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래빈"의 이음반은 워낙 유명한 음반이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이 필요할것 같지 않지만, 기존 발매된 lp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음질이 많이 떨어지는데,최근 재발매된 이음반은 녹음도 아주잘되어 있고 또 Stereo녹음이라서
들어보면 기존lp와 확연한 차이를 느낍니다.
"마이클 래빈"이 연주하는 "지고이네바이젠"(일명 집시의노래)은 짙은 음색의 애절함이 슬프기 까지 합니다.
"리치"와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감정의 변화가 있을듯...........................
재발매된 이음반은 EMI레코딩 이며,영국제작 입니다.
"이음반에 실린 모든곡들은 "래빈"의 천재적인 연주에 감탄할 것입니다"
마이클 래빈,Michael Rabin (May 2,1936 - January 19,1972)
미국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마이클 래빈은 동시대 바이올리니스트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한편으로는 가장 비극적인 삶을 보낸 바이올리니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신동으로 불리우며 성인 연주자로 성장했지만 그의 감수성의 성장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고 그것이 결국 그의 연주 경력의 단축을 가져왔다.
그는 36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으나 같은 문하에서 수학했던 핀커스 주커만(Pinchas Zukerman)처럼 음악가나 청중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래빈은 1936년 5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래빈의 아버지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였으며,어머니는 줄리어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였다.
래빈은 1살에 정확한 박자를 칠 줄 알았으며 3살에는 완벽한 음감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5살까지는 피아노를 배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올린을 취미로 연주했던 의사를 방문했을 때 사무실에 있던 작은 바이올린을 들고 조율하더니 연주하고 나서는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래빈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다섯번째 레슨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의 아들에게 그를 뛰어넘는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아챘다.
결국 래빈은 후에 쥴리어드 음악원에 들어가서 이챠크 펄만과 핀커스 주커만을 가르친 이반 갈라미안을 사사하였다.
1947년,10세 때에 마이클 래빈은 아르투르 로진스키(Artur Rodzinski)가 이끄는 하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비에냐프스키(Wieniawski)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연주하면서 전문 연주가로 데뷔하였다.
2년 후 파가니니 카프리스 중 11곡을 모아 콜럼비아 마스터웍스 레이블로 첫번째 레코딩을 녹음하였다.
이듬해 13살의 나이에 비외탕(Vieuxtemps)의 <바이올린 협주곡 5번>으로 카네키 홀에 데뷔하였으며, 뉴욕 타임스는 그를 두고 "이미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다.
정말 아름답고 우아한 톤을 가졌다."라며 갈채를 보냈다.
지휘자 조지 셀(George Szell)은 래빈을 두고 지난 30년 동안 그가 주목했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재능 중 최고라며 극찬하였고,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는 레빈을 '미래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1950년대 레빈은 EMI(Capitol-EMI)와 계약하고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비에냐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1,2번>을 비롯해 차이코프스키,멘델스존,글라주노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 그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녹음하였다.
1950년대 말 래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녹음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전세계를 돌며 연주회를 계속했고,1960년대에는 방송 연주회에도 출연하면서 시들지 않은 그의 재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감정의 불안정과 안정되지 못한 사생활에 대해 설명하자면,그는 재능이 퇴보하는 징후가 전혀 없었음에도 신동에서 성인 연주가로 변모하는데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1960년 말에는 만성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는 얘기도 있었으며,무대에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같은 불필요한 노이로제를 보이기도 했다.
이 어떤 것도 래빈이 그의 녹음 경력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래빈은 1959년 이후로 다시는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1972년 아직도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그는 복도에서 미끌어지면서 의자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사망하고 말았다.
마약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최근에 있었던 앤소니 파인스타인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머리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서 죽었다고 한다.
래빈의 연주는 완벽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풍부하고 굵은 음색을 들려준다.
래빈의 연주 대부분이 그의 이러한 특징을 대변해주는 호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그가 남긴 명반 중의 하나로 1959년에 녹음한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루지에로 리치가 1947년 이곡 전곡을 녹음한 이후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이곡 전곡을 녹음하는 것은 함부로 도전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래빈의 1959년 전곡 녹음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이차크 펄만이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을 녹음한 이후에야 래빈이 먼저 레코딩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당시 래빈의 레코딩을 들은 이후 만약 자신이 녹음하기 전 래빈이 먼적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이 곡을 녹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물론 펄만의 파가니니 연주도 훌륭하지만,래빈의 연주를 들어보면 그가 느꼈을 심정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주옥같은 음반들을 남겼을텐데,아쉽게도 현재까지 레코딩한 곡들은 대략 시디 6장 정도 분량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적은 레코딩에도 불구하고 한곡 한곡에서 그의 꽃같은 음악적 열정이 살아 숨쉬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래빈이 남긴 음반은 EMI의 카탈로그에 집중되어 있다.
파가나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전곡 녹음은 한장의 CD로 구입할 수 있으며,협주곡을 포함한 그의 나머지 녹음은 6장짜리 CD 세트로 발매되어 있다.
지휘자
Felix Slatkin (펠릭스 슬래트킨)
펠릭스 슬래트킨은 1917년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그는 처음에는 명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며 음악계에 데뷔했다. 그리곤 LA에서 영화 음악 녹음을 위한 오케스트라에 관여하며 콘서트마스터로 일을 하기도 했다. 1948년에는 헐리웃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해 제1바이올린을 맡기도 했다. 그는 이 4중주단의 음악발전에 큰 공헌을 했고, 그러는 와중에 지휘자로서의 욕심도 생겨 헐리웃 보울에서 열리는 ‘스타라이트 콘서트’에서 헐리웃 보울 교향악단을 지휘할 기회를 얻었다. 이 공연에서의 호평으로 그는 서서히 지휘자로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미국인들로부터 특히 많은 사랑을 받는 그의 지휘 스타일은 마치 라이브를 듣는 듯한 그런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으며 경쾌하고 색채적이라는 것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1963년 2월 8일 LA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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