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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gar & Delius 첼로 협주곡 - "쟈크린 뒤 프레" 연주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3. 1. 3. 21:27

"엘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연주한다는 "쟈크린 뒤 프레" 가 연주하는 첼로 협주곡입니다.

뒷면의 "딜리어스" 첼로 협주곡도 "자크린 뒤 프레"의 연주가 돋보이는 음반입니다.

특히"죤 바비롤리"경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의 "엘가"는 너무 너무슬픈 첼로연주에

눈물이 글썽일 정도의 명반입니다.

흡사 내 자신이 첼로를 연주하는듯한 착각에 빠지게하는 명 연주입니다.

이음반은 1965년 EMI 레코딩입니다.

 

 

-"자클린 뒤프레"가 연주하는 "엘가"첼로협주곡1악장 일부입니다.-

 

 


<Jacqueline Du Pre and Daniel Barenboim>

 영국의 첼로 연주가.재클린 뒤 프레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여류 첼리스트였다. 뒤 프레 이전과 이후를 살펴봤을 때 그 누구도 그녀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펼친 여류 첼리스트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여느 예술가들처럼 자신의 훌륭한 재능을 맘껏 뽐내며 영광의 세월만을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과 환호를 받았던 영광의 시간만큼 불치병에 걸려 외로움과 고통 속에 신음했던 세월도 길었다. 영광과 좌절,사랑과 배신이 교차하는 눈물겨운 삶을 살았던 그녀,재클린 뒤 프레. 언제 들어도 가슴 찡한 그녀는 짧았던 환희와 긴 세월의 고통스런 외로움을 홀로 견디며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 사라져 간 한 떨기 아름다운 영국의 장미였다.

 

...연분홍색 꽃잎은 금방이라도 이슬 한 방울 뚝 떨어뜨릴 것처럼 처연하다.42세에 요절한 영국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1945~1987)의 이름을 붙인 장미꽃 품종은 주인공처럼 연약하고 아름답다.천재 연주자였던 뒤 프레는 28세에 희귀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제대로 음악 인생을 꽃피우지 못했다. 손가락이 굳어버리고 눈이 침침해지며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병이었다. 그는 활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자주해 얼마 후 연주를 중단했다.

​  <Jacqueline du Pre,Rose>

병마에 찌들기 전 그는 천진하고 밝은 첼리스트였다.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명문가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했다. 4세에 첼로를 시작해 거장 파블로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배우며 세계 무대를 휘어잡았다.그는 한창 눈부신 나이인 23세 때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대니얼 바렌보임을 만났다. 지나치게 야심이 넘치는 바렌보임을 못마땅하게 여긴 뒤 프레 부모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바렌보임은 아내의 명성을 이용해 출세 가도를 달렸다. 자신의 음악회에 뒤 프레를 협연자로 등장시켜 청중을 열광시켰다. 아내가 병에 걸린 줄 몰랐던 그는 음 하나만 놓쳐도 몹시 화를 냈다. 뒤 프레가 고통을 호소하면 정신력이 해이해진 것이라고 다그쳤다.


나중에 희귀병임이 판명나자 뒤 프레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자신의 연주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육체적 문제였음이 드러나자 죄책감에서 벗어난 것.하지만 연주를 그만둔 후 삶은 더 비참했다. 해외 순회 공연으로 바쁜 바렌보임은 그를 챙기지 않았다. 뒤 프레는 몸의 고통보다 외로움과 싸우는 게 더 힘들었다.병상을 쓸쓸하게 지키다 간 비운의 첼리스트를 기리는 클래식 곡이 있다.


바로 '재클린의 눈물'. 독일에서 태어난 프랑스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오펜바흐(1819~1880)의 작품이다. 뒤 프레의 불행한 일생을 닮은 이 곡은 선율이 끊어질 것처럼 슬프다. 묵직한 저음 위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애잔한 선율이 여리고 세차게 흐른다. 국내 드라마에도 삽입된 이 선율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소품으로 꼽힌다....... 전지현 기자의 글 중에서....

 

재클린 뒤 프레는 1945년 영국 옥스퍼드의 음악을 사랑하는 중산층 가정,옥스퍼드 대학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3살 때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소리 가운데,특히 첼로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4살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받고 5살때 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런던의 첼로스쿨에서 W.프리스에게 사사했고,뒤에 스위스의 체르마트에서 해마다 개강되고 있던 파블로 카잘스의 마스터 클라스에서 기초를 다졌다.


 1962년 런던에서 데뷔,1965년 BBC 교향악단의 미국 연주여행에 독주자로 동행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이름을 떨쳤다. 1966년에는 소련의 명 첼리스트 M.로스트로포비치의 가르침을 받고,영국을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완벽할 정도의 기교와 풍부한 음악성을 지닌 그녀의 연주는 매우 스케일이 크고 당당했다.

