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noy","아날로그",그리고 LP!

"Tannoy로 듣는 세상의 좋은 音樂들"

"Autograph" 에서 듣는 세상의 좋은 音樂들" 자세히보기

음악(음반)이야기

"첼로의 거장들"- 카잘스,로스트로포비치,야노스슈타커,프르니에,피아티고르스키,장드롱,토틀리에,요요마,뒤프레,안너빌스마,루드비히휠셔.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07. 5. 15. 10:41

첼로의 거장들

 

카잘스 ( 1876 - 1973 )  
 카잘스. 살아생전에 그만큼 존경받은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인성과 음악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던 모범적인 예술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척 고독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생김새도 그렇고,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자욱한 연기를 뒤덮은 채 찍은 사진하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이미지. 이런 것들이 그에게서 받는 고독한 인상을 더욱 부추긴다. 생김새로 치자면, 그는 이미 20대에 머리카락이 ‘수치미달’이었다. 당시 미국의 한 공연 매니저는 그가 가발을 쓰고 연주하면 개런티를 훨씬 올려주겠다고까지 제안했다고 한다.

어쨌든 파이프를 물고 연주하던 습관이 있었던 카잘스는 고학시절,파리의 한 헌책방에서 발견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10년넘게 독학으로 연주했다. 그는 그곡을 자신의 해석대로 연주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혼자 터득했다. 그가 그렇게 일찍 ‘늙어 보인’것은 가장 고독한 곡을 스승삼아 고독하게 연습하며 음악과 예술과 인생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카잘스는 혼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끌어안고 다듬어내며 테크닉 뿐만 아니라 19세기까지 첼로 연주가 극복하지 못했던 난제들을 극복해냈다.

첼로 연주 자세는 어찌보면 바이올린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자세다. 각 현의 고음을 낼 때 지판을 볼 수도 없다. 엔드 핀이 생겨 부담이 덜해졌지만 여전히 다리 사이에 악기를 끼우고 끌어안은 자세에서 연주해야 한다. 활의 압력도 바이올린보다 더욱 커야 한다. 그리고소리를 내기도 힘들어 웬만큼 힘을 들이지 않으면 바이올린보다 음량이떨어진다. 현과 활의 마찰시 잡음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하지만 카잘스의 존재로, 아니 어떻게 보면 그와 바흐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첼로는 지금같이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내며 유연하고 유려하게 노래할수 있는 것이다. 카잘스가 첼로 연주에서 가장 중요시 한 것도 유연함과 인토네이션이었다.

그리고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을 20세기 이후 다시 영생토록 부활시킨 공적도 간과할 수 없다. 오늘날의 많은 첼리스트는 오전 연습을 바흐의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카잘스의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녹음(EMI)은 현대 레코딩업계에선아직까지 성서로 통한다.

스페인의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했다. 11세에 바르셀로나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호세 가르시아에게 첼로를 배웠다. 후에 마드리드·파리 등지로 옮겨가며 어렵게 공부했다.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첼로 주자로 자리를 잡은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1899년 파리에서 라무뢰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인 명성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약 15년간그는 파리에 살면서 바이올린의 자크 티보, 피아노의 코르토와 트리오 활동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1920년부터는 바르셀로나에 사재를 털어 오케스트라를 창립해 지휘하며 노동자들을 위해 연주하기도 했다.

조국 스페인이 내란(1937)에 이어 프랑코 독재정권에 들어가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피레네 산맥의 작은 마을 프라도에 은거하며 공식적인 연주활동을 중지했다. 1950년, 프라도에서 바흐 탄생 200주기를 맞이해 음악제를 개최하면서 다시 연주를 시작한 그는1957년 푸에르토리코로 옮겼고, 60년부터는 말보로 음악제에서 지휘에 힘을 쏟았다. 당시의 실황 음반(소니)들은 지금은 상당히 귀중한 것들이다.

