), 시영아파트 등 서민들의 주거문화로 공동주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파트에는 주로 젊은층 들이 분양을 받아 살고 있었고, 또한 당시의 정부시책에 따라 공동주택에는 일정한 

체육시설의 설치가 의무화 되어, 이곳(서울의 **아파트)에도 테니스장이 만들어져 있었고, 이때부터 테니스는

그 동호인들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시골 중학교에서 배운 연식정구 덕분에 동호회에서 회장을 맡게

되었고, 매월 '월례회'라는 것을 열어 서로의 실력들을 겨루게 되고 서로와의 친목을 다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