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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書 공부"

復菴集(복암집)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3. 1. 25. 21:12

 

 

복암 조원순

 산청군 삼장면 대포마을에 소천서당(小川書堂)이 있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소천서당은 아담하기가 이를 때 없었다. 추범 권도용이 지은 기문에 '소천서당'이 '소천서당'인 이유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곳은 한줄기 맑은 물이 서쪽에서 흘러와 당 앞을 지나 동으로 흐르고 여울은 깊은 소(沼)가 되어 덕천(德川)과 합쳐진다. 덕천이 대천(大川)이기 때문에 소천이라 했겠지만 그러나 대포(大浦)의 대자(大字)를 취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소천이라 한 것은 무슨까닭인가. 대개 중용(中庸)의 ‘小德은 川流’라는 뜻을 겸하여 취한 것이 아닌가. '소덕'을 '천류'라고 한것은 곧 대덕(大德)의 전체(全體)에서 나뉜 것으로 하나의 근본이 만수(萬殊)가 되는 까닭이다. 대덕의 두터운 교화는 유출(流出)하여도 다함이 없고 소덕의 천류(川流)는 흐름에 거침이 없다. 라고 말한 주자(朱子)의 뜻은 그 근본을 궁구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체득하라는 것이다. 수백권의 장서를 갖추고 날마다 그 가운데 거처하면 관수(觀水)의 방법을 알아 그 근본을 깨우칠 것이다,"

 

 '덕천'이 '대천'이기 때문에 '소천'으로 지은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서당의 주인공은 남명선생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누구인가. 기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복암 조공은 산해부자(山海夫子)의 이름난 후손이다. 일찍부터 가학을 익혀 함영(涵泳)하였고 말과 행실은 하나도 지적할 것이 없었다. 이에 온전히 남쪽 선비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지리산 자락에서 50여년을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1870년 공이 삼종제 필순(泌淳)으로 더불어 학계(學契)를 만들었으니 그 선조를 받들고 후손을 넉넉히 한 계책은 우연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1899년 대포에다 집 한채를 매입하여 학문할 장소로 삼고자 했더니 다음에 봄에 겨우 집 한채를 지었다. 그러나 10년사이에 상사(喪事)가 거듭되고 집안일이 번잡하더니 이 집 또한 화재를 면치 못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 양가(兩家)의 자제들이 협력하여 서실을 세우고 1924년에 공의 아들 용상(庸相)씨가 사종질(四從姪) 재환(再煥)과 함께 그 곁에 정사를 건립하더니 또 서원 업무의 분주함으로 인하여 3년만에 완공하여 소천서당(小川書堂)이라고 편액했다"

 

 이 서당의 주인공은 복암 조원순이며, 그 아들 조용상이 부친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암(復菴) 조원순(曺垣淳)은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10세손으로 성재 허전(許傳)으로부터 학행과 예법을 배웠으며, 한주 이진상(李震相)에게 수학하면서 특히 주리론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전수한 강우지역의 선비이다.

 

 복암은 평생을 살면서 남명 선생의 자손으로서 도리를 다하고자 했다. 일찍이 남명선생의 ‘신명사도(神命舍圖)’와 ‘신명사명(神命舍銘)’을 해석하여 남명선생의 경의지학(敬義之學)의 취지를 밝히고 또 선생의 문집 및 학기에 잘못 전해지고 그릇된 것을 교정하여 선생의 학문을 널리 계승하는데 한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백헌 정재규는 '복암집' 발문에 이르기를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경의지학(敬義之學)이 전해지지 않아 선비들의 취향이 날로 비루해져 말을 하는데 사리에 맞지 않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유학이 쓸모없는 학문이 되고 다른 학설이 날로 성해 온 세상이 혼탁하게 되었다. 아 누구를 탓하겠는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삼백 여년만에 선생의 후손인 복암이 나와 도를 밝히고 이를 실천할 수 있었다”라는 말로 복암이 남명의 학문 계승에 얼마나 공이 많은 지를 밝히고 있다.