카잘스는 죽기 직전까지 페스티벌을 쫓아다니며 연주하고, 가르치고,인류애를 설파했다. 그리고 세상에 머문 지 100년을 못 채우고 97년만에 홀연 떠나갔다. 지금도 그가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산 살바도르의 바닷가에는 ‘바흐의 정원’이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추억이 없는 곳’처럼, 그곳에도 추억보다는 고독이 남아 있을법하다.


로스트로포비치 ( 1927 ~ 2007 )  
로스트로포비치라는 이름은 첼리스트의 이름을 뒤지다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한다. 므스티슬라브와 레오폴드(1892∼1942) 부자가 그들이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카잘스의 제자였다. 그리고 므스티슬라브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핏줄 탓인지 환경 탓인지 므스티슬라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4세때 폴카를 작곡해 스스로 연주했다. 5세 때는 집안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레오폴드는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에서 연주하며 그네신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므스티슬라브도 그곳에서 코졸루포프에게 배우기시작했다. 10세 때인 37년, 레오폴드와 오케스트라 연주여행에 동행했던 그는 최초로 협연의 기회를 잡았다.

1941년, 14세의 나이로 첼로와 피아노과를 동시에 졸업한 그는 이듬해 아버지 레오폴드를 잃었다. 당시 레오폴드의 나이 50세에 불과했다. 므스티슬라브는 15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첼로 클래스를 물려받았다. 그는 10대 후반에 이미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 등을 스승이자 동료로 두었다. 모스크바 필과 연주 여행을 다녔고, 10년 이상위인 리히테르를 독주회 반주자로 두었으며, 길렐스·코간과 피아노 트리오 활동도 했다. 1945년 모스크바 콩쿠르를 시작으로 프라하,바르샤바, 부다페스트에서 콩쿠르를 석권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로스트로포비치라 하면 사람들은 모두 레오폴드를 떠올리기보다 므스티슬라브를 떠올렸다. 카잘스에 비한다면 로스트로포비치의 젊은,아니 어린 시절은 ‘화려한 인생’ 그 자체였다.

그가 어린 시절 피아노를 병행해 공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그는 훗날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의 독창회반주를 암보로 연주할 정도로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는 지휘자로서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처음 첼로의 길을 걸을 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협주곡에서 독주악기로 오케스트라와대적할 때, 그의 연주는 특히 빛을 발한다. 이는 첼로로써 피아노가내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딱딱하고 금속적인 소리에서 돌변해 꿈꾸듯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어떠한 어려운 기교도 악상에 맞게 소화해 내는 연주.아버지 레오폴드를 통해 내려온 카잘스의 주법이 므스티슬라브에 이르러, 약 50년 만에 다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연주는 초인적이다’ ‘그는 첼리스트가 아니다. 자연현상이다’ 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작곡가는 그에게 앞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그의 레퍼토리가 현대곡에 폭넓게 포진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거꾸로 그의 폭넓은 표현력과 강렬한 연주 효과는 작곡가들에게 첼로 협주곡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현대곡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인적인 연주만큼 그의레퍼토리도 초인적으로 넓다.

1956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된 그는 구소련에서 인권운동을 펼치던 노벨상 수상작가 솔제니친을 옹호한 죄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다. 이 또한 정치와는 무관한 인류애의 발로였다. 따라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 앞에서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전혀 쇼나 이벤트로 비치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이전에도 그의 연주 모습을 보면 협연석에 앉아 오케스트라를 향해 몸으로 얘기하는 듯한 동작을 자주 취하곤 했다. 몸속에 정열이 끓어오르던 그는 지휘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탈 도라티의 후임으로 1977년부터 워싱턴 내셔널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그는 이후로도 첼로와 지휘를 병행하며 양쪽 어느 하나 허술함이 없었다. 그가 지휘한 텔덱 레이블의 음반중에는 이미 수작으로 거론되는 음반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나 바이올리니스트들과의 협연 음반들이 좋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아끼고 아낀 끝에 92년에 녹음(EMI)했다. 새로운 해석을 많이 시도해 ‘장고 끝에 악수’라는 평을 듣기도했지만 아직 평가를 내리기는 성급하지 않나 싶다.

