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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4번-"Michelangeli"연주.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9. 9. 20. 20:29

이태리 출신의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4번은

여타 유명 연주가들에 의해 연주와 녹음이 되었지만,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던지 자신의 피아노와 조율사를 꼭

함께하고 연주를 한다는 "미켈란젤리"의 이연주는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연주에서도 찿아볼수 없는 힘과 기교가

베어있는 강렬하고, 하늘을 떠도는 듯한 영롱한 피아노 음율을 감상할수 있습니다.이음반은 1969년 EMI 레코딩 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4개의 피아노협주곡 중, 4번을 "미켈란젤리"가 연주합니다.(spu구형,연주시간24분38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G단조 제4번 Op. 40'은 1926년에 완성 되었지만, 초연에 실패하고 몇차례의 수정을

거쳐 1941년에 출판이 됩니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질감의 개선과 함께 더 선명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들은 더 큰 단순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복잡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완벽주의자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는 1920년 이탈리아 북부의 브레시아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이자 피아노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네 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그는 브레시아 음악원을 거쳐 열 살이 되던 해에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18세가 된 1938년 벨기에에서 개최된 이자이 국제 페스티벌에 참가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심사위원이었던 코르토(Alfred Cortot)는 그의 연주를 듣고 “새로운 리스트의 탄생”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켈란젤리의 활동은 이탈리아와 독일로만 제한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46년이 되어서였고, 그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러시아, 일본 등에서 놀라운 연주를 선보이며 청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한 기교와 명료한 음색, 날카롭고 정교한 해석과 폭넓은 다이내믹 등으로 구현되는 그의 음악은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모방할 수 없는 독자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다. 특히 미켈란젤리는 그 특유의 완벽주의로 인한 기벽으로도 유명한데, 연주 때마다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가지고 갔으며 전속 조율사도 함께 대동했다. 또한 자신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는 망설임 없이 연주회를 취소해버리곤 했으며, 음반 작업에도 극히 엄격한 기준으로 신중하게 임했기 때문에 많은 음반을 남기지 않았다.

                                      

미켈란젤리의 레퍼토리는 매우 폭넓지만, 특히 베토벤 음악에 있어 특유의 개성을 잘 드러낸다. 1967년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가 이끄는 파리 교향악단과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내적인 긴장감을 결코 놓치지 않으면서도 깊은 표현력을 보여주는 연주로 평가되며 현재까지도 전설적인 음반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라벨과 드뷔시 음악에서도 그의 완벽에 가까운 음색이 빛을 발한다. 특히 1971년에 녹음한 〈영상〉과 〈어린이 차지〉는 정교하고 섬세한 음색의 향연과 어우러진 환상적인 표현으로 드뷔시의 음악을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연주자

또한 미켈란젤리는 전체주의와 독재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이탈리아 공군에 입대하여 의사이자 파일럿으로 복무했다. 그는 조국을 전체주의의 위협에서 구하는 것이 음악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으며, 급기야 무솔리니 정권에 반대 운동을 펼침으로써 투옥되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피아니스트로서 활동을 재개했지만 10년 후 건강을 이유로 시골로 내려가 은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9년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세계 각국에서 활발한 연주를 선보였고, 볼로냐, 베니스, 토리노 등의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이그나츠 모라베츠 등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하면서 후학 양성에 정열을 쏟았다. 그가 태어난 브레시아에서는 1965년부터 미켈란젤리의 이름을 딴 피아노 음악제가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리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과 상업적으로 변질된 이탈리아 음악계에 환멸을 느끼고 1968년 이후 이탈리아에서의 연주활동을 그만두었고, 1972년에는 조국을 떠나 스위스의 루가노로 이주했다. 이후 23년 동안 그는 이탈리아를 철저히 외면하였고, 죽어서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루가노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1988년, 그는 심장병에 시달리면서도 보르도에서 열린 자선 연주에 참가했고, 그해 대규모 심장수술을 받았다. 몇 년 후인 1995년 그는 루가노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고, 그의 바람대로 루가노의 조용한 마을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