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포레(1845~1925,프랑스)"는 분명한 낭만주의적 색채를 유지하면서 시대의 예술적 흐름에
조화를 이루는데 성공한 음악가 였으며, 그는 오페라"레퀴엠"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Thomas Igloi"의 첼로와 "Clifford Benson"의 피아노가 아주 잘 어우러 지는 이음반은 "포레"의
곡이 다 그러하듯이 서정적 이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첼로의 부드럽고 그윽한 소리가 일품입니다.
그리고 양면 후반에 나오는 "포레"의 유명한 Sicilienne와 Elegie 또한 들을수록 애잔해지는 그런
연주입니다. 녹음도 아주 잘된 1975년도 CRD 음반입니다.
-"가브리엘 포레"의 첼로소나타1번(연주시가 19분10초)-
-"포레"의 "시실리안느(시칠리아의춤,연주시간 3분57초)-
-"포레"의 '엘레지'-
가브리엘 포레는 1845년, 프랑스 남부 파미에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포레는 교회에 있는 풍금을 통해 음악과 친해졌다. 포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틈만 나면 교회로 달려가 풍금을 치면서 놀았다. 실력은 형편없었다. 테크닉도 없었고, 바르게 치는 법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을 치면서 행복했다는 것이다.
1854년, 그의 아버지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그를 파리에 있는 네데르메이에르 교회음악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훌륭한 교회음악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육은 교회음악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1861년, 생상스가 피아노과 교수로 부임했다. 생상스는 당시 유행하던 슈만,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그는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아버지처럼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청소년이었던 포레는 그의 열정과 자상한 마음에 감동했으며, 이후 평생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1865년, 포레는 피아노, 화성학, 대위법, 작곡 부문의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성 소뵈르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했다. 하지만 일을 매우 지루하게 생각한 포레는 신부가 설교하는 동안 살짝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온다거나 밤새 파티에 참석했다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오르간을 연주하는 등 눈 밖에 나는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4년 만에 해임당했다.
그 후 생상스의 소개로 클리냥쿠르 노트르담 교회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잠시 일하다 1870년 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자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엘리제 생 쉴피스의 성가대장으로 취임했는데, 이때 동료 오르가니스트 위도와 함께 경쟁하듯 연주하는 즉흥 연주를 즐겼다. 바로 이 무렵 새로운 프랑스 음악의 모색을 위해 국민음악협회가 설립되었다. 생상스가 회장이었으며, 포레는 창립 멤버였다. 그는 자기 작품을 이 협회의 음악회를 통해 발표했다.
1874년, 생상스가 수석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는 마들렌 성당의 보조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상스가 여행으로 자주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포레가 대신 연주하는 일이 많았다. 포레는 여기서 40년간 일했다. 하지만 이렇게 평생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도 정작 오르간곡은 거의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오르간보다 피아노를 좋아했다. 오르간은 그저 생계 수단일 뿐, 그처럼 섬세하고 예리한 감성과 뉘앙스를 가진 작곡가에게 오르간은 너무 둔감한 악기였다.
1878년, 그는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 〈발퀴레〉,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파르지팔〉 등을 보았다. 그는 바그너를 존경하고 그의 음악을 면밀하게 연구했지만, 자기 음악에 그것을 반영하지는 않았다. 포레는 당대 작곡가 중에서 바그너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1883년, 유명한 조각가의 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했다. 하지만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했고, 종종 다른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1892년 무렵에는 가수 엠마 바르닥과 로맨틱한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의 딸 돌리를 위해 피아노 모음곡 〈돌리(Dolly Suite Op.56)〉를 작곡하기도 했다.
1888년에는 후에 자신의 대표작이 된 〈레퀴엠〉을 선보였다. 하지만 마들렌 성당의 신부는 "우리는 이런 식의 새로운 작품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들렌 성당에는 이것 말고도 연주할 작품이 차고 넘치니까요."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892년, 파리 음악원 작곡과 교수 에네스트 귀로가 죽자 생상스가 포레에게 그 자리에 지원해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음악원 교수들은 그의 음악을 불손한 모더니즘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원장인 앙브로와즈 토마는 결사반대했다.
"포레! 절대 안 돼. 만약 그가 교수가 된다면 내가 사표를 던질 거야."
결국 포레는 교수가 아닌 지방 음악원의 감독관 일을 맡았다.