야노스 슈타커 ( 1924 ~   )  
슈타커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와 친근하다. 지난해 내한했을 때도‘한국은 참 많이 발전했다’ 고 되레 말해줄 정도로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풍겼었다. 1924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그는 7세의 나이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 아돌프 시퍼와 레오 바이너를 사사했다. 12세 때 최초의 리사이틀을 열었다. 당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유학했던 안익태와 같은 스승의 문하였다. 안익태가 그에게 ‘ 한국 여자랑 결혼해 한국에서 살면 어떻겠냐 ’ 고 제의했다고도 전한다. 지휘자 임원식과의 친분으로 우리나라에는 일곱 차례나 들렀다.

    졸업 후 45년과 46년에는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주자를 역임했다. 동시에 바이올린의 죄르지 세복 등과 3중주단을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후 헝가리를 떠나 서방으로 이주했다.

    1948년, 파리에서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음반으로 발표해 전세계를 경악케 했다. 이 곡은 이후로 그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그해 10월에 미국으로 이주해 48년에서 49년까지 댈러스 심포니의 수석주자로 일했다. 이후 49년에는 프리츠 라이너의 권유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이 되었다. 53년에서 58년까지는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으로 일했고, 58년 이후솔리스트로 자립했다. 그만큼 솔리스트 이전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이는 드물 것이다.

    그는 인디애나 음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현재 그의 제자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또한 그는 첼로의 연주 교본, 악보의 교정과 편찬에도 큰 공을 세웠다. 현재 슈타커판의 첼로 악보는 상당히 널리 통용된다. 이러한 점도 그를 금세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첼리스트로 꼽는데 일조한다. 피아노의 줄리어스 카첸, 바이올린의 요제프 수크와 2년간의 트리오 활동은 69년 카첸의 죽음으로 정지되었다.

    슈타커의 연주는 명확하면서도 강렬한 편이다. 그리고 낭만적이라기보다는 즉물적인 데가 있었는데, 말년에 접어들면서 그런면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그의 음반으로는 위에서 말한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가 대표적이다. 50년에 녹음한 음반(필립스)이 명반. 역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네 차레나 녹음했다. 그중 가장 최근의 것(RCA)은 96년 녹음해 지난해 선보였다. 그보다는 과거의 머큐리 레이블의 음반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지지를 얻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푸르니에 [ Fournier, Pierre, 1906.6.24 ~ 1986.1 ] 

   “음악을 그 위대함 속에서 사랑하는 것. 그것은 위대함을 피나는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낙담해 있을 때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될 수도 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해 주는 것이다. 음악의 매력에 이끌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만들고 국경이 없는 왕국을 만들기 위해음악에 대한 사랑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음악교’의 교주 같은 설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을 남긴푸르니에의 음악인생은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9세라는 어린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고, 이후 장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크게 상심했으나 주변의 많은 도움과 자신의 노력, 그리고 음악의 힘으로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따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뇌하는 면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가 프랑스인이란 것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파리에서 태어난 푸르니에는 처음에는 피아노를 하려 했다. 하지만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 전체가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항상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첼로를 택했으나 불편한 다리로는 보통사람보다 몇 백배나 더 힘들었다. 다만 그의 성품과 악기의 성격은 잘 맞았다. 12세에 어렵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26세이던 1932년, 늦은 나이에 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이후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국외 연주여행길에 자주 올랐다. 프랑스 정부는 그 공로로 그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1937년, 코르토, 티보, 카잘스가 창립한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첼로와 실내악 교편을 잡았고, 41년에는 파리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전쟁통임에도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가 음악으로 전파하는 사랑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다. 그는 교육활동을 잠시 멈추고 연주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나고 슈나벨, 켐프, 박하우스, 루빈슈타인, 굴다 등과 함께 연주하며 ‘평화와 사랑’을 전파했다. 56년 제네바에 정착한 후 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피에르 푸르니에의 도움으로 마스터 클래스도 열었다. 아들은 훌륭한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인 장 푸르니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푸르니에는 ‘첼로의 왕자’로 불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소탈함과 단정한 양식감, 균형감 등의 고전적 정신이 보태져 정갈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음색도 아름답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이런 모든 바탕 위에 인간애가 더해져 격조 높은 기품이 느껴지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는 프랑스 근대 작품들에도 능했다.


