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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ten(브리튼)"첼로조곡,Op.72,80- "로스트로포비치"연주.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20. 3. 18. 10:15

"벤자민 브리튼(1913~1976.영국)은 "엘가"이후 가장 유명한 영국의 작곡가 이며,영국 오페라의 한 학파를 세우고 수많은

기악곡과 성악곡을 남긴 1950년대 영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자리를 잡게됩니다.그의 음악은 폭넓은 지지층을 형성하며

심오한 음악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외로움과 고통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난다. 좌절하고 사랑에 목마를때 완성된 음악이야말로 더없이 아름답다!"

"브리튼"의 말입니다.

 

무반주 첼로조곡은 대작인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리고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졸탄 코다이"의

찐~한 무반주 첼로(Op.8)가 있고, 더불어 여기"브리튼"의 무반주 첼로조곡(Op.72,80)은 3개(Op.87포함)중 2개의 곡입니다.

이 첼로조곡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있느데,"로스트로포비치"에 의해 연주되고 또

음반을 녹음했습니다. "브리튼"의 첼로조곡은 위 두작곡가의 첼로조곡과는 달리 담백 하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명곡 입니다.               이음반은 "데카"에서 녹음되고 "런던ffrr" 에서 발매된 1970년 음반입니다.

 

-"브리튼"의 첼로조곡,1번(1~6). ('로스트로포비치' 연주)-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

그레고리우스 1세에 의해서 제정된 그레고리오 성가가 영국 캔터베리 초대 대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손으로 소개되면서 비로소 영국의 음악 역사는 시작된다. 10세기엔 윈체스터 대성당에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고, 15세기의 작곡가 존 턴스터블은 유럽에까지(특히 프랑스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뛰어난 창작 활동을 했다. 16세기와 17세기엔 윌리엄 버드·존 다울런드·기번스·토머스 몰리 같은 재능 있는 작곡가들이 영국의 음악을 빛냈다. 그러나 이무렵까지만해도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작곡가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로소 나타난 최초의 국제적 작곡가는 헨리 퍼셀(H.Purcell,1659∼1695)이었다. 그러나 퍼셀은 40세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영국의 작곡계는 오랜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영국의 바로크 음악은 독일인인 헨델이 메꿔 준 셈이다. 오히려 이 시대부터 영국 음악계는 유럽 대륙에서 건너 온 작곡가들의 시장으로 터를 잡는 형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웬일인지 영국 음악계는 창작 부문의 결핍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덧 이러한 현상은 영국의 전통처럼 굳혀 지는가 싶었다. 그러던 가운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단의 재능 있는 작곡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엘가·델리어스·홀스트 등 세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평가도 제한적인 국제성을 가졌기 때문에 명실상부하게 국제적으로 영국 음악의 거장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기를 영국 음악계는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었다.

