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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오페라 "나비부인"중 "어떤 개인날"-"몽쉐라 카바예"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9. 10. 4. 20:46

이태리의 보물 "몽쉐라 카바예"가 부르는 "푸치니" 오페라"Madame Butterfly(나비부인)"中

"어느 개인날". 가라드301에, spu구형 카트리치로 tannoy"Autograph" 의 진한 음색으로

감상 하세요.

 

몽세라 카바예(Monterrat Caballe.이태리.1833.4~2018.10)

몽세라 카바예에 대해서라면 오래된 두 가지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하나는 카바예의 체구에 관한 부정적인 인상이다. 1983년 10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100주년을 기념하는 갈라 공연 실황이 LD로 나왔을 때 나는 그걸 보고 예상을 넘는 카바예의 위용(?)에 크게 놀랐다. 오랜 파트너인 호세 카레라스의 손을 잡고 무대에 등장해 《안드레아 셰니에》의 장대한 피날레 듀엣을 부르는데, 노래 실력은 차치하고 비교적 아담한 키에 마른 편인 카레라스와 비교하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로군. 오페라 가수가 저렇게 뚱뚱해도 되는 거냐?'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더욱 놀랐던 것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비대한 이 여인에게 가장 열광적인 환호가 쏟아졌을 뿐 아니라 그에 화답하는 카바예의 카리스마도 대단하더라는 점이었다. 아무튼 세상에는 제시 노먼을 비롯하여 카바예보다 더 뚱뚱한 가수들도 있겠지만 오랫동안 '테너는 파바로티, 소프라노는 카바예'가 비만형 성악가의 대명사로 통했다. 한 인터뷰에서 카바예는 자신의 몸무게가 103킬로그램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다른 믿을 만한 자료에 "그녀의 체중은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적힌 걸 보면 이보다는 더 나갈 듯하다. 그래도 카바예는 노래하는 데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래가 좋아도 카바예가 연기하는 비올레타, 질다, 데스데모나, 미미를 보면서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연약한 여인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카바예는 《노르마》, 《아이다》, 《토스카》 등 대형 소프라노를 위한 작품에서 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다.

완벽한 기교의 소유자, 피아니시모의 달인

카바예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은 그녀의 놀라운 메차 보체(mezza voce, 음량을 점점 줄여 길게 끄는 창법) 능력이다. 내가 카바예의 노래에 처음 주목한 것은 주빈 메타 지휘의 《투란도트》 음반(데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막에서 류의 아리아 〈왕자여, 들으소서!〉를 듣고 있는데 상승음형으로 끝나는 마지막 악구를 그야말로 절묘한 메차 보체로, 그것도 끊어질듯 말듯 정말 한참 동안 지속하는 것이었다. 미천한 종의 신분으로 칼라프 왕자를 연모하는 류의 심정이 구구절절이 와닿았다. 다른 가수들의 음반을 여럿 구해 들어보았지만 이 노래에 관한 한 카바예의 발끝에도 따라갈 소프라노는 없었다. 메차 보체에 다시 한 번 놀란 건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1941∼) 지휘의 《아이다》 음반(EMI)에서였다. 3막의 아리아 〈오, 나의 조국〉을 통해 거의 똑같은 감동을 다시 받은 것이다. 이 노래가 그토록 감동적인 곡이었는지 그때 처음 실감했을 뿐 아니라 도대체 이런 메차 보체가 다른 가수에게도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까마득한 과거에 경험한 것이지만 아직까지도 카바예에 견줄 메차 보체를 구사하는 가수를 발견하지 못했다. 카바예를 위대한 가수로 치켜세우는 가장 큰 이유 역시 '메차 보체만으로도 오페라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가수'라는 점에 있다.

