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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타,독주곡,실내악,조곡.外

"Sergei Rachmaninoff"- 첼로소나타 G단조 op.19-"로스트포비치"연주.[tannoy sound].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6. 4. 25. 20:36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는 묘한 중독성이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몇 안되는 첼로곡 중, 대표곡으로

'보칼리제'와 함께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연주하는 첼리스트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하는 첼로소나타는, 언젠가 독일 베를린의 장벽

밑에서 '바흐' 무반주첼로를 연주하던 "로스트로포비치"의 무아지경에 빠진듯한 연주모습이 떠올라 숨죽이며 듣게되는,

차분 하면서도 절제된 연주는 왜 "로스트로포비치"가 금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인가를 보여주는 음반입니다.

"레프 오보린"의 피아노와 함께한, 이음반은 1967년"polydor"社의 레코딩입니다.

"라흐마니노프"가 1901년에 작곡한 '첼로 소나타'는 피아니스트 이며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가 단순히 반주악기 로서

피아노 파트가 아닌, 하나의 독립성부 로서의 피아노 파트를 작곡 한것으로 생각되며, 그해 초연도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피아노 파트를 연주 했습니다. 피아노협주곡 2번과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첼로소나타는 아름다울 뿐만아니라

음악성이 뛰어나며, 피아노 파트의 난이도는 여타 첼로 소나타와 비교해서도 상당히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스트로 포비치"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소나타'1,2,3악장(연주시간22분).-

낭만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소나타 처럼 네악장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1악장-렌토 알레그로 모데라토 (G 단조).  2악장-알레그로 스케르잔도 (C 단조).

3악장-안단테 (E-flat 장조).             4악장-알레그로 모소 (G 장조).

 

-"로스트로 포비치"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소나타'4악장(연주시간9분45초).-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G 단조 Op.19는 1901년 11월에 완성되어 그 다음 해에 출판되었다.

또 그는 이 곡에서 피아노의 역할을 반주로서가 아니라 첼로와 동일하게 간주했다. 대부분의 테마는 피아노에 의해 소개

되었고 첼로 부분은 이들을 꾸미고 확장시킨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아나톨리이 브렌더코브"에게 바쳤고. 그와 함께 모스코바 에서 그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1901년 12월 2일에 첫 공연을 가졌다. "라흐마니노프"는 초연 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 이곡을 완성 했다.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노브고로트의 일멘 호수 근처에 위치한 할아버지 소유의 영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퇴역 육군장교였으며 어머니는 장군의 딸이었다. 이러한 가문전통에 따라 소년 라흐마니노프는 육군장교가 될 운명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무리한 투자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가족을 버렸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사촌 알렉산드르 실로티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모스크바에 있는 저명한 음악교사 겸 피아니스트인 니콜라이 즈베레프의 가르침을 받도록 권유했다. 음악사에 금세기 최고의 피아노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라흐마니노프를 엄격하게 훈련시킨 즈베레프 덕분이었다.

일반 교양과 음악이론 공부를 위해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다.

19세에 음악원을 졸업했으며 졸업 당시 단막 오페라 〈알레코 Aleko〉(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시 〈집시들〉을 바탕으로 함)로 금상을 받았다. 작곡가와 연주회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명성과 인기는 전주곡 C#단조와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시작되었다.

전주곡 C#단조는 1892년 9월 26일에 초연되었으며 처음으로 그에게 청중의 관심이 쏠리게 한 작품이지만 청중들이 끊임없이 이 곡의 연주를 요구했기 때문에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힌 곡이기도 했다. 1901년 10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초연된 최초의 주요 성공작인 협주곡 2번은 침체기를 지낸 뒤 그에게 다시금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후에는 의지를 통해 마음의 평정을 찾음으로써 통제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젊은 시절 라흐마니노프의 정열적인 성격은 대인관계와 작품의 성패에 따른 정서적 불안에 휩쓸렸다.

자기 불신과 불확실성은 그를 깊은 침체 속으로 빠뜨렸는데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교향곡 1번 D단조의 실패에 따른 것이었다. 그 교향곡의 연주는 형편없었으며, 비평가들은 그것을 비난했다(그가 죽은 후 많은 음악학자들은 이 교향곡을 그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일 뿐만 아니라 교향곡 문헌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한 작품으로 평가함). 이 시기에 사랑의 실패로 고통받던 라흐마니노프는 정신과 의사인 니콜라이 달의 치료를 받았는데, 달은 그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줌으로써 그가 피아노 협주곡 2번(달에게 헌정되었음)을 작곡할 수 있도록 했다.