그 소망을 성취시킨 인물이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이다. 헨리 퍼셀 이후 실로 3세기만에 등장해서 영국 작곡계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리는 눈부신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리튼은 작곡가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 였으며 또한 저명한 지휘자이고 음악제의 관리자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브리튼은 치과의사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우스토프트의 합창단 간사로 활동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에 친숙했다. 영국 중산계급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12세 때부터 브릿지(F. Bridge)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9살의 어린 소년이 현악4중주곡을 작곡할 정도로 놀라운 재능을 보인데 탄복하고 브릿지 자신이 브리튼을 가르치겠다고 자청했던 것이다. 그의 지도법은 대단히 엄격한 것이어서 후일 브리튼이 위대한 작곡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16살 때, 장학금을 받고 왕립음악대학에 진학하여 작곡과 피아노를 연마하고 이 무렵 '단순 교향곡(Simple Symphony)'을 썼다. 1934년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부친이 별세했기 때문에 당장의 집안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당장의 호구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긴 했으나 이때의 경험이 후일 그의 창작에 큰 보탬이 되었을 뿐 아니라, 시인 오든(W. Hugh Auden)을 알게된 것은 그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를 통해서 영시(英詩)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에 눈뜨게되고, 시와 음악의 미학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또한 오든과의 교우(交友)를 통해서 예술가의 사회적·정치적 책임에 대해서도 새로운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후일, 브리튼이 지금까지의 레퀴엠과는 전혀 형태를 달리하는 라틴어 전례문(典禮文)과 오웬의 영시(英詩)를 결합 시켜서 전쟁의 부당성과 민족간의 화해를 모토로 삼는 [전쟁 레퀴엠]을 쓰게된 것도 오든의 영향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보여주는 실증(實證)인 셈이다.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은 이름난 '행동하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그의 생애를 일관하게된데는 어린 시절의 스승이었던 프랭크 브릿지(Frank Bridge)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릿지는 세계 제 1차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이 빚어내는 학살과 엄청난 피해를 목격하면서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자신의 사상을 어린 제자에게 심어 주었던 것이다. 후일, 브리튼은 스승을 일러서 '온화한 평화주의자'로 불렀는데, 이에 비해서 그 자신은 '행동하는 적극적인 평화주의자'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평화에 대한 그의 사상을 처음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15세 때인 1915년에 쓴 수필이 있다. 동물들을 죽이는 사냥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전쟁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잔혹행위를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수필이 주변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곧 메어(Walter de la Mare)의 시(詩)를 텍스트로 삼은 가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중의 한 노래는 덫을 놓는 사냥 감시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1936년, 그의 최초의 걸작 관현악곡으로 평가되는 작품 [우리들 사냥의 조상들(Our Hunting Fathers)]을 썼다. 새와 짐승들에게는 물론 사람들에게 잔혹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오든(W.H.Auden)의 작품을 주제로 삼은 관현악 곡이었다. 이 작품은 동시에 유태인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독일에 대한 명백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과 작품 활동을 상기한다면 1942년, 브리튼과 피터 피어스(Peter Pears)가 미국에서 3년간을 보내고(1939년, 오든이 미국으로 귀화하자 브리튼도 유럽의 불안한 정세를 피해서 피어스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 돌아와서 참전을 거부하고 그 대가로 법정에 서게되는 일련의 사건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브리튼이 참전거부의 의사를 명백하게 밝히자 영국 정부는 그에게 왕립 공군 음악감독으로 취임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고 브리튼이 이를 수락하자 참전문제로 야기된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기에 이른다. 또한 영국 법정은 브리튼과 피어스가 군대를 위한 연주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군복무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우리는 벤자민 브리튼이 '행동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학자 켈러(Hans Keller)는 브리튼을 '적극적 평화주의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하는 평화주의는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6일전쟁이 발발 했을 때 "무기를 드느니 차라리 아랍의 탱크 앞에 드러눕는 것이 낫다"고 이 전쟁을 비난한데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브리튼은 자연 속에서, 그리고 영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해변에서 일을 하고 낚시나 테니스, 스포츠 카, 서포크의 모래언덕을 지나는 긴 산책을 즐겼다. 브리튼은 일의 계약을 제외하고는 런던에 가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때는 지휘자로서 또는 반주자로서 참가하였으며, 그의 친구인 테너 가수 피터 피어즈와는 대개의 경우 함께 참가했다. 피어즈는 피터 그라임즈 역을 초연했으며, 브리튼은 그를 위하여 유명한 세레나데 op. 31(1943) 같은 가곡을 많이 작곡했다.

브리튼은 본질적으로는 성악곡 작곡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모든 인성에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유명한 가수들을 존경하고 있었다. K. 페리어는 최초의 루크레시아 역을 맡았으며, D. 피셔 디스카우에게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노래와 격언을 헌정했고, 자네트 베이커를 위해서 '페드라 op. 93'을 썼다. 그의 음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어린이의 목소리에 대한 특별한 기호이다(작은 연통 소제, 캐럴의 제전, 봄의 교향곡, 나사의 회전 중 마일즈 역, 전쟁 레퀴엠 등).

브리튼의 작품은 독창적이고 서정적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영국적인 작품이다. 실리적인 성격이었던 부리튼은 자기의 음악은 항상 그 어떤 욕구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질을 희생시키지는 않았다. 대단한 교양을 갖추고 있던 그는 시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도 예민했다. 특히 엘리자베스왕조 시대의 거장들의 음악이나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작품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나타내었다."이 글은 새벽출판사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