메차 보체만 너무 강조한 것 같은데 카바예는 성악 테크닉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강점을 지닌 소프라노다. 《리골레토》 중 〈그리운 그대 이름〉을 들어보면 마무리를 쭉 끌지 않고 기막힌 떨림의 미학을 불어넣고 있다. 그 미묘한 떨림은 자연발생적인 비브라토가 아니라 카바예가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경이로운 테크닉이다. 또 《노르마》의 〈정결한 여신〉 중반부에는 고요하고 느릿한 합창을 배경으로 노르마의 멜리스마가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카바예처럼 미끄러지듯 절묘하게 그 대목을 처리하는 가수는 없다. 카바예가 '칼라스 이래 최고의 카리스마' 덕분에 디바의 권위를 누리는 것처럼 평가받았지만 그 초절기교 역시 모든 소프라노에게 경이의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다른 테크니션처럼 외면적으로만 화려한 기교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되고 성숙한 기교이기에 한층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의 모든 레퍼토리를 계승한 대가수

카바예는 1933년 4월 12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집안은 부유하지 않았다. 14세가 되었을 때 모친은 그녀를 15세라고 속여 바르셀로나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너무 어린 나이의 성악 지망생은 받지 않는 학칙 때문이었다. 스승인 에우게니아 케메니(Eugenia Kemmeny)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눈감아주었다. 이 케메니라는 선생은 아주 특이했다. 헝가리에서 알아주는 육상선수 출신이기도 했던 스승은 호흡에 모든 것을 투자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첫 1년 동안은 노래를 전혀 부르지 않고 호흡법만 가르쳤을 정도였으며 그 다음해에도 호흡법이 모든 가르침의 중심이었다. "달리기에서는 최후의 150미터가 중요하다. 너희들도 노래할 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케메니의 지론이었다. 흡입한 공기를 서서히 내뱉으면서 숨을 최대한 길게 끌 것을 요구했고 육상선수 출신답게 스톱워치를 들고 제자들이 한숨에 부를 수 있는 시간을 측정하면서 끊임없이 독려했다. 동료들은 케메니가 성악교수가 아니라 정신 나간 체육선생이라며 반발하기도 했지만 카바예에게는 이상적인 스승이었음이 분명하다. 카바예의 경이적인 메차 보체 테크닉과 긴 호흡이 이때 훈련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역시 그 보람이 있었는지 카바예는 1954년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졸업했다.

비록 카바예에게는 암담한 시기였지만 좋은 보약이 된 것은 1956년부터 스위스 바젤 오페라에서 활동한 경력이다. 단역부터 시작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어떤 때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나 카바예는 꾹 참고 견디며 1∼2년 만에 주역 가수로 성장했고 토스카, 아이다, 아라벨라, 살로메 같은 역을 부를 수 있었다. 국제적 도시인 바젤에서의 활동은 슈베르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리트에 관심을 갖는 계기도 마련해주었다. 1960년부터는 브레멘 가극장을 중심으로 벨칸토 오페라의 영역에 도전했고, 1962년에는 고향인 바르셀로나의 리세우 극장에 데뷔했다.

테너 베르나베 마르티(Bernabe Marti, 1928~)와 결혼한 1964년에는 멕시코시티에서 《마농》을 노래함으로써 미국에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65년 카네기 홀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마련된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공연을 앞두고 타이틀 롤인 마릴린 혼이 갑작스런 이상으로 출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긴급 대타로 거의 연습 없이 무대에 오른 카바예는 기적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카바예야말로 칼라스와 테발디를 합쳐놓은 소프라노'라고 격찬했고, 이 우연한 사건은 카바예뿐 아니라 미국 오페라 공연사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를 위시한 도니체티의 대작 오페라는 마리아 칼라스 혹은 '벨칸토의 여왕'으로 불린 터키 출신의 레일라 젠체르 정도나 소화할 수 있다고 알려졌던 터에 무명의 카바예가 완벽하게 이를 소화한 것이고, 이때부터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이 다시금 벨칸토 오페라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메트 무대가 카바예를 위해 올린 도니체티의 잊혀진 걸작으로는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데브뢰》 《베르지의 젬마》 등을 꼽을 수 있다. 나중에는 미국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비벌리 실즈까지 이 대열에 가세함으로써 칼라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미국에서 벨칸토 오페라의 황금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카바예의 최고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벨칸토 오페라를 중심으로 레퍼토리가 무한대로 늘어 무려 140여 곡의 오페라를 노래할 수 있었다. 특히 칼라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거의 빠짐없이 자신의 주특기로 편입시켰다. 게다가 언제라도 무대에 설 수 있는 준비된 가수란 것이 카바예의 장점이었다. 세계 유수의 극장에서 활약한 이탈리아의 유명한 성악코치 우발도 가르디니(Ubaldo Gardini)의 회고에 따르면 카바예의 음악성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한다. 너무나 많은 공연과 새 레퍼토리를 계속 소화해야 했으므로 카바예는 미리 악보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백지 상태로 연습을 시작하는데 너무나 빨리, 그것도 완벽하게 작품을 소화해서 지휘자가 놀랄 정도였다는 것이다. 황혼기에 접어든 1989년(56세) 리세우 극장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참여한 한 독일인 동료도 처음에는 이졸데의 주요 선율조차 잘 모르던 카바예가 그 어려운 노래를 순식간에 마스터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호세 카레라스와의 황금의 파트너십