달과의 관계는 음악보다는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에 보다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그는 사촌인 나탈리 사틴과 결혼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하면서 곧 창작 활동을 다시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도 여러 소품들을 발표했다. 협주곡 2번은 아름다운 선율 주제들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되었다.

         

혁명이 일어났던 1905년 라흐마니노프는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비록 정치적으로 혁명에 개입하기보다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했지만, 1906년 11월 가족과 함께 드레스덴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교향곡 2번 E단조(1907)와 교향시 〈죽음의 섬 The Isle of the Dead〉(1909), 피아노 협주곡 3번 D단조(1909) 등 주요작품들을 작곡했다. 이 가운데 협주곡 3번은 그의 첫 미국 순회연주를 위해 특별히 작곡된 것으로, 1909년 11월 28일 발타 담로슈가 지휘하는 뉴욕 심포니와 협연한 미국 데뷔 연주에서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가운데 통일성에 있어 가장 뛰어난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피아니스트의 뛰어난 기교를 요구하는 곡으로 마지막 악장은 그 어떤 피아노 협주곡보다 화려하다. 필라델피아와 시카고에서는 지휘자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는데 자신의 최신 관현악곡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작품들 가운데 교향곡 2번이 가장 중요하다. 이 교향곡은 비록 과도한 낭만주의적 기법으로 흐르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상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깊은 정서와 매력적인 주제 선율이 돋보인다.

순회연주 동안 보스턴 심포니의 종신 지휘자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하고 1910년 2월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당시 러시아 음악계는 반목과 불화로 작곡가들을 여러 계파로 분류했는데 이에 따라 라흐마니노프의 위치와 그 작품도 분명하게 분류되고 규정되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5인조(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르크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추종자들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코프스키, 안톤 루빈스타인, 타나예프를 따르는 보수적인 성향의 무리가 있었다.

또다른 보다 작은 무리는 스크랴빈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세계파 가운데 라흐마니노프는 분명 차이코프스키 계열에 속했다. 어떤 특정한 혁신도 회피한 그의 서정성은 피아노곡에서보다는 오히려 방대한 수의 가곡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비록 거의 대부분이 20세기에 작곡되었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분명 19세기 음악어법에 속해 있으며 실제로 차이코프스키가 구체화한 전통의 마지막 주자였다.

낭만주의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폭발적인 변화와 실험의 시대에도 아직 아름다운 선율을 쓰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거주했던 제2의 작품 가운데 기억할 만한 것은 합창 교향곡인 〈종 The Bells〉인데 이 곡은 포의 시를 콘스탄틴 드미트리예비치 발몬트가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 비록 이 작품이 교향곡 레퍼토리의 명곡이 되기는 했지만 합창과 관현악을 결합시켜 모방적인 성부 진행과 구조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1917년의 혁명 후 라흐마니노프는 2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그의 여생을 보낼 가정을 꾸몄다. 그후 25년 동안 영어권에서 살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능숙한 영어를 구사하지는 못했으며 가족과 몇몇 친구들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다.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들을 그리워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위한 공명판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감은 이전의 그에게서 볼 수 있었던 왕성한 창작 능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때 독창적인 작품은 거의 작곡하지 못했으며, 다만 몇몇 이전 작품들을 개작했다. 사실 그는 미국과 유럽에서의 연주활동에 전념했으며 그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 기간에 작곡된 작품 가운데 예외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교향곡 3번 A단조(1936)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1934)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음산한 슬라브적 우수를 표현했고 후자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상곡을 주제로 한 변주곡이다.

이 광시곡은 피아노 협주곡 2번과 함께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작품 가운데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은 아직까지도 연주회의 주요 레퍼토리로 연주되고 있다. 지금은 교향곡·성악곡·피아노곡들이 청중을 끄는 힘이 조금 떨어졌지만 그의 작품과 독특한 연주에서 우러나는 전반적인 매력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음악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다.

 

"레프오보린(러시아,1907~1974)"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오보린은 이른바 ‘러시아 피아노악파’의 낭만적인 연주 스타일에서 근대적인 피아노 주법으로 이행하던 시기에 러시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리고 명교사로서 기교와 해석면에서 합리적인 피아니즘을 제자에게 전수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피아니스트로 숱한 명반을 남겼던 러시아의 명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은 공교롭게도 오이스트라흐가 타계한 해인 1974년 그보다 몇 달 앞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차르트에서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으며,하차투리안의 협주곡을 초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뛰어난 앙상블 연주자로 특히 오이스트라흐와의 연주는 가장 이상적인 이중주를 만들었다.

그는 절제와 자기 수양을 음악 활동의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았던 연주자로, 철두철미한 컨트롤과 단정함이 가장 큰

특징이다.

[출처]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