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르뉴"지방의 목가곡을 "앙헬레스"의 몽환적인 목소리로 듣게되는 이음반은, "Jean-Pierre Jacquillat"가 지휘하는
The Lamoureux 오케스트라의 음장감이 넘치는 연주와 함께, 꿈속을 헤매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1975년 EMI 레코딩 입니다.
-목가적인 노래들-
Auvergne(오베르뉴)
프랑스,알리에·퓌드돔·캉탈·오트루아르 주들을 포함한다. 주도는 클레르몽페랑이며 북쪽으로는 셰르·니에브르 주, 북동쪽으로는 손에루아르 주, 동쪽으로는 루아르 주와 아르데슈 주, 남쪽으로는 로제르·아베롱 주, 남서쪽으로 로트 주, 서쪽으로 코레즈·크뢰즈 주와 접해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아르베르니족은 베르킨게토릭스 족장 지배하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 강력한 동맹국을 이루었으나 후에 로마인들에 의해 아퀴타니아프리마에 합병되었다.
913년 클레르몽(지금의 클레르몽페랑) 자작들이 오베르뉴 백작이라는 세습적 칭호를 받게 되었다. 12, 13세기에 이 지방에는 도피네도베르뉴, 테르도베르뉴, 클레르몽 주교백작령 등 3개의 대(大)백작령들이 더 생겼다. 1503년 부르봉 공작 샤를이 테르도베르뉴와 도피네도베르뉴를 통일시켰는데, 후에 프랑수아 1세가 이 부르봉 영토를 몰수하여 어머니인 사보이의 루이즈에게 주었다. 루이즈가 죽은 후인 1532년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오베르뉴 백작령은 1422년 라투르 가문에게 넘어갔다가 1551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세습되었는데, 그녀는 클레르몽의 소유권도 얻었다. 이 영지들은 1610년경 프랑스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오베르뉴는 마시프상트랄에 속하며, 파리 분지가 알리에까지 뻗어 있다. 대서양의 영향을 직접 받는 서부에서는 습윤기후가 우세하게 나타나며, 동부에서는 대륙성기후가 지배적이다. 인구밀도가 낮은 편이며, 1946년 이후로 인구증가가 감소했다.
사람들은 점점 알리에 평야지대로 모여드는 추세인데 남쪽의 산들을 깎아 이 평야지대를 넓혀왔다. 캉탈과 오트루아르의 인구는 대부분 시골에 남아 있는 반면에 이 지역 전체 주민의 1/2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타지역으로의 이주로 노년층의 비율이 높아서 그 결과 이 지역의 출생률은 전국 평균보다 낮다.
산악지대에서는 축산업이 주로 이루어지며, 오트루아르와 퓌드돔에 걸쳐 있는 비옥한 평야지대 리마뉴에서는 밀과 사료작물이 경작된다. 포도재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동부의 결정작용으로 형성된 대산괴에 있는 작은 농장들에서는 호밀이 생산된다.
이주민들과 도시 주민들이 투자한 기금이 수목 육성장을 조성하는 데 일조해왔다. 퓌드돔의 티에르에서는 날붙이류 제조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장인들의 기술과 정신은 대체로 후대에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제조업은 19세기말 공업 중심지로 부각된 클레르몽페랑과, 파리와 가깝다는 이점을 지닌 알리에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클레르몽페랑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타이어 공장인 미슐랭 공장이 있으며, 알리에의 몽뤼송코망트리 공업단지에서는 타이어·컴퓨터·기계류 등이 생산된다. 온천으로 유명한 이 지역의 비시·네리레뱅·부르봉라르샹보·루아야 등 여러 도시에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면적 25,988㎢, 인구 1,317,839(1991).
카탈라니의 디바 Victoria de los Angeles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1923.11/1~2005.1/15)
밝고 명랑하게 보이면서도 청순가련하게 보이는 미모의 소프라노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는 1923년 카탈로니아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호세 카레라스, 몽세라 카바예, 마리아 게이 등은 모두 카탈라니 출신이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한 카탈라니 지방 사람들은 스페인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악가의 경우에도 카탈라니 출신들은 자기들이 스페인 출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테레사 베르간자는 마드리드 출신이다. 그러므로 테레사 베르간자는 스페인 출신 소프라노이며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는 카탈라니 출신 소프라노이다.
로스 앙헬레스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릴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바르셀로나의 콘세르바토리오 데 리세오(Concervatorio de Liceo)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공부했다. 로스 앙헬레스는 6년 학부를 단 3년만에, 그것도 우등생으로 마쳤다. 로스 앙헬레스가 18세 때였다. 그의 첫 오페라 데뷔는 1944년 바르셀로나의 리세오 대극장에서 ‘피가로의 결혼’중 백작부인이었다. 모두들 아름답고 신선한 로스 앙헬레스의 출현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로스 앙헬레스의 음성은 부드럽고 따듯하며 정감에 넘치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로스 앙헬레스의 1949년 파리 오페라 데뷔와 이듬해의 코벤트 가든 데뷔는 대성공이었다. 라 보엠에서 미미역이었다. 평론가들은 지금까지 이미지와 노래에 있어서 이만큼 완벽한 미미는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1950년 로스 앙헬레스는 드디어 라 스칼라 데뷔를 한다.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에서 타이틀 롤이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는 구노의 파우스트중 마르게리트로 데뷔하였다. 이같은 메트로 공연은 로스 앙헬레스가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로스 앙헬레스는 주로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로엔그린의 엘자, 마스네의 마농, 푸치니의 나비부인역을 맡아 했다. 어떤 날에는 팔리아치의 네다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뚜짜 역을 연속으로 공연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60년대에 로스 앙헬레스는 실로 세계 곳곳의 오페라 스테이지에서 팬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 멀리 남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Colon)극장, 멕시코시티의 벨라스 아르테스(Bellas Artes)극장, 비엔나의 슈타츠오퍼(Staatsoper), 로마 오페라극장, 나폴리의 산 카를로(San Carlo)극장, 브뤼셀의 라 모네(La Monnaie)극장, 스톡홀름과 코펜하겐의 오페라 극장등 세계 유명 오페라 극장이라면 프로그램에 로스 앙헬레스의 이름이 들어 있어야 위신을 세울수 있을 정도였다. 로스 앙헬레스의 오페라 레퍼토리로서는 돈 조반니. 카르멘, 세빌리아의 이발사, 아치스와 갈라테아, 플레아와 멜리상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라 트라비아타, 시몬 보카네그라, 디도와 이니아스 등 폭넓게 걸쳐있으며 1961년에는 바이로이트 극장으로부터 새로운 제작의 탄호이저 초연에 초청받아 공연했다. 로스 앙헬레스는 오페라 경력중에 세계의 수많은 명지휘자와 함께 공연하는 영광을 누렸다. 토마스 비첨, 허버트 폰 카라얀, 게오르그 솔티, 피에르 몽토, 새를르 문슈, 툴리오 세라핀, 카를로 마리아 줄리지, 오이겐 요훔, 주빈 메타 등등 헤아릴수 없다. 또한 세계적 성악가들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디트리히 휘셔 디스카우, 제랄드 무어등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1988년 마드리드에서 로스 앙헬레스 75회 생일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 연주가인 알리시아 데 라로챠, 후안 안토니오 알바레즈, 아구스틴 레온 아라, 미구엘 자네티, 후아킨 아추카로등이 출연하는 호화 갈라 콘서트였다. 로스 앙헬레스는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피아니스트 데 라로챠(de Larocha)는 ‘로스 앙헬레스는 스페인의 보석이며 국제적인 영광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