피아티고르스키 [ Piatigorsky, Gregor, 1903.4.17 ~ 1976.8.6 ]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피아티고르스키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비교적 어린나이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클랭겔에게 배웠다. 그는 로스트로포비치에 버금갈 만한 빠른 행보로 발전하며 연주했다. 첼리스트로는 어린 나이인 9세에 데뷔했고, 15세에 오케스트라 수석단원이 될 정도였다. 첼로는 악기가 크다는 점 때문에 어린 나이에 시작하기도 힘들고 신동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피아티고르스키는 워낙 기골이 장대한 편이었고, 성장속도도 빨라 비교적 일찍부터 활약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연주도 성인들의 그것만큼 완숙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그는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하이페츠처럼 영원히 떠났던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더 배울 것이 없어 보였으나 그는 배움의 길을 이어갔다. 1925년, 푸르트벵글러가 그의 연주를 듣고 베를린 필의 수석으로 기용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1929년에 베를린을 떠나 세계 각지에서 연주 활동을 벌이던 그는 미국에 정착했다. 당시 피아티고르스키가 협연 무대에서 즐겨 연주하던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와 드보르자크의 협주곡이었다. 당시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타’로 녹음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음반은 지금은 전설로만 전해 내려온다.


미국에서 그는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고, 첼리스트 중에 가장 많은 작곡가에게서 곡을 헌정받은 기록도 남기게 되었다. 그에게 곡을 헌정한 작곡가는 대략 25명에 이른다. 그중 프로코피예프의 첼로협주곡 작품 58과, 에른스트 블로흐의 ‘셀로모’ 등이 대표작이다. 그의 연주는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첼로를 마치 장난감다루듯 연주했지만 지나치게 과장된 연주는 절대 없었다. 절제와 균형, 그리고 진지함의 미덕을 아는 연주가였던 것이다.

이미 미국에 건너와 있던 바이올린의 하이페츠, 그리고 피아노의 루빈슈타인과 함께한 트리오 활동은 ‘백만 불의 트리오’ 라는 애칭으로 유명했다. 30여장이 넘는 음반도 남긴 이 트리오 활동으로 피아티고르스키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소위 ‘베를린시대’ 에는 피아노의 슈나벨, 바이올린의 플레쉬와 트리오 활동을 했었지만 ‘백만 불의 트리오’ 만큼 유명하진 않았다. 이외에도 프로코피예프, 바르토크 등의 작곡가가 그의 반주를 자청했고, 밀슈타인과도 함께 활동했다.

교육자로서 런던과 파리 음악원, 커티스 음대뿐만 아니라 말년에 거주한 캘리포니아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의 공로 중에 편곡 활동을 통해 첼로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없다.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모음곡’은 피아티고르스키와의 공동편곡이다. 독자적으로 편곡한 베버의 소나타도 유명하다.

장드롱 [ Gendron, Maurice, 1920.12.26 ~ 1990 ]    

    “내가 처음 공부할 때는 카세트도, TV도 없었고 오직 악기와 악보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오히려 잘된 것이었죠. 궁극에 이르면 예술은 결국 고독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장드롱이 지난 1985년 내한했을 당시 ‘객석’ 과의 인터뷰에서 한말이다. 그도 토르틀리에에 못지않게 어렵게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연주로 토르틀리에와 좋은 대조를 이뤘다. 이러한 연주풍은 그의 말대로 고독 속에서 음악을 만들며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한다.

