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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hms"-피아노 협주곡 1번(Ashkenazy연주)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7. 3. 3. 19:34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독일)는 19세기 음악의 거목으로 고전주의 음악사상 최후의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음악적 특성은 피아노협주곡 에서도 나타나 피아니스트 에게는 높은 기술적 수준을

필요로 하며, 광대한 스케일과 화려한 패시지가 돋보입니다. 또한 오케스트라의 현악파트나 목관악기 등의 풍부한

활용을 통해 피아노와의 조화를 극대화 시켜 그만의 장대한 음악세계를 펼쳐 나갑니다. 1857년에 작곡하여 수년에

걸쳐 수정과 보완을 거쳐 완성한 '피아노협주곡1번'도 광대한 스케일은 교향곡과 같은 웅장함이 있습니다.

 

"Decca"에서 발매된 이음반은 "아쉬케나지"의 연주와 "베르나르트 하이딩크"가 지휘한 네델란드의 "콘체르트 헤보우"

오케 연주가 어떤 음반 보다도 뛰어나다고 할수있다.감미로운 피아노 선율과 강렬하면서도 도를 넘지않는 오케의 협주는 50여분간의 연주시간 내내 음악에 집중하게 만든다.  1982년도 녹음된 이음반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디지털" 레코딩

이다.

 

-브람스 피아노협주곡1번D단조 1악장 입니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1937년 모스크바 서쪽의 공업도시 고리키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피아니스트였던 아쉬케나지는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여 일곱 살이 되던 이듬해 하이든의 협주곡을 공개적으로 선보임으로써 음악 신동으로 주목을 끌었다. 여덟 살에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한 그는 10년간 충실히 학업을 이어간 끝에 열여덟 살이 되던 1955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그 재능을 활짝 꽃 피우기 시작했다. 이 해에 쇼팽 콩쿠르에 소련 대표로 참가하여 2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거두었으며, 이듬해인 1956년에는 브뤼셀에서 열린 엘리자베스여왕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두 차례의 국제적인 수상을 발판으로 그는 1958년 미국 무대에 데뷔함으로써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었고, 리흐테르(Sviatoslav Richter)와 길렐스(Emil Gilels)의 계보를 잇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로 기대를 모았다.

이처럼 피아니스트로서의 첫 걸음을 화려하게 시작한 그였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2년이 지난 1962년 제2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영국의 존 오그던(John Ogdon)과 공동 우승하면서부터였다. 다시 한 번 미국에서 순회연주를 진행했고 이듬해인 1963년에는 영국 무대에도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이때의 영국 방문은 아쉬케나지의 인생에 또 하나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196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함께 공부한 아이슬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와 결혼한 아쉬케나지는 영국 연주 직후 영주권을 신청했고, 런던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세계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68년에는 부인의 고국인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로 이주하였고, 1969년에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소련의 정치체제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은 1972년 미국의 신문에서 공개적으로 소련을 비판한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결국 그는 1974년 소련 국적을 버리고 아이슬란드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작은 키와 체구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울림과 화려한 색채감을 지닌 아쉬케나지의 연주는 완벽한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 정확한 연주를 통해 깊이 있고 섬세한 낭만적 시정을 표현한다. 작은 체구에서 울려 퍼지는 폭발적인 음량과 완벽한 터치, 극적인 다이내믹의 표현은 정교하면서도 신선한 생명력을 한껏 느끼게 한다. 그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는데, 특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과 게오르크 솔티(Georg Solti)가 이끄는 시카고 교향악단과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 앙드레 프레빈(Andre Previn)이 이끄는 런던 필하모닉과 함께 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Itzhak Perlman)과 함께 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녹음 등 역사적인 음반을 다양하게 제작하였다. 특히 라흐마니노프의 〈24개의 전주곡〉과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3번〉과 〈5번〉, 그리고 쇼팽의 〈장송 행진곡〉 실황음반은 아쉬케나지 특유의 낭만적 시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명연주로 손꼽히고 있다. 1988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한 그는 지휘자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특히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을 피아노 연주와 함께 지휘한 그의 연주는 현재까지도 독보적인 해석으로 손꼽히고 있다.

 

콘세르트헤보 오케스트라는 암스테르담을 본거지로 하는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이다. 원래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Concertgebouworkest Amsterdam)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988년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으로부터 ‘로열’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 오케스트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1888년에 창단되어 11월 3일 첫 연주를 가졌다. 콘세르트헤보는 네덜란드어로 콘서트홀을 의미한다. 1888년 4월 암스테르담에 시민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연주회장인 콘세르트헤보가 설립되었고, 이후 상주 오케스트라로서 만들어진 단체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들은 창단 이래로 네덜란드 정부의 지원을 받아왔다.

 

하이팅크(1929~ )는 네덜란드의 지휘자이다. 암스테르담 콘서바토리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함과 동시에 펠릭스 흐푸카(Felix Hupka)에게 지휘를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후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합류했다. 1954년에서 1955년 사이, 네덜란드 라디오 유니언에서 주관한 연례 지휘자 과정(annual conductors' course)에 두 번 참석하면서 페르디난트 라이트너(Ferdinand Leitner)에게 지휘를 배웠고, 이 기회를 통해 지휘 실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1955년에 그는 라디오 유니언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57년에는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28세였다.

하이팅크가 지휘자로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줄리니(Carlo Maria Giulini)를 대신하여 1956년에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Concertgebouw Orchestra)와 함께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연주한 때이다. 이것은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정기 연주회의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는 것으로 이어졌고, 1961년에는 베테랑 지휘자였던 유진 요쿰(Eugen Jochum)과 함께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임명되었다. 2년 후 요쿰이 이 악단을 떠나면서 하이팅크는 혼자서 수석지휘자로서 활동하다가 1988년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한편, 하이팅크는 1959년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함께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 데뷔를 했다. 이후에 런던 필하모닉과 인연을 이어가며, 1964년에는 객원지휘자가 되었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는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가 되었다.

하이팅크 오페라 분야로도 영역을 넓혀갔다. 그 시작은 1977년에 글라인드본 축제의 음악 감독이 된 것이었고 1988년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지휘했고, 이들 대부분은 녹음이 되었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코지 판 투테〉,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피델리오〉, 슈트라우스의 〈아라벨라〉, 프로코피예프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브리튼의 〈한여름밤의 꿈〉 등이 있다. 1987년부터 2002년까지는 로열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으로도 일했다. 이때 〈돈 카를로스〉, 〈이고르 왕자〉, 〈피터 그라임스〉, 〈팔스타프〉,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스페이드의 여왕〉 등의 연주가 극찬을 받았으며, 특히 〈니벨룽겐의 반지〉 연주는 큰 규모의 무대와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가사가 없는 기악 음악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1994부터 1999년까지는 유러피안 유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일했고 1995년에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2001년 여름에 이들과 함께 유럽 투어를 했다. 그는 1977년 영국 명예 훈장(honorary KBE)을 받고 1991년에는 에라스무스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