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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hms+Schoenberg"-Piano Quartet No.1 in G minor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6. 12. 2. 10:13

"아놀드 쇤베르그(1874~1951 오스트리아)"에 의해 재작곡된 "브람스"의 피아노 현악4중주곡인 이음반은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완전히 또다른 곡으로 연주된 색다른 곡으로, 내자신이 음악속으로 빠져 들듯한 감성이 베어있는 음악입니다.


"쇤베르그"는 20세기 그 어느 작곡가 보다도 많은 오해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물론 그의 음악은 과거와 단절되었다.

그러나 "쇤베르그"는 자신의 음악이 게르만 음악 전통의 일부이며, 무조(장조도 단조도아닌)는 음악의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단계라고 믿었다.

"쇤베르그"의 이음반은 1985년 EMI 레코딩 입니다.


     쇤베르크는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7개 온음과 5개의 반음을 포함한 12개의 음을 골고루 사용하여 곡을 구성하는 12음 기법을 적용한 곡을 작곡하여 장조나 단조의 조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조 음악을 선보인 인물이다. <현악4중주 D장조>는 쉰베르크의 곡 중 대중에게 최초로 연주된 것으로 브람스의 양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9년 발표된 현악6중주 <정화된 밤>은 낭만적인 표제음악 성격을 띠는 것으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대한 발전으로 꼽히며 후에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되었다. 1909년 완성한 피아노 소품 작품 11-1번은 음 구성의 수단으로서의 '조성"과 완전히 결별한 최초의 작품이다. 12개의 음을 골고루 사용하는 방식으로 곡을 구성하는 ‘12음 기법’을 최초로 만들어 현대 음악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으며, 쉰베르크 이후의 작곡가들은 이 작곡법을 바탕으로 작곡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쇤베르크(Arnold (Franz Walter) Schoenberg)


개요

무조성을 만드는 12음계에 의한 체계적인 작곡 기법을 창조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자로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버른 등 중요한 작곡가들을 길러냈다(음렬주의).


초년

아버지 사무엘은 빈의 유대인 제2지역에서 조그만 신발 가게를 경영했다.

사무엘과 아내 파울린은 음악에 대해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으나, 그당시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이 그렇듯이 음악을 좋아했고, 가족 중 형 하인리히와 사촌 한스 나호드는 직업 가수였다. 나호드는 재능 있는 테너 가수로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 Gurrelieder〉의 초연 때 발데마어 역을 맡기도 했다. 9세가 되기 전에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품들을 작곡했고, 선생이나 사촌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얼마 뒤 비올라를 연주할 줄 아는 친구를 만난 것을 계기로 2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현악 트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쇤베르크는 오스카르 아들러(나중에 유명한 점성가로 〈Das Testament der Astrologie〉를 저술했음)를 알게 되었고 그의 권고로 첼로를 배우게 되었다. 이로써 그와 그의 친구들은 현악4중주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곧 현악4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했지만, 1악장 소나타 형식의 구성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기술의 터득은 그의 가족이 할부로 구입한 백과사전 〈Meyers Grosses Konversations-Lexikon〉 중 S자(字) 편을 참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890년 아버지가 죽은 후 쇤베르크는 1895년까지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이 기간에 그는 성장을 거듭하던 젊은 작곡가이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폴리힘니아의 지휘자였던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를 알게 되어 그 관현악단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쳄린스키와의 친밀한 우정 속에서 그에게 화성법·대위법·작곡법을 배웠고, 그 결실로 〈현악4중주 D장조〉(1897)를 작곡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쇤베르크의 곡 중 연주된 최초의 작품으로 브람스의 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곡은 1897~98, 1898~99년의 연주회 시즌에 빈의 청중들에게 좋은 평을 얻었다.


주요작품들

1899년 그는 상당히 낭만적인 표제음악인 현악6중주 〈정화된 밤 Verklärte Nacht〉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중대한 발전이었다.

이 곡은 같은 제목의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기초해서 만든 것으로, 현악6중주로 작곡된 최초의 표제음악이었으며 표제가 갖는 관능적 성격과 화성으로 인해 보수적인 표제음악 작곡가들을 격분시켰고, 그결과 1903년에 가서야 초연되었다. 초연 때에도 청중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이후 그의 원래의 곡과 현악 편곡이 모두 쇤베르크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

1901년 경제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베를린으로 옮겼고, 친구 쳄린스키의 누이인 마틸데 폰 쳄린스키와 결혼했다. 소박하고 예술적인 분위기의 카바레 위베르브레틀에서 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연주하기 위해 소프라노와 피콜로·트럼펫·작은북·피아노를 위한 〈몽유병자 Nachtwandler〉 등 수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의 생활과 창작활동에 충분할 정도의 보수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슈테른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을 얻게 되었고, 독일음악진흥협회가 수여하는 리스트 장학금을 받았다.