 

재클린이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한 때는 1965년,그녀의 나이 20세때 부터였다. 고국인 영국을 넘어 세계적인 첼로의 스타가 되어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23세에 또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이었다. 음악적 재능이 무척 뛰어난 장래가 촉망되는 유태계 피아니스트였던 바렌보임은 성공을 위한 불 같은 열정,그리고 야심만만한 젊은이였다. 


바렌보임과 사랑에 빠지게 된 재클린은 유태교로 개종하였고 전쟁 중인 이스라엘에서 결혼식까지 서둘러 해치웠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다.재능은 뛰어나지만 배경도 별 볼 일 없었고 유태인 출신인 바렌보임과의 결혼은 재클린의 집안에서는 물론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나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연주여행을 다녔고,이들의 공연은 성공을  거듭하였다.


재클린은 그녀 자신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 더해 바렌보임에게도 많은 영감을 얻으며 음악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었고,바렌보임은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된 재클린과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거침없이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바렌보임의 성공을 향한 끝없는 야망과 음악적 열정은 재클린을 무척 힘들게 하였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뒤 프레는 우울증까지 걸려 상습적으로 약을 복용하기도 했고,그런 그녀를 바렌보임은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해서 재클린은 언니인 힐러리에게 울며 살려달라고 전화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 순간,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시련과 불행이 재클린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중경화증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병마가 그녀를 엄습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재클린은 1971년부터 다중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려 신음하기 시작하였고,1972년가을부터 병상에 누워지내야 했다. 다중경화증,온 몸이 천천히 마비되어 제대로 걸을 수도 없고 팔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이 무서운 병은 섬세함을 생명으로 하는 연주가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금새 회복될 것이라 믿었던  이 무서운 병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27세 였으며,성공을 향해 한창 앞을 달려야만 하는 아까운 나이였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고통속에서 신음했던 그녀를 더욱 처절하게 만든 것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좌절과 절망뿐이 아니었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그녀 곁을 떠난 처절한 외로움과의 싸움,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잊혀져 간다는 두려움이었다.


이제 그녀를 간호하며 옆에서 지키는 사람은 오로지 그녀의 가족뿐이었고,그토록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남편 바렌보임은 열심히 출세가도를 달리며 전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딴 살림까지 차리고 있었다. 재클린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항상 병상에 누워서 지내야 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 모두를 잃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은 연주를 할 수 없었지만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78년 솔포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전신마비의 증상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기구를 이용하여 눈꺼풀을 억지로 벌려야 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침대 위에서 숨만 쉬는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1987년 가을. 그녀가 병마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산지 어언 15년이 지난 해였다. 가을의 찬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재클린은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10월 19일에 재클린은 의식을 잃었고 더 이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녀가 의식을 잃게 되자 언니 힐러리는 바렌보임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파리에서 피아니스트와 딴 살림을 차리고 있던 바렌보임은 황급히 달려왔고 재클린은 바렌보임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42세. 영국을 넘어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여류 첼리스트의 삶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재클린 뒤 프레는 42년을 살았다. 짧다면 짧은 42년의 시간을 약 14년씩 3등분 할 수 있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시간이 3분의 1,그리고 어린 시절에 데뷔하여 사랑과 성공을 모두 누릴 수 있었던 영광의 시간이 또 3분의 1이라면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희귀한 병에 걸려 죽음을 향해 달려간 불행한 시간이 또 3분의 1이다.

바렌보임은 뒤 프레 사후에 그녀의 무덤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언니 힐러리는 회고록에서 자신도 다니엘을 무척 증오했지만 재클린이 사망한 후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에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고 했다. 결국 다니엘과 재클린은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고 각자 너무 다른 성격을 갖고 있어서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재클린은 어린 시절에 이미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예로 언니 힐러리는 어린 시절 재클린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언니. 비밀 하나 말해줄까?]...
...[비밀? 뭔데?]...
...[난…어른이 되면 전신마비에 걸릴 것 같아. 그럴 것 같아. 이거 엄마한테는 말하지마]...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천재적 재능과 그 재능으로 인한 성공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것이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찌보면 참 오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재클린 뒤 프레의 연주활동은 약 6년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다양한 곡을 연주하며 많은 음반을 남겼다. 우선 하이든,보케리니,슈만,생상스,드보르작,엘가 등의 굵직한 첼로 협주곡은 모두 녹음하였다.
특히 첼로 협주곡의 왕이라 불리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바렌보임과 함께 녹음한 것과 첼리비다케와 함께 한 것도 있는데,둘 다 명연 중의 명연으로 꼽힌다.

음악사적으로 그녀가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발굴,연주한 것이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과 함께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이 곡은 뒤 프레가 등장하기 전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곡이었으나 같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인 엘가의 곡을 무척 사랑한 뒤 프레 덕분에 세상에 알려져 명실공히 최고의 첼로 협주곡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좋아하는 이들은 뒤 프레의 음반을 0순위로 선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뒤 프레가 남긴 음반은 협주곡만이 아니다. 실내악,독주곡 쪽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다니엘 바렌보임이 피아노 반주를 맡은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좋은 평가를 받는 명반들이다. 뒤 프레의 연주는 항상 힘이 넘치고 강렬했다. 언제나 현이 끊어질 듯한 강렬한 연주를 선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공연무대는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감과 정열이 넘쳤다고 한다.