프랑스 남부의 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신동이었다. 3세 때 이미 악보를 읽어냈다.주위의 권유로 5세 때부터 그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소형 첼로를 가지고 배우기 시작했다. 니스 음악원에서 최고 상을 받고 파리음악원으로 옮겨 제라르 에킹을 사사했다. 이 시절 장드롱은 넉넉지 못했으나 프랑스인 특유의 유머와 낙천주의로 지탱했다. 여기서 그는 당시 파리를 풍미하던 위대한 예술가들과 친교를 쌓고 예술적인 교류를 나눴다. 이 때의 교류가 그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40년, 파리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바로 연주계로 뛰어들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장 프랑세와 공연했고, 헤르만 세르헨, 멘겔베르크 등으로부터는 지휘도 배웠다. 그는 죽을때까지 지휘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47년 런던 필과 프로코피예프의 첼로 협주곡 작품 58을 유럽 초연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50년대 들어 파리에서 카잘스 지휘의 라무뢰 오케스트라와 하이든과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했다. 카잘스는 각별히 장드롱을 아껴 ‘그는 나의 황태자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역시 고독을 바탕으로 다듬어낸 그의 연주는 ‘고독의 성인’ 카잘스의 마음에 꼭 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테크닉 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완성도를 지녔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필립스)도명연 중의 하나로 꼽힌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연주로 오전 연습을 대신하는 대표적인 첼리스트 장드롱은 연습벌레로 통하기도 했다. 장드롱은 역시내한 당시 연습의 중요성에 대한 얘기를 하나의 일화로 대신했다.

“어느 날엔가 피카소에게 첼로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죠. 이후 10년 동안 아무 말도 없어 포기하고 있으려니 어느날 불쑥 피카소가 첼로를 그린 그림을 내놓더군요.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피카소가 ‘너한테 첼로를 그려 달라는 말을 듣고 10년 동안 매일 첼로 그리는연습을 했다. 이제야 마음에 들어 보여주는 거다’ 라고 대답하더군요. 예술은 오랜 세월 쌓여야 합니다.”

폴 토르틀리에 ( Paul Tortelier 1914 ~ 1990 )  

   토르틀리에는 어린 시절, 음악을 상당히 어렵게 공부했다. 부모들도 상류 사회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가구직공이었고, 어머니는 하숙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초의 파리의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도록 부추겼다. 토르틀리에의 어머니는 아들을 음악 공부를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은 굳은 일을 마다않고 했다. 오늘날 우리나 일본의 어머니들 같은 모습이라 할까.

하숙집에서 음악가들의 점심을 제공하는 일도 했던 그녀는 어린아들을 이끌고 첼로 레슨을 시키러 다녔다. 거기다 토르틀리에의 타고난 재능도 한몫해 10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한그는 피아르, 제라르 에킹에게 배운 후 16세 때 첼로 부문 1등상을 차지하며 졸업했다. 35년에는 대위법과 작곡에서도 1등으로 졸업했다. 이윽고 미국으로 건너가 쿠셰비츠키 지휘의 보스턴 심포니의 수석이 되었다. 그가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기까지 배의 요리사까지 마다않고 뒷바라지한 어머니가 있었다.  


어려운 서민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난히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것일까. 토르틀리에는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상심, 연주활동을 잠시 중단했다. 첼로라는 악기는 사람을 너무나 깊은 생각에 빠뜨리나 보다. 전쟁이 끝난 후 2년이 지난 4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주활동을 제대로 시작한 그는 토마스 비첨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키호테’를 연주, 녹음해 성공했다.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던 그는 1950년 프라도에 가서 역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한 카잘스를 만났다. 이 만남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나이는 비록 40년 이상 차이가 났지만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음악적 지향점도,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같았다. 처음 만나 마치오랜 친구인 것처럼 얘기했고, 음악으로도 대화했다.