슈트라우스의 격려로 벨기에의 작가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희곡을 기초로 대규모 관현악단을 위한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und Melisande〉(1902~03, 그의 유일한 교향시)를 작곡했고, 1903년 빈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사귀게 되어 이후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중요한 작품은 현악4중주 1번 D단조 작품 7(1904)이었는데, 이 작품은 두터운 음악적 짜임새와 이례적인 형식(고전적인 현악4중주의 전통적인 4개 악장들이 거의 중단 없이 하나로 묶여 50분 동안 계속됨)으로 인해 1907년 초연 때는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실내 교향곡 E장조 Chamber Symphony in E Major〉(1906)는 앞의 작품과 비슷한 형식을 사용했지만 더욱 압축적인 곡으로 합주악기의 선택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였다(후기 낭만주의에서 사용한 '거대한' 관현악단 대신 15대의 악기에 의한 실내악 편성을 사용함). 이 기간에 교육자로서 점차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04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작곡가인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버른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쇤베르크는 이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으며, 그 역시 제자들로부터 지적인 자극을 받았는데 저서 〈화성법 강의 Harmonielehre〉(1911) 서문에 "이 책은 내 제자들로부터 배운 것이다"라고 쓸 정도였다. 선생으로서의 재능은 이 책뿐 아니라 〈작곡 초심자를 위한 모범 Models for Beginners in Composition〉(1942)·〈화성의 구조적 기능 Structural Functions of Harmony〉(1954)·〈대위법 초보 연습 Preliminary Exercises in Counterpoint〉(1963)·〈작곡의 기초 Fundamentals of Musical Composition〉(1967) 등 교재 성격을 띤 여러 저술에도 잘 나타난다.


조성으로부터의 이탈

이전까지의 그의 모든 작품은 엄격하게 조성음악(하나의 주음을 중심으로 나머지 음들이 위계구조를 이룸으로써 조성감을 갖는 음악)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점차 복잡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함에 따라 조성의 중요성이 훨씬 약화되었다.

조성을 '극복'하는 과정은 현악4중주 2번(1907~08)의 마지막 악장 시작부분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악장 앞에는 시인 슈테판 게오르크의 시구 "나는 또다른 흑성으로부터의 공기를 느낀다"(Ich fühle Luft von anderen Planeten)가 적혀 있는데, 흔히 쇤베르크가 새로운 음향세계(무조성의 세계)로 들어섬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해석되어왔다.

1909년 2월 19일 그가 완성한 피아노 소품 작품 11-1번은 음 구성의 수단으로서의 '조성'과 완전히 결별한 최초의 작품이다.

이제 그는 더이상 조성적 중심(음들간의 위계질서를 이루는 데 있어서 중심이 되는 음, 즉 으뜸음)이 존재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제한도 받지 않는 상태로 자유롭게 음들이 화성적·선율적으로 배합될 수 있는 음악을 쓰기 시작했고, 이것은 흔히 무조성 음악이라 불리게 되었다. 쇤베르크 자신은 무조성이라는 표현보다는 '범조성'(pantonality)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무조성으로 된 기악곡들은 흔히 길이가 아주 짧았고, 성악곡의 경우에는 길이가 길 수 있었지만 가사가 통일성의 수단을 제공해야만 했다. 그가 당시 작곡한 중요한 무조성 작품들로는 〈5개의 관현악 소품 Five Orchestral Pieces〉 작품 16(1909),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모노드라마 〈기대 Erwartung〉 작품 17(1924), 실내악 반주가 곁들여진 21개의 낭송적 '멜로드라마' 〈달빛 속의 피에로 Pierrot Lunaire〉 작품 21(1912), 음악이 있는 드라마 〈운명의 손 Die glückliche Hand〉 작품 18(1924), 미완성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 Die Jakobsleiter〉(1917 작곡 시작)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이전에 작곡한작품들도 처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13년 2월 23일 〈구레의 노래〉(1900 작곡 시작)가 빈에서 초연되었다. 이 거대한 칸타타는 이례적으로 커다란 규모의 성악 및 관현악을 요구하는 작품으로, 말러의 교향곡 8번 〈천인의 교향곡 Symphony of a Thousand〉과 함께 후기 낭만주의의 기념비적 양식의 절정을 상징하는 곡이다. 이 작품은 초연 때 청중으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그 자신은 그 작품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며 청중의 열광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1911년 빈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자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으며,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빈에서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다.

