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독일)는 어떤 의미에서 최후의 고전주의 작곡가로 볼수있는데, 시대 착오적 인물로 평가
되기도 했지만 20세기 음악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하겠습니다. "피아노 협주곡1번"을 작곡하고 23년만에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 규모가 매우 장대해서 교향곡 같다는 반응을 받기도 했고, 일반적으로 3악장 구성을 취하는 다른 피아노 협주곡들과 달리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 B flat장조, Op.83.(1,2악장) "박하우스"연주 입니다.-
"빌헬름 박하우스(1844~1969,독일)는 12세에 데뷔하여 85세까지 무려 4000여 회가 넘는 연주여행을 다녔고, 정통 독일인으로 '베토벤', '브람스'를 가장 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았던 "박하우스"는 젊은 시절엔 엄청난 힘과 기교를 바탕
으로 '건반의 사자왕'이란 별명으로 세상을 경악케 하였고, 음악적 완숙미가 더해진 말년엔 서정적이고 빈틈없는 연주로
탈바꿈 하였습니다. 평생동안 피아노를 사랑하며 피아노에 파묻혀 살았던 "박하우스"는 그렇게 피아노를 연주하며 85세의 나이까지도,그것도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까지도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팬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던 그는
틀림없이 복 받은 사람이였습니다.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 B flat장조, Op.83.(3,4악장) "박하우스"연주 입니다.-
I. Allegro non troppo. 피아노는 단일 호른이 주제를 제시한 직후에 시작됩니다. 매우
단순한 주제로, 매우 아름답고, 거의 순진한 대칭, 질문과 대답이 특징입니다. 질문과
대답의 처음 세 음표는 들을 때마다 청취자에게 경고하여 전개 또는 원래 형태로의
복귀를 준비시킵니다. 브람스가 헝가리 민속 음악에서 차용한 주제에 나오는 세 잇단음표는
그의 작품의 전형입니다.
II. Allegro appassionato. 빌로트는 이 열정적인 알레그로가 생략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브람스가 왜 포함했는지 물었을 때 그는 "보시다시피, 첫 번째 악장은 너무 단순하거든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피아노 카덴차가 끝난 후, 오케스트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가져와
광범위하고 세심하게 전개합니다.
III. 안단테. 독주 첼로에 맡겨진 평화로운 서주는 두 번째 악장의 활력과 행복한 대조를
이룹니다. 독주 첼로가 연주하는 곡은 먼저 브람스의 멜로디
'Immer leiser wird mein Schlummer'(사실, 협주곡보다 몇 년 후에 쓰여짐)와 비슷하고,
그다음에는 Todessehnen(죽음에 대한 열망)과 비슷합니다. 첼로를 위한 독주 부분이 있는
이 안단테는 전체 레퍼토리의 경이로움 중 하나입니다.
IV. 알레그레토 그라치오소. 브람스의 전기 작가 알프레트 폰 에르만은 이 악장에 대해
"발레만큼 우아하고, 코미디만큼 재치 있고, 목가적처럼 신선하고, 샴페인만큼 취하게 한다"고
썼다. 피터 라담은 "이 음악의 가벼움과 화려함에는 단 하나의 모델이 있다. 모차르트다"라고
덧붙였다.(본문)
빌헬름 박하우스(Wilhelm Backhaus, 1884년 3월 26일 ~ 1969년 7월 5일)는 독일 태생의 피아니스트이다.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20세기 최대의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베토벤·브람스와 같은 음악가의 독일 고전파·낭만파 피아노곡 연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피아니스트이다. 박하우스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8년간은 레켄도르프 교수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았고, 이어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오이겐 달베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0년 16세 때 독주가로서 데뷔하였다. 뛰어난 실력으로 1905년에는 루빈스타인 상을 받았다. 그 후 타계할 때까지 세계의 모든 나라를 독주가로서 연주 여행하였고, 도처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연주는 음이 순수하고 찬연하며, 연주 테크닉이 정연하고 완벽하다는 평을 들었다. 게다가 독일 고전·낭만파 음악을 조금도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명확하고 단정히 치며, 그러면서도 풍성한 음악적 정감을 그 가운데에 실었다는 평도 듣는다. 주로 베토벤과 브람스의 전 피아노 작품을 잘 연주했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부터는 차츰 모차르트의 작품도 연주하였다.
Karl Bohm (칼 뵘:1894.8~1981.8)
독일이 낳은 거장 칼 뵘은 언제나 작품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견지했고 또 그만큼 그가 손을 대면 질적으로도 그 품질을 인정받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때론 논리적이고 또 때론 예리한 감각으로 탄탄한 구축력의 음악을 선사하는 그는 가히 대가적 품격이 느껴지는 큰 스케일과 깊이로 동시대의 지휘자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은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일 시민들로부터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몇 안되는 지휘자 중의 하나이다.
칼 뵘은 1894년 8월 28일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로 그라츠 시립 극장의 법률 고문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매니아라 바리톤 계열의 성악곡을 좋아했다. 그의 집안은 그라츠에서도 가장 알아주는 부유한 명문가로 손꼽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아쉬울 것이 없이 자라났다.
그는 자라면서 법률가가 되기 위해 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어릴때부터 들어온 음악에 대한 욕구를 주체할 수 없어 결국 그라츠로 돌아와 시립극장의 연습 지휘자로 음악계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가 지휘자로서 데뷔한 것은 1917년이다. 당시 그는 네슬러의 오페라 ‘제킹겐의 트럼펫 주자’를 지휘해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으며 순탄한 데뷔를 장식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법률 공부를 계속해 그라츠 대학에서 법률 학위를 받는 부지런함을 보였다.
이후 칼 뵘은 가수 테어 린하르트와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해 화제를 모았고, 1927년에는 다름슈타트의 음악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몇 년후 칼 뵘은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 시절부터 그는 현대음악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이 작품을 무대에 자주 올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것을 안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는 칼 뵘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를 종종 만나 칼 뵘의 음악 전반에 대한 시각을 더욱 넓게 해주기도 했다. 칼 뵘이 모차르트 음악에 깊이 빠지게 된 것도 바로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와 만남을 가지면서부터다.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는 칼 뵘에게 모차르트의 새로운 음악적인 면을 부각시켰고 그 때문에 이후 칼 뵘은 자신의 레파토리에 모차르트를 주요 작품으로 넣게 된 것이다.
1933년 칼 뵘은 저 유명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으로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지휘했던 곡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그간 그는 바그너 작품들을 줄기차게 지휘했으므로 당연히 이 공연은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1년후 그는 프리츠 부쉬의 후임으로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봉을 잡기에 이른다. 그는 이 곳에서 약 9년여 정도 일을 하며 명실공히 독일을 대표하는 젊은 지휘자 중의 하나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후 칼 뵘은 잘츠부르크,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밀라노, 파리 등 여러 도시로 진출해 지휘봉을 휘날렸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곤 1957년에는 드디어 미국으로까지 진출해 저 유명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돈 조반니’를 지휘했다.
이후에도 칼 뵘은 마우리치오 폴리니 등을 비롯한 다수의 젊은 연주자들과의 협연을 통해 많은 명반들을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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