56년 파리 음악원 교수로 초빙되어 12년간 재직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기술을 연마하고 개혁하는 대기만성형의 연주가로서,새로운 기술은 그의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라틴 민족의 본질과 어울려 후대에게 전달되었다. 필요하다면 전통과도 과감히 맞서 새로운 장점을 증명하고 반영했다. 그는 첼로 연주시의 몸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악기를 보다 수평으로 잡는 것이 음의 울림을 좋게 만들며, 보잉을 더욱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 구부러진 엔드 핀을 고안하기도 했다. 이는 일명 ‘토르틀리에 핀’이라 불리는데, 그와 친교가 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이를 도입해 모스크바 음악원에 보급하기도 했다.

그는 1년간 라무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있었고 작곡 활동도 했다. 두 곡의 첼로 협주곡 두 대의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과 많은 실내악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아들 얀 파스칼 토르틀리에는 이러한 영향을 이어받아 지휘자로서 활동중이다.

요요마 [ 馬友友 ( 마우우 ), Yo-Yo Ma, 1955 ~ ]

   요요 마의 양친은 대만계 중국인으로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는 메조 소프라노 가수였다. 4세 때부터 첼로를 시작해 어린시절부터 신동으로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6세 때 파리 대학 예술고고학 연구소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질 정도의 천재였다. 62년, 그가 7세 되던해 그의 가족은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고, 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레너드 로즈에게 배웠다. 이듬해 번스타인이 지휘한 TV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아이작 스턴과 카네기홀에서 함께 연주하는 등, 미국전역에서 신동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72년부터 말보로 음악제, 아스펜음악제 등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77년부터는 유럽으로도 연주 활동의 폭을 넓혔다. 베를린 필, 빈 필 등 최고의 악단과 협연한 그는 78년에는 잘츠부르크와 루체른 음악제에도 출연했다. 워낙 어린시절부터 연주해 왔으므로 그의 연주 활동도 40년이 가까워진다.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음반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첼리스트 중의 한사람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솔리스트로서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으나 실내악 연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영욱과 엠마누엘 액스와의 트리오 활동부터 아이작 스턴, 제이미 라레도, 초량린, 리처드 스톨츠만 등과 파트너십을 이루며 이어온 실내악 활동은 최근에도 끊이지 않는다.


82년 발표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CBS)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빠른 템포 설정으로 약동하는 ‘춤곡’의 의미를 되살려 낸 참신한 해석이라는 찬성파와 너무 가볍고 경박한 ‘미국적인’ 연주라는 반대파가 갈렸다. 1998년 출반된 재녹음은 다른 분야의 예술가와 영감을교류해 내놓은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줄 만하다. 전작에 비해서는 진지함이 보태졌으나 여전히 높은 완성도를 갖진 못한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오히려 그의 연주 중에서 ‘괜찮은 것’을 꼽자면 프로코피예프나 쇼스타코비치를 선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의 연주는 보편적으로 템포나 아티큘레이션을 생동감이 넘치는 쪽으로 잡아가는 편이다. 한편 감정도 풍부해 과장이 심하다는 비판도 많이 듣는다. 너무 일찍 신동으로 각광받았고, 지명도만으로 볼 때는 이미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첼리스트로서 자리를 굳혔다는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그의 나이가 40대 초반이라는 것, 그리고 테크닉면에서나 표현력 면에서 완숙기에 접어든 것을 감안한다면 이제부터 음악적인 면의 완성기에 들어서는 요요 마의 모습을 기대하게 된다.