1916~17년에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잠시 복무했으나 질병으로 제대했다. 전쟁기간에는 작곡을 하지 못했는데, 군복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성으로부터의 이탈이 야기한 커다란 구조적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풀 것인가에 대한 성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유자재로 풍부한 화성·선율 재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원리를 찾고자 했다. 1921년 7월말경 그는 한 제자에게 "오늘 나는 앞으로 100년간 독일 음악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해주게 될 그 어떤 것을 찾아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곧 12음 기법(즉 12개 음들이 위계구조를 갖지 않는 가운데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연관되도록 하는 새로운 작곡방법)이었다.

12음 기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작품은 〈피아노 모음곡 Piano Suite〉 작품 25였다.

12음 기법에 의한 음악작품은 12개의 서로 다른 음들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음렬로 이루어진다. 음렬에는 원래의 형태 그대로인 원형음렬과 이것의 변형들, 즉 전위음렬(원형음렬과 구성음들의 순서는 같되 음정관계를 뒤집어놓아 만든 음렬, 한 예로 원형음렬이 E음에서 F음으로 반음 상행 진행하면 전위음렬에서는 E음에서 E♭음으로 반음 하행 진행함)·역행음렬(원형음렬의 음들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태로, 한 예로 원형음렬이 E음에서 E♭음으로 진행하면 역행음렬에서는 E♭음에서 E음으로 거꾸로 진행함)·역행전위음렬(역행을 하고 난 뒤 다시 전위를 하여 만든 음렬) 등이 있으며, 모든 음렬은 어떤 음높이로도 전이가 가능하여, 음렬은 정해진 음정관계만 유지하면 반음계의 12개 음 중 어느 음높이로도 시작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원형음렬은 원형·역행·전위·역행전위에 의한 4가지 형태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48개(12×4개)의 변형음렬이 생기게 된다. 이로써 작곡가는 융통성을 갖고 작곡할 수 있게 되었다. 음렬의 각 음들은 또한 옥타브 진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음렬에서 만들 수 있는 선율의 가능성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한 예로 E-F-G로 시작하는 음렬을 가지고 작곡을 할 경우, 작곡가는 E-F-G를 반음씩 순차 상행 진행할 수도 있지만, 또한 E음 다음의 F음을 한 옥타브 위의 음으로 도약 진행시키고 또다시 G음을 도약 하행 진행시킬 수도 있다. 이로써 12음 체계의 융통성은 더욱 커지게 되며, 이것은 12음 기법에 의한 선율들이 종종 이례적인 도약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한 음렬의 음들은 시차적(선율적)으로 차례로 배열할 수도 있지만, 동시적(화성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화음을 형성할 수도 있다.

사실 12음 기법을 사용한 곡에서 모든 화성 및 선율은 음렬에서 유도되어나온 것이다. 12음 기법은 얼핏 규칙에 얽매인 듯 보이지만, 쇤베르크는 대작 〈모세와 아론 Moses und Aron〉(1930 작곡 시작) 등의 실제 작곡을 통해 이러한 우려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12음 기법을 사용했다.

때로 전통적인 조성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가 말한 대로 "C장조로 여전히 좋은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말년에 작곡한 조성음악 작품으로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Suite for String Orchestra〉(1934)·〈레치타티보 선율을 주제로 한 오르간 변주곡 Variations on a Recitative for Organ〉 작품 40(1940), 〈밴드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 Theme and Variations for Band〉 작품 43A(1943) 등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쇤베르크의 음악은 점차로 명성을 얻었지만, 12음 기법의 고안 자체는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 그의 아내인 마틸데가 오랜 와병 끝에 죽었고, 1년 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 루돌프 콜리슈의 누이 게르트루트 콜리슈와 재혼했다. 1925년에는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작곡과 마스터 클래스 수업을 요청받아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활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교습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여러 중요한 작품들도 작곡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 들어선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의 활동을 제약함에 따라 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젊은 시절에 버렸던 유대교로 전향했다. 1933년 11월 보스턴의 말킨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1934년 캘리포니아로 이주, 1941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후 여생을 보냈다.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1935~36),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1936~44)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미국에서 작곡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12음 기법의 처리에 있어서 더욱 능숙함과 자유로움을 보였고, 특히 뛰어난 곡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36(1934~36), 현악4중주 4번 작품 37(1936), 피아노 협주곡 작품 42(1942),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Fantasia〉 작품 47(1949) 등을 들 수 있다.

1951년 7월 2일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신음악을 위한 여름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20세기 음악에 정통한 헤르만 셰르헨의 지휘로 〈모세와 아론〉 중 〈황금송아지를 에워싼 춤 Dance Around the Gold Calf〉이 연주되었다. 이 연주회의 대대적인 성공을 알리는 전보로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했지만, 11일 후 죽었다. 그는 비록 전자음악에 의한 궁극적인 혁명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혁신적인 작품활동이 없었다면 전자음악도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https://youtu.be/DKy5HbFgK9w  <클릭하면 음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