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작곡된 "피렌체(프로렌스)의 추억"은 2대의 바이올린 2대의 비올라 2대의 첼로라는 다소 이색적인
악기편성이 인상적 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체류기간을 연상시키는 곡명과 상관없이, 이곡은 여러면에서 다분히 러시아적
분위기 입니다.
"로스트로포비치"와 "보로딘"4중주단이 함께 펼치는, 짙은 첼로의 음색에 화려하고 강렬한 현악기의 현란함은,
가히 최고라 할만 합니다. 제작연대가 표시되지를 않으나, 구소련의 오리지날 레코딩인 것으로 봐서,1960년대
녹음된 "Melodia"에서 발매된 음반입니다.
-"프로렌스의 추억" 1악장-
-"프로렌스의 추억" 2악장-
-"프로렌스의 추억" 3악장-
-"프로렌스의 추억" 4악장-
<므스티슬라프 레오폴도비치 로스트로포비치>
Мстисла́в Леопо́льдович Ростропо́вич, 1927년 3월 27일 ~ 2007년 4월 27일)는 소련 시절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러시아인 첼로 연주자이자 지휘자이다. 뛰어난 기교 및 해석능력 뿐만 아니라(특히 드보르작과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에 대한 해석이 유명하다.) 다양한 새로운 곡들을 소화하는 면모를 보여 20세기에서 가장 뛰어난 첼로 연주가로 손꼽힌다. "슬라바"(Slava)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아제르바이잔 SSR의 바쿠 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동안 모스크바 동쪽 10시간 거리의 오렌부르크로 옮겨 거주하다가 1943년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이후 1970년대에 정치적 이유로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가 1974년 미국으로 망명했고, 19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1987년 영국 명예 KBE훈장(외국인대상 명예훈장)을 받았으며, 1995년 폴라음악상을 수상하였다.[1]
로스트로포비치는 10세 때부터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로 유명했던 첼리스트인 아버지로부터 연주를 배우다가, 1943년 모스크바로 옮기면서 모스크바 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사사하기도 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1942년 첫 첼로 협주를 한 이후로 수차례에 걸쳐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의 각종 대회에서 수상을 했고 1945년에 소련 연주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첼리스트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스탈린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모스크바 음악학교와 레닌그라드 음악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56년 정식 첼로 교수가 되었다. 이후 로스트로포비치는 볼쇼이 극장 소속의 소프라노 갈리나 비시넵스카야와 결혼했다.
1953년 그를 위해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첼로소나타(Cello Sonata in C, Op.119)와 작곡가의 죽음으로 미완이 된 소나타를 드미트리 카발레스키(1904년~1987년, 러시아의 동요 작곡가)와 함께 완성해 성공적으로 초연하기도 했다.
1964년, 로스트로포비치는 당시 서독에서의 첫 연주를 시작으로 작곡가들로부터의 많은 헌정곡을 시연했다. 1968년 8월 21일, 소련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런던에서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곡으로 오케스트라 데뷔 공연을 하던 중 그날 밤 소련의 체코 침공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스승인 쇼스타코비치는 구 소련의 공산주의 정치를 반대하다가 교수직을 박탈당하며, 로스트로포비치 역시 학교를 중퇴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당했다. 그는 소련시민권을 박탈당하여 여러 국가의 제안을 뿌리치고 모나코에서 비자만 발급받은 뒤 무국적자로써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이후로 소련에서의 연주를 금지당했으나, 1993년 러시아 헌법사건에서 서방 세계와 함께 옐친 대통령 측을 옹호함으로써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옐친 대통령이 그의 시민권회복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세계인의 삶을 선택했다.
2007년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 궁에 방문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장암으로 사망했다. 모스크바 노보데비키에 묻혔다.
-보로딘 4중주단(1944년 창단)-
모스크바 음악원 테리안 교수의 실내악 교실에서 수업을 받던 4명의 졸업생(제1바이올린에 로스티슬라프 루빈스키, 제2바이올린에 니나바르 샤이, 비올라에 루돌프 바르샤이, 첼로에 발렌틴 벨렌스키)들이 모여 만들었다. 얼마 후 모스크바 필하모니에 속하게 되어 명칭도 모스크바 필하모니 현악4중주단으로 바뀌었고, 1955년에는 당국으로부터 '보로딘 (기념 국립) 현악4중주단'이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1962년 에든버러 음악제에 데뷔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유럽에서 인정받게 되었고, 1964년 마침내 미국 데뷔를 했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고, 특히 차이코프스키·스트라빈스키·쇼스타코비치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실내악 연주에 정평이 나 있다.
차이코프스키, 현악 6중주 '피렌체의 추억'
Sextet for Strings in D minor, Op.70
'Souvenir De Florence'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피렌체의 상징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1890년 1월,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초연을 성황리에 마친 차이콥스키는 거의 탈진 상태에 빠졌다.
후원자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국외나 국내를 막론하고 모든 연주회 일정을 취소하고 이탈리아로
가서 넉 달 정도 쉬면서 다음 오페라 작업을 해야겠습니다.”
라고 토로했다. 1월 30일 피렌체에 도착한 그는 푸슈킨의 희곡에 기초한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의 작곡에
매달려 6주에 걸쳐 초안을 잡았고 다시 6주 뒤에는 대부분의 작업을 마쳤다. 워낙 감정 이입을 잘 하는 그였기에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을 위한 곡을 쓰면서는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직후 [피렌체의 추억]에
착수했는데, 어쩌면 이 작품은 그런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이례적인 편성, 만만찮은 산고
[피렌체의 추억]은 여러 모로 이례적인 작품이다. 먼저 현악 6중주라는 형태가 러시아 실내악에서는 보기 드문
편성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비단 러시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둘러봐도 이 분야의 명작은 브람스 정도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 차이콥스키의 작품세계에서 실내악이라는 장르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아도 그런데,
그가 남긴 실내악곡은 8편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차이콥스키는 왜 이런 작품을 썼던 것일까?
일단 1890년 7월에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추측해볼 수 있다.
“이 곡은 집에서 간단히 편곡하여 연주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연주회에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 폰 메크 부인은 와병 중이라 외부 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하필 ‘현악 6중주’라는
형식을 취한 이유까지 설명되지는 않는다. 이 곡의 첫 스케치가 이루어진 시점은 18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는 상트 페테르부크르 실내악 협회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아 놓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굳이 6중주라는
형태를 택했던 것은 가급적 많은 회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낯선 장르에 대한 도전은 만만치 않은 산고를 안겨주었다. 작곡 초기에 그는 여섯 개의 성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관현악용 악보를 작성한 다음에 그것을 6대의 현악기를 위한 악보로 ‘재편곡’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이 생겨 작업은 한결 수월해졌지만, 그런 우여곡절은 야릇한 결과로 이어졌다. 오늘날 이 곡은 ‘현악 6중주’보다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더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피렌체의 명소 아르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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