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noy","아날로그",그리고 LP!

"Tannoy로 듣는 세상의 좋은 音樂들"

"Autograph" 에서 듣는 세상의 좋은 音樂들" 자세히보기

교향곡,협주곡,관현악,등.

"Johann Strauss 2세"- Emperor Waltz(황제월츠) 外.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5. 11. 19. 11:15

매년 신년음악회 에서 연주되고 있는 "요한 스트라우스2세"의 "황제월츠","푸른 도나우"등이 실려있는 이음반은

'Karl Bohm"이 지휘하는 비엔나 필이 연주하여, 마치 왕궁에서 신년음악회를 듣는듯한 황홀함에 빠져듭니다.

이음반은 1973년 "그라마폰"레코딩입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독일어: Johann Strauß II, 1825년 10월 25일 ~ 1899년 6월 3일)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역시 작곡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들이다. 아버지·동생(요셉) 등 가족 모두가 빈·바르츠바 등에서 이름을 얻은 음악 가족이다. 왈츠의 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1825년 10월 25일 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음악의 자질을 보였으나, 부친은 요한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844년에는 자기의 악단을 결성하였고, 19세 때 레스토랑에서 자기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184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악단도 합병하였고, 지휘자·작곡가로서 인기를 높였다. 1851년부터는 악단을 인솔하고 세계 연주 여행을 떠나 큰 호응을 얻었다. 1863년에 가수 헨리에테 트레푸츠와 결혼하였다. 1855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 하기 음악회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862년 자기의 오케스트라를 형제에게 양보하고 작곡에 전념하였다. 1864년에는 오페레타(희가극)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가 빈을 방문하고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오펜바흐의 왈츠 〈석간〉에 대항해서 〈조간〉을 썼다.

1870년경부터 오페레타도 만들기 시작하였고, 〈인디고와 40명의 도적〉(1871년 초연)으로 성공을 거두었다(이 작품은 오늘날 〈천일야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지휘하였다. 1874년 빈에서 초연됐던 오페레타 〈박쥐〉는 빈 오페레타의 최고의 명작으로 되었다. 1878년 부인이 사망, 그 뒤 다시 결혼하였다.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오페레타는 전부 합쳐서 16곡에 이르나, 〈박쥐〉를 빼고는 〈베네치아의 한밤〉(1883년 초연)과 슈트라우스의 만 60세 탄생을 축하하여 1885년에 초연된 〈집시 남작〉이 지금도 애호되고 있다. 또한 〈빈 기질〉이라고 제목 붙여진 오페레타는 슈트라우스의 유명한 음악을 이어 모아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슈트라우스 자신이 작품을 보고 승인하여 주었다. '왈츠왕'으로서의 슈트라우스는 500곡이 넘는 왈츠, 폴카, 그 밖의 곡을 남기고 있다. 왈츠 〈남국의 장미〉, 〈황제 원무곡〉, 폴카 〈피치카토 폴카〉 등도 유명하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작품314(1867). 1868년 오스트리아는 '보오전쟁'에 패하고, 이로 인해 빈 시민은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당시 궁정무도 악장직을 맡고 있었던 슈트라우스는, 시민의 마음에 밝은 빛을 되찾아줄 만한 합창곡을 '빈남성합창협회'로부터 의뢰받았다. 거기서 머리에 떠오른 것이 빈을 관류하고 있는 도나우를 노래한 시인 카를 베크의 시였다. 이를 시인 게르네르트로부터 합창용으로 고쳐받음으로써 이 유명한 왈츠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빈의 숲이야기,작품 325(1868).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다음해의 작품으로서, 대표적인 빈의 왈츠이며, 또한 뛰어난 묘사음악이기도 하다. 새의 지저귐을 흉내낸 플루트카덴차나 농민의 춤 '렌틀러'의 묵직한 리듬, 민속악기 치타의 솔로 등의 요소를 첨가하여, 빈 교외 숲의 정경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완만한 왈츠의 템포로 시작되는 다소 긴 서주 뒤에 5개의 왈츠가 따르고, 이윽고 후주에서는 빈의 아름답고 즐거운 숲을 회상하는 것처럼, 서주와 같은 치타가 독주하는 렌틀러가 다시 나타나고 급속히 끝맺음으로 들어간다.