 

 복암은 1850년 덕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영(錫永)이며,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우병(佑秉)의 딸이다. 복암이 태어난 마을은 현재 산청군 삼장면 대포마을이다.

 

 복암은 5~6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책을 읽다가 뜻이 통하지 않으면 반드시 심사숙고해 이를 해결했다. 공부에 정진하던 중 가학(家學)으로 이어져 오는 남명선생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으로 일찍이 자기 임무를 삼은 것이다. 이때 마을의 어른들은 “이 아이가 집안을 빛낼 것” 이라며 기대를 했다.

 

[img1] 일찍 학문의 목표를 정한 복암은 곧 과거를 포기하고 지리산 자락인 고향에 은거하면서 성현들이 남긴 책들을 세밀히 익힌다. 그리고 남명선생이 남긴 문집과 학기 중에서 논란이 있는 부분을 하나 하나 고쳐 나갔다.

 

 복암은 1894년 남명선생의 ‘신명사도(神命舍圖)’를 교정하면서 남명에게 누가 될 것 같은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의 글자를 빼는 등 상당부분을 수정했다. ‘國君死社稷’ 5자는 본래 '禮記''曲禮'에 나오는 말이다. 남명이 이 다섯 글자를 굳이 써넣은 이유는 임금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사직을 위해 죽을 각오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잠시라도 경(敬)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 다섯 글자에 대해 후세 경상우도 지역의 학자들 사이에 커다란 논란이 생겼다. 그래서 복암이 이 글자들을 모두 빼 논란을 잠재우려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논란은 후로도 계속 이어져 나갔으며, 복암의 남명선생의 학문 계승은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후 여러가지 논란이 이어져 미수 허목이 지은 '남명 신도비' 철거 등의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영남지역에서 남명선생에 관한 여러가지 논란이 일어나는 상황속에서 복암은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논란을 벌였던 학자들과의 학문적 교유는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한주 문인인 대계 이승희, 면우 곽종석이 복암을 위해 글을 썼으며, 노론인 노백헌 정재규도 복암 문집 발문을 짓는 등 복암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명선생 학문 계승에 일생을 보낸 복암은 1903년 남명선생 기일(忌日)인 2월 8일 제례에 참가하고 돌아오다가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9일 후인 17일 거처하는 '직방당(直方堂)'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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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2] 복암이 평생 지은 글들은 '복암집'에 실려 전한다. 복암집은 7권 3책의 분량으로 1908년 아들 용상(庸相)이 간행하였다. 1권에는 시 51수, 2~3권에는 소(疏) 1편, 서(書) 141편, 4권에는 잡저 18편, 5~6권에는 서(序) 10편, 기(記) 5편, 발(跋) 7편, 명사(銘辭) 6편, 제문 9편, 묘갈 1편, 묘표 행장 각 2편, 7권은 부록으로 행장·묘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청종사소(請從祀疏)'는 남명선생을 종사(從祀)할 것을 요청한 내용이다. 서(書)의 '여조방백서(與曺方伯書)' 관찰사 조시영에게 보내는 편지로 백성의 교화를 위하여 향약을 실시하도록 권유한 내용이며, 이 편지의 별지인 '별지의권유방(別紙擬勸諭榜)' 은 경계나 지벌(地閥)에 관계없이 몇 개 면을 병합하여 향약을 실시하되 계의 물자는 계원이 출자하여 마련하고 계안(契案)은 나이순에 따르되 서인(庶人)은 별도로 할 것 등 8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도 후산 허유, 노백헌 정재규 등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기(理氣)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히 논의한 내용이 있다. 잡저의 '성설(性說)'·'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은 심성(心性)을 설명한 내용이고, '균전론(均田論)'은 1862년 삼정(三政)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책문(策問)할 때 허전이 올린 항산전(恒産田)에 관하여 설명한 뒤 이를 실시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내용이다.

 

 또한, '봉건론(封建論)'은 중국의 천자와 제후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설명한 것이고, '교중륜시향중문(校中輪示鄕中文)'은 삭발은 오랑캐의 풍속이므로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글로 삭발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약조 4개항을 첨부한 것이다. 이 문집은 경상대학교 문천각 등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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