그녀가 연주하는 모습을 영상자료로 보고 있으면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힘차게 활을 긋는 신들린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머리를 단정하게 묶지 않고 생머리를 휘날리는 야성적인 모습이 때론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배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음악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여자.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했고,그 남자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아야 했던 비운의 첼리스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희귀병에 걸려 인생의 3분의 1을 병상에 누워 신음하며 처절한 고독과 싸워야 했던 그녀 재클린 뒤 프레. 그녀가 떠난지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녀를 기억한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처절한 심정으로 작곡했다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의 그 슬픈 선율이 흐를 때마다,또한 그녀를 우리는 기억한다.

 
비록 그녀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떠났지만 그녀는 20세기의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운명을 간직한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영국의 장미였음을 우리들은 기억한다.

                       

존 바비롤리 경(Sir John Giovanni Battista Barbirolli, CH, 1899년 12월 2일~1970년 7월 29일)은 영국지휘자이자 첼리스트이다. 영국과 북유럽의 관현악 작품과 말러의 교향곡 해석으로 유명하다.존 바리롤리는 1889년에 런던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으며, 아버지와 삼촌이 바이올리니스트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첼로 연주를 비롯한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바비롤리의 첫 녹음은 12세 때인 1911년에 에디슨 벨 레코드에 누나인 로자 바비롤리의 반주로 녹음한 반 비네(Van Biene)의 〈The Broken Melody〉라는 첼로 소품이었고, 지금도 CD 복각판으로 들을 수 있다. 이후 런던의 왕립음악원(RAM)에 첼로 전공으로 입학했고, 1917년에는 최초로 첼로 독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런던 교향악단과 쿠처 4중주단, 디아길레프 러시아 발레단 등에 소속되어 연주 활동을 했고,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 연주에서 독주를 맡기도 했다.

1924년부터 지휘에 뜻을 두고 사비를 털어 자신의 이름을 딴 '존 바비롤리 실내 관현악단' 을 창단했다. 1926년에는 영국 국립 오페라단을 지휘해 오페라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27년 12월 12일에는 토머스 비첨의 대역으로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에 HMV(현 EMI)와 전속 계약을 맺고 오페라 아리아나 협주곡 등의 반주 녹음을 시작했다.

이어 코번트 가든 왕립 오페라단(1929~1933)과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1933~1936)의 지휘자를 역임했으며, 1936년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에 취임해 화제가 되었다. 이 직책은 원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푸르트벵글러가 나치스 치하의 독일에 남겠다는 결정을 하는 바람에 급히 대역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뉴욕 필 시대에는 컬럼비아 전속으로 여러 협주곡과 관현악 작품들을 녹음하고 영국 작곡가들의 작품이나 브루크너의 교향곡 등 미국에서 듣기 힘든 레퍼토리들을 공연하는 등의 대담한 기획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언론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고 때로는 공격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뉴욕 필과의 계약은 1941년에 만료되었고, 고국에서 맨체스터 소재 오케스트라인 할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직을 제안받고 1942년에 귀국했다.

할레 관현악단 지휘자 취임 후 악단의 체질 개선과 적극적인 녹음 등으로 지방 악단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본거지인 맨체스터 뿐 아니라 런던에서도 정기적으로 연주회와 녹음 세션을 가질 정도로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악단으로 육성했다. 1954년부터는 말러의 교향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이후 영국에서 말러 교향곡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중반에 전속 음반사였던 HMV가 관현악 녹음을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연주 위주로 하기로 방침을 정하자 1956년부터 1959년까지는 신생 음반사인 파이(Pye) 전속으로 옮겨 상당량의 녹음을 했고, 이 녹음들은 이후 EMI와 듀턴 등에서 CD로 재발매되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67년까지는 미국의 휴스턴 교향악단 음악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관현악단 등을 객원 지휘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EMI와 재계약하여 할레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런던 교향악단 등과의 녹음이 다시 진행되었고, 1960년대 중반부터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전곡 녹음도 시작했다.

60대 후반이었던 1960년대 말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심장 발작 등으로 인해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몇 차례의 취소를 제외한 빡빡한 일정을 계속 소화해냈고, 1970년 7월 25일에는 런던 근교의 킹스 린에서 열린 음악제에서 자신의 마지막 공연이 된 연주회를 지휘했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은 베토벤교향곡 제 7번이었다.

연주회 직후에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오사카 엑스포 기념 일본 공연을 위한 리허설에 열중했으나, 7월 29일 밤에 심장 발작이 재발해 런던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런던의 세인트 메리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