자끄린느 뒤프레 ( Du Pre, Jacqueline 1945  ~ 1987 )

   뒤 프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녀를 앗아간 병명이 ‘다중 경화증’ 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명한 천재들에 대한 동경 때문일까. 어쨌든 금세기 최고의 여성 첼리스트로 꼽힌 그녀가 너무나 일찍 무대를 떠나야 했던 것은 음악을 듣는 사람들 모두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뒤 프레는 3세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소리를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4세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받고 5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배운 그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섭렵했다. 16세가되던 1961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고, 65년엔 뉴욕에 데뷔했다. 이후로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23세이던 68년에는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했고, 28세이던 73년, 희귀병에 걸려 연주활동을 모두 중단했다. 이후 14년 동안 투병하던 그녀는 말로써 지도하는 마스터 클래스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87년, 남편 바렌보임이 지켜보는 가운데 42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연주는 남성에도 뒤지지 않는 강렬한 힘과 표현으로 특징 지워진다. 마치 톱질하듯 썰어대던 보잉과 순진하고 솔직한 동작으로부터 발산하는 순수한 열정이 돋보였다. 그는 병에 걸리기전까지만 해도 항상 웃음을 간직한 낙천주의자였고, 자신감에 넘쳐 흘렀으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달하기까지 했다. 그런 성격이 그의 연주에도 반영된 것이었다.  


그녀의 연주는 한편 ‘자신을 활활 태워 만들어낸 음악’ 이라는 평을들었다.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써야 할 수명과 기를 짧은 기간에 소진했기에 때이른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그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고백했다. 그의 음반으로는 엘가의 협주곡(EMI)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며, 코바셰비치와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EMI)도 수작이다.



안너 빌스마 ( Anner Bylsma 1934 ~  )  

   빌스마는 그 활동에 비해 다소 과소평가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1934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60대 중반인 그는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의 대열에 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시절 아버지로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해 헤이그 왕립음악원에 입학한 이후로는 당시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인 카렐 본캄프에게 배웠다. 그리고 57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반적인 ‘신동’ 들보다는 훨씬 느린 행보였다. 2년 후인 1959년, 25세의 나이로 멕시코에서 열린 파블로 카잘스 국제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화려한 솔리스트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62년부터 그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의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당시 원전악기 연주계의 ‘무서운 아이’였던 가장 진취적인 원전악기 연주가 ─리코더의 프란스 브뤼헨,바이올린의 얍 슈뢰더, 쳄발로의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함께 암스테르담 4중주단을 결성해 원전 연주사를 개척하기도 했다. 지금 이들 중 브뤼헨과 레온하르트가 바로크 시대까지의 고음악 지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첼리스트로서의 자리를 지켜 온 빌스마의 비중이 어느 정도 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8년에 이르러 콘서트헤보를 떠나 본격적으로 솔리스트로서 활동을 개시 했지만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근대, 특히 현대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연주하는 런던 4중주단을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70년대 들어서는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원전악기로 연주해 이 분야의 주창자로서도 자리매김을 했다. 엔드 핀 없이 다리 사이에 끼우고, 거트 현을 채용해 연주하는 바로크 첼로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린 것도 그였다. 역시 네덜란드 태생의 그의 제자 페터 비스펠베이가 현대음악과 바흐를 중심으로 하는 고음악에 치중하는 모습은 빌스마의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투영한 것이라 할 수있을 것이다.

79년의 바흐 첼로 모음곡 전곡 녹음(세온)과 92년에 스미스소니안 협회 소장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셀베’(이 명기는 보통첼로보다 약간 크다고 한다)에 의한 재녹음(소니)은 이미 거트 현을사용한 원전악기 연주의 최고 음반으로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다.

한편 그는 이탈리아어로 ‘거트활’이라는 뜻을 지닌 ‘아르키부델리’를 조직해 소니의 원전연주 서브 레이블인 비바르테에서 음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교육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는 그는 현재 하버드 대학, 헤이그 왕립음악원, 암스테르담 스벨링크음악원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
*위 글내용은 검색내용을 참고 했습니다.

그리고 첼로의 거장에 꼭 들어가야할 "첼리스트"

"루드비히 휠셔(1907~1996)".독일의 첼리스트.

독일 출신의 명첼리스트 루트비히 횔셔(Ludwig Hoelscher)는 자국 출신의 전설적인 명연주자들과 협연하였던 거장이었다.