박쥐,오페레타의 대표작이다. 그의 특기인 왈츠나 폴카로 이루어져 있으며, 줄거리의 흥미로움과 함께 음악의 즐거움을 만끽케 해주는 작품이다. 대본은 하프너와 주네에 의한 3막짜리로서, 밝고 화려한 오페레타이다. 유명한 서곡으로 시작되고, 즐거운 명곡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원숙한 수법이 충분히 표시된 작품으로서 1874년 빈에서 초연되었다.

Karl Bohm.-1894년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 지방의 중심지 그라츠의 가장 부유한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다양한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게 되는데 지휘자 프란츠 샬크의 눈에 띄어 빈에 나가 음악학자 만디체프스키에게 음악을 배웠다.
1917년에는 네슬러의 오페라 "제킹엔의 나팔수(Der Trompeter von Saekkingen)"를 지휘하여 지휘자로서도 정식 데뷔를 하게 된다. 이 공연을 계기로 그동안 작곡가, 성악코치, 지휘자 등의 여러 역할들을 고루 거쳤던 그는 드디어 지휘자로 방향을 정하게 된다. 한편, 1919년에는 그라츠대학에서 법률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지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카알 무크의 후원을 얻기도 하였다.
1921년 발터의 초청으로 뮌헨국립오페라의 지휘자가 되었는데 발터로부터 모짜르트,바그너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7년 그는 보수적인 뮌헨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분위기를 지닌 다름슈타트의 헤센 주립극장(Hessisches Landestheater)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여 동시대 음악가들의 다양한 현대 음악들로 그 레퍼토리들을 넓혔으며 현대 오페라 제작에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1931년에는함부르크 음악 감독 시절에는 R.Strauss작품의 성공으로 슈트라우스에 호의를 얻게 되고 슈트라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1933년에 최초로 빈국립오페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해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1934년에는 프리츠 부슈의 후임으로 드레스덴 국립오페라를 맡아 황금시대를 구가하기 시작하였으며 R.슈트라우스, 바그너의 작품들을 연주하게 되었다.
1935년에는 "말 없는 여인 (Die schweichsame Frau)"의 초연 등을 통해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1938년 슈트라우스로부터 "다프네 (Daphne)"를 헌정받아 초연하였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데뷔하는 등 지휘자로서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1942년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uernberg)"의 기념비적인 무대를 끝으로 드레스덴을 떠나 1943년부터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을 맡게 되었다. 1944년에는 슈트라우스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빈 국립가극장에서 가졌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Ariadne auf Naxos)" 공연하였으나 이듬해, 1945년 독일 패망과 함께 지휘활동 금지가 연합군에 의해 내려졌다.
1947년에 연주금지 처분이 해제되자 그의 음악인생은 다시 시작되었다. 전쟁 중에 폭격으로 소실된 빈 국립가극장을 대신하여 안 데어 빈 극장(Theater an der Wien)에서 공연활동을 하였으며 1948년에는 밀라노 라 스칼라 데뷔 무대를 하였다. 1949년에는 빈 국립가극장의 파리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50년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콜론극장에서 베르크의 "보체크(Wozzeck)"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54년에는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한편, 1955년에는 재건된 국립가극장 건물에서 역사적인 재개관 기념공연으로 베토벤의 "피델리오(Fidelio)"를 지휘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1956년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한 이후에는 1957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 초청되어 "돈 죠반니(Don Giovanni)"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였으며 이 후, 뵘은 1970년대까지 정기적으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객원지휘를 하였다.
1962년부터 바이로이트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전후의 바이로이트 음악제 중가장 훌륭한 연주이고 "니벨룽겐의 반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압도적인 명연들로 그 웅변성과 장려함은 이를 데 없었다. 1964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에게 오스트리아 음악총감독의 명예직을 수여 받았다.
1970년 빈 필의 명예 종신음악감독을 비롯하여 1974년 함부르크 국립가극장의 명예 지휘자, 1977년 런던 심포니의 명예 음악감독 그리고 1978년 뮌헨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명예 지휘자로 여러 명예직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1974년 오스트리아 문화성는 칼 뵘 상을 제정하였으며 그 해, 독일 후기낭만주의 전통 계승의 상징인 '니키쉬 링'의 계승자였던 그의 업적을 기린 '니키쉬-뵘 링'으로의 개명되기도 하였다.
1981년 여름, 뵘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로 잘츠부르크 교외의 별장에 있던 칼 뵘은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Kaiser-Walzer, Op. 437
Emperor Waltz "황제 월츠"
Herbert von Karajan, cond
Berliner Philharmoni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