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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noy"오토그라프"사운드.

아날로그로 듣는"비탈리"의 "샤콘느"- "나탄 밀스타인"연주-탄노이사운드.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8. 11. 30. 20:30

세상에서 가장 슬픈곡 이라는,"비탈리(이태리.1663~1745)"의 "샤콘느"를 "나탄 밀스타인"의 연주로 감상 하세요!!!

 

 

-"비탈리"의 '샤콘느'를 '나탄 밀스타운'의 연주(연주시간,10분14초)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 -

비장한 듯하면서 흐느끼는 듯한 바이올린 선율은 이 작품을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하였다. 사실 이 말은 어느 음반 광고의 문구였지만 어느새 비탈리 〈샤콘느〉를 떠올리면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과 연관된다. 비장한 듯하면서 무거운 반주와 한 번에 여러 현을 긁어내리는 시작은 울분을 토해내는 듯하다. 사실 반주에서 사용되는 순차로 하행하는 4도는 음악사에서 오랜 시간 슬픔과 연관 지으며 사용된 음악 관습 중 하나이다. 이 곡이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인지는 감상자가 선택할 몫이지만 처음부터 쏟아져 나오는 4도 하행 반주는 이미 곡의 시작부터 이 곡이 슬픈 곡임을 소개하고 있음은 맞다.

비탈리의 〈샤콘느〉가 한 음반 광고 덕분에 회자 되었다면 사실 음악학자들에게는 과연 〈샤콘느〉가 비탈리의 작품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누가 듣더라도 〈샤콘느〉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비발디, 바흐, 헨델의 작품을 떠올린다면 〈샤콘느〉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비탈리를 모르는 이가 〈샤콘느〉를 접한 이후에 비탈리가 바로크 시대 작곡가라고 한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오히려 비탈리에 대한 문헌이 틀렸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탈리가 바로크 시대 작곡가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의심되는 것은 〈샤콘느〉가 비탈리의 작품인지의 여부일 것이다.

어떤 문헌에도 비탈리가 〈샤콘느〉를 작곡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비탈리라는 작곡가가 남긴 작품 자체도 많지 않다. 그래서 음악학자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누가 이 작품을 세상에 알렸는지였다. 그리고 19세기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드(Ferdinand David, 1810~1873)가 1867년에 출판한 〈바이올린 곡집〉에서 이 작품을 비탈리의 작품으로 소개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문제는 이 곡집의 〈샤콘느〉가 비탈리의 작품을 수정한 것인지 아니면 다비드가 자신의 작품에 비탈리의 이름을 붙였는지는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샤를리에가 1911년 바이올린에 좀 더 기교를 넣으면서 더 화려하고 풍부한 〈샤콘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결국 〈샤콘느〉의 작곡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탄생된 것임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작곡가가 누구이든지 간에, 이미 우리는 이 〈샤콘느〉가 비탈리의 작품이라는 것에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결국 〈샤콘느〉는 우리들의 손으로 작곡가를 만들어 버린 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탄 밀스타인(러시아.1904~1992)-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확고한 주관을 지닌 연주자로 불리는 나탄 밀스타인은 1904년 1월 13일(혹은 1903년 12월 31일) 구소련의 오데사(현재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산만하고 장난기가 심했던 그는 차분한 정서를 심어주기 위해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914년 11세의 나이로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데뷔했다. 글라주노프가 직접 지휘봉을 잡은 이 무대에서 밀스타인은 새로운 신동의 탄생을 예고했다.

이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가 바이올린의 거장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를 사사했다. 키예프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던 1921년 밀스타인은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우정을 쌓아갔다. 1925년부터 두 사람은 문화 사절이라는 이름하에 구소련 정부의 승인을 얻어 서유럽 순회공연을 다녔다.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가 가세하면서 최고의 황금 트리오가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이들을 ‘세 사람의 척탄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독재가 점차 강해지고 예술가에 대한 제제가 심해지면서 세 사람은 외국으로 망명을 선택했다. 호로비츠는 베를린으로, 밀스타인은 미국으로 떠났다. 1929년 미국에 진출한 밀스타인은 그해 10월 17일 열린 데뷔 무대에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글라주노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듬해 미국 시민권을 얻으며 완전한 자유인의 신분이 된 후 연주와 레코딩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1948년 6월, 미국 콜롬비아에서 처음 선보인 33.3회전 LP 음반을 세계 최초로 녹음하며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가 연주한 곡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이끄는 뉴욕 필과 함께였다.

이후 78회전 SP시대를 마무리하고 LP 시대를 알린 밀스타인은 음반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프로코피예프와 생상스, 차이코프스키 등의 음반을 녹음했다. 녹음할 때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그는 몇 번이나 공들여 녹음하며 작업에 공을 들였다. 그러던 1960년대 후반 그는 갑자기 레코딩 활동을 중단하고 무대에서의 연주와 교육에만 집중하기도 했는데, 1972년에는 오랜 공백을 깨고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와 호흡을 맞춘 이 음반에서 그는 일흔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고, 이듬해에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녹음했다. 이후 브람스 협주곡과 직접 쓴 〈파가니니아나〉(Paganiniana)와 같은 작품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선보였다.

83세의 나이에 왼손 부상으로 무대를 은퇴한 밀스타인은 은퇴 후에도 편곡과 마스터클래스 등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다 1992년 12월 21일 여든 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