1896년, 파리 음악원 원장 토마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테오도르 뒤브아가 원장으로 취임했고, 포레는 원장이 되지 못해 홧김에 사표를 던진 마스네를 대신해 작곡과 교수가 되었다. 그 밑에서 라벨, 에네스쿠, 나디아 불랑제 등 미래의 유명 작곡가들이 공부했다. 포레는 열린 마음을 가진 스승이었다. 제자들에게 자기 스타일을 따라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1905년, 로마 대상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어났다. 포레의 제자인 라벨이 로마 대상에 연거푸 떨어지자 로망 롤랑을 비롯한 음악계 유력 인사들이 파리 음악원 교수들의 보수성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 일로 뒤브아가 원장직을 사임하고 그 자리가 포레에게 돌아갔다. 포레는 곧 개혁에 착수했다. 입학시험과 학기 중 시험, 교내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모두 학교와는 관계없는 외부 인사를 쓰도록 했다. 커리큘럼도 대폭 바꾸었다. 르네상스의 다성음악부터 드뷔시의 음악까지 레퍼토리의 폭이 확대되었다. 그전까지 금기시되었던 라모의 아리아는 물론, 심지어 바그너의 오페라까지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학생들에게 개인 레슨을 해 주며 부수입을 챙기고 있던 교수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줄줄이 사표를 던지고 학교를 떠났다.
1911년 무렵, 포레는 청각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잘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리가 왜곡되어서 들렸다. 그 후 건강이 점점 나빠져 결국 1920년에 음악원 원장직을 사임했다. 말년에 건강으로 무척 고생하던 포레는 1924년 11월 4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포레의 작품 경향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에 머물러 있는 시기로 이때는 살롱에서 유행하는 음악 등 프랑스 사교계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을 썼다. 그러다가 제2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다채롭고 눈부신 화성과 화려한 색채감을 폭발적으로 보여 주는 오케스트레이션, 관능적이고 정열적인 정서로 요약될 수 있다. 청각을 잃은 후에 쓴 작품들은 제3기에 속하는데, 이때부터는 내성적이고 금욕적이며 종교적인 작품을 썼다.
포레는 교향곡이나 협주곡 같은 큰 양식보다 독주곡이나 실내악, 가곡 같은 소규모 양식에 주력했다.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을 썼으나 오페라는 한 편도 작곡하지 않았다. 대편성곡은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들어간 교회음악이 주를 이룬다. 그중 대표작은 1888년에 발표한 〈레퀴엠(Requiem Op.48)〉이다. 레퀴엠은 대개 분위기가 어두운데, 포레의 〈레퀴엠〉은 '죽음의 자장가'라고 불릴 만큼 편안하고 평화로운 것이 특징이다. 〈입당송과 키리에〉, 〈봉헌송〉, 〈상투스〉, 〈자비로운 예수〉, 〈아뉴스 데이〉, 〈리베라 메〉, 〈낙원에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비로운 예수〉는 소프라노 독창으로 부른다. 다른 레퀴엠에 비해 〈진노의 날〉이 정서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다소 축소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신 마지막 곡으로 원래 텍스트에 없는 〈낙원에서〉를 집어넣었다. 이는 포레의 낙천적인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네 개의 상승하는 분절음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오르간 소리에 맞추어 합창단이 '예루살렘'을 반복해서 부른다.
포레는 오페라 작곡을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898년 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를링크의 비극에 곡을 붙인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elléas et Mélisande Op.80)〉이다. 나중에 이 중 몇 곡을 추려 관현악 모음곡으로 만들었다. 제1곡 〈전주곡〉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비극임을 암시한다. 제2곡 〈실 잣는 여인〉은 3막에서 성안의 방에서 멜리장드가 실을 잣고 있을 때 연주되는 음악이다. 물레가 돌아가는 단조로운 소리는 현악기가, 두 사람의 대화는 목관악기가 묘사한다. 제3곡 〈시칠리아 춤곡〉은 극과는 상관없이 교향 모음곡을 만들 때 집어넣은 것이다. 제4곡 〈멜리장드의 죽음〉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고, 그녀의 남편 때문에 멜리장드가 죽는 과정을 그렸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첼로 독주곡 〈엘레지〉, 〈시칠리아노〉, 〈현악 4중주 e단조〉, 가곡 〈꿈꾸고 나서〉, 관현악 소품 〈파반느〉, 합창곡 〈장 라신 찬가〉, 극장음악 〈칼리귤라〉, 〈서민귀족〉, 〈페넬로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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