카바예는 무대 위의 카리스마에서도 마리아 칼라스에 비견된다. 청중들은 그녀의 거대한 체구에 일단 압도되고, 거기서 나오는 소리가 그저 크고 우렁찬 것이 아니라 너무나 아름다운 것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게다가 강렬한 눈빛과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움직임은 과연 디바의 풍모다웠다. 사실 카바예는 절대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이라 할 만하다. 1991년의 인터뷰에서 이미 일곱 번의 대수술을 겪었다고 밝혔으니 지금쯤 그 횟수가 더 늘었을 것이다. 1969년의 무릎 수술을 시작으로 1974년에는 암종양 제거 수술, 1976년과 1982년에는 신장과 관련된 수술을 받았다. 심장에도 여러 차례 이상이 있었는데 1983년 빈 공연에서는 무대 뒤에서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긴급소생술로 회생하기도 했다. 급기야 1985년에는 뇌종양이 발견되어 장기간의 강도 높은 레이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정도라면 그냥 은퇴하고 휴식에 들어갈 법도 하다. 그러나 카바예는 비록 공연 횟수는 줄였을지언정 목숨을 걸고 무대에 도전하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누구나 카바예의 경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호세 카레라스를 꼽는다. 같은 스페인의 카탈루냐 출신인 카레라스는 카바예보다 13년이나 연하다. 벨칸토 오페라의 명콤비로 불리는 서덜랜드-파바로티도 서덜랜드가 9년 연상이지만 카바예-카레라스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함께 무대에 서면 연인보다는 뚱뚱한 엄마와 가녀린 아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핸디캡을 극복했다. 카레라스는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로 카바예에게 발탁된 바에 힘입어 파바로티, 도밍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정상급 테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며, 카바예 역시 누구보다도 격정적인 노래를 부르는 카레라스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벨칸토 오페라는 물론 베르디와 푸치니의 오페라에서도 최정상의 소프라노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한때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났을 정도로 찰떡궁합을 자랑했던 두 사람의 공생은 카레라스의 전성기에 카바예의 건강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짐으로써 끝을 맺는다. 1986년이었다. 그러나 1년 후 먼저 쓰러진 쪽은 예상 외로 카레라스였다. 그 후 백혈병을 극복한 카레라스가 재기 콘서트를 열었을 때 카바예도 베로나 원형극장에 마련된 무대에 오르는 등 두 사람의 예술적인 우정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카레라스를 떠나보낸 후 카바예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새로운 파트너는 뜻밖에도 록그룹 퀸(Queen)의 리드 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1991)였다. 프레디는 카바예의 팬이었고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코드가 맞아 밤새 피아노를 치며 함께 노래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열린 카바예의 리사이틀에서 앙코르 곡으로 프레디가 헌정한 곡을 부른 적도 있었고, 둘이 함께 《바르셀로나》라는 앨범을 녹음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 노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통해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로 일치감치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의기소침할 카바예가 아니다. 딸인 몽세라 마르티(Montserrat Marti)를 소프라노 가수로 키웠다는 얘기가 들리더니 모녀가 함께 부른 1999년 부활절 축하 콘서트 DVD를 내놓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80세를 넘긴 최근의 카바예는 유네스코 친선대사로서, 또 바르셀로나의 빈민층 청소년들을 구제하는 재단을 운영하는 사회사업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아마도 카바예는 자신의 운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열정과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길고 아름다운 메차 보체처럼 말이다.

몇 해 전에는 남성들만 가입이 허용된 사회 저명 인사 클럽에 자신 정도의 경력이라면 여성도 가입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해 결국 승인을 얻어냈다는 소식이 외신을 타고 전해졌다. 역시 여장부에게 어울리는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daum백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