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셉 하이든(오스트리아,1732~1809)의 조금 독특한 실내악인 플룻이 더해진 네개의"포 트리오" 곡이
2Lp로 구성된 이음반은, "하이든"의 곡이 다 그러하듯 귀족풍의 우아함에 포르테피아노의 화려함이 빛을 발하며,
또한 느린 악장에서는 눈물을 뚝뚝 흘릴만큼 슬픔이 베어 나오는, 천재작곡가 "하이든"다운 명곡입니다.
포르테피아노에"Steven Lubin, 플룻에"Rebecca Troxler", 첼로에"Myron Lutzke, 바이올린에"Richard Luby.
이렇게 한팀을 이룬 "The Mozartean Players"가 연주하는 이음반은 1981년 AR 레코딩 입니다.
-"하이든"의 트리오G장조,작품no25(연주시간15분18초)-
"요세프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동쪽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와 같은 해의 태생으로, 이 무렵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절대주의를 확립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마차 수리공인 아버지를 둔 하이든은 누나 한 사람을 포함한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38년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고 수양아저씨 프랑크(프랑스)의 집에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된다.
그리고 1740년 빈의 성 스테파노 대성당의 소년합창대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자유롭기는 하였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1759년까지 10년간이나 계속되고 그 동안의 자세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N.포르포라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고 음악 애호가인 귀족 툰백작부인의 하프시코드 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귀족 퓌른베르크남작 집안의 실내음악가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스테파노 대성당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가수로서 예배주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세레나데악단에 참여하여 빈거리로 나와 돈을 버는 일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칼 폰 모르친(Karl von Morzin) 백작의 궁정악장(宮廷樂長)에 취임하였다. 보헤미아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러(Maria Anna Keller)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는 연상의 아내에게서 가정의 행복을 평생 느끼지 못한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인 헝가리의 귀족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안의 관현악단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당시 관현악단의 관리와 훈련이 그 주임무였으며, 이로써 관현악 작법도 현저히 진보했다.
1762년 파울 안톤 후작이 타계하자 형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예술의 옹호자인 동생 니콜라우스 후작이 뒤를 잇는다.그의 후원아래 관현악단은 충실히 확대되고 악장으로 취임한 하이든은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후작은 베르사유 궁전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에스테르하자(Eszterháza) 별궁을 세우고 함께 여름 동안에는 전속 음악가도 동행하였는데, 1772년 여름 후작의 체재가 길어지자 《고별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는 유명한 일화가 생겼다. 이러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지런하고 충실한 악장 하이든과 단원과의 사이는 매우 원만해서, 교향곡 외에도 단원을 독주자로 하는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많이 썼다. 그 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서 고전 시대 음악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 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안 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 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 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 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에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와 친교가 있었는데, 첫 번째 영국 체류 중이던 1791년에 모차르트는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가던 1792년 본에 들렀던 하이든은 거기서 처음으로 젊은 베토벤을 만났으며, 그 후 잠시 빈에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베토벤이 왕성한 작곡 활동을 하게 될 무렵에는 은퇴하여 여생을 즐겼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제2회 빈 공략의 포성을 들으면서 7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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