엘리 나이(Elly Ney),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 게르하르트 타쉬너(Gerhard Taschner),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막스 스트러브(Max Strub), 헤르만 아벤트로트(Hermann Abendroth),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오이겐 요훔(Eugen Jochum) 등과 협연하였던 최고의 명연주가로서 사랑받았다.

그는 러시아의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나 이태리의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프랑스의 푸르니에(Pierre Fournier) 만큼 독일을 대표할만한 첼로 연주자임에도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첼리스트이다.

횔셔는 독일 첼로계의 전통을 이어받은 연주가로, 명성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던 첼리스트이다.
나치에 협력했다는 전력(히틀러 집권하의 독일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의심받고 있다.)때문이라는 것도 개연성은 있지만, 그보다는 그가 주로 독일 내에서만 활동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SP시절에 독일의 엘렉트롤라(Electrola) 레이블에서 취입한 음반이 있고, DG, Telefunken, MPS 레이블에 적지 않은 녹음을 남겼으나, 음반은 적은 발매량 때문인 듯 상당히 귀하다.
엘리 나이와 함께 한 베에토벤의 첼로 소나타(군더더기 하나 없는 명연으로 엘리 나이의 피아노는 일품으로 정평이 났다.)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바흐에서 현대음악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했던 첼리스트였다.

 

루트비히 횔셔(Ludwig Hoelscher)는 1907년 8월 23일 독일의 졸링겐(Solingen)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시작하여 라이프니치 음악원에서 전설적인 첼로 교육자인 율리우스 클렌겔(Julius Klengel)과 휴고 베커(Hugo Becker)에게 사사했다.

음악원을 졸업한 후, 독일을 비롯한 동구 유럽으로 순회 공연을 하였으며, 1931년 초반 피아니스트 엘리 나이, 바이올리니스트 막스 스트러브(Max Strub), 비올리스트 발터 프럼플러등과 실내악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슈베르트 ‘송어’ 5중주곡을 녹음하였다.

또한 솔리스트로서 피아니스트 페르디난트 라이트너(Ferdinand Leitner)의 반주로 베토벤, 브람스 <첼로 소나타>를 연주하며 독일 순회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중 횔셔는 피아니스트 엘리 나이와 함께 나치 점령하의 독일에 남아 히틀러의 만찬에서 연주하여 전후 미국과 영국의 음악팬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6년 바이올리니스트 게르하르트 타쉬너(Gerhard Taschner), 피아니스트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과 함께 1956년까지 독일 중심으로 현악 3중주단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56년 동독의 거장 헤르만 아벤트로트의 지휘와 라이프니치 방송교향악단의 협연으로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하였고, 아울러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오이겐 요훔의 지휘로 슈만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하였다.

 

횔셔는 독일 작곡가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1869-1949)와 친분을 나누면서 그의 <첼로 소나타>와 <첼로 협주곡>을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협연하였으며, 그의 작품에 깊은 애정을 갖고 몇 장의 앨범을 남겼다.

1960년대 초반 독일 슈트가르트 시립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독일 콜로세움(Colosseum) 레이블에서 엘리 나이와 베토벤 <첼로 소나타> 음반을 남겼고, 텔레풍켄(Telefunken) 레이블에서 요제프 카일베르트(Joseph Keilberth)의 지휘와 함부르크 시립 오케스트라와 함께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다시 녹음하기도 하였다.

1986년 횔셔는 '국제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인생을 대부분 독일에 보냈으며, 아울러 엘리 나이 사망이후 콘서트 무대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1996년 루트비히 횔셔는 자신의 조국 독일에서 사망하였다.

 

근래 들어 횔셔의 녹음들이 속속 독일의 레이블들에서 발매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숨겨진 거장으로 남아 있는 명첼리스트이며, 아울러 그의 LP음원들은 현재 음반 콜렉터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의 초기의 레코딩은 대부분이 텔레풍켄(Telefunken에), 그리고 약간이 DG에 남아 있고, 대전 후의 녹음은 주로 독일의 마이너 레이블인 MPS에서 이루어졌고, 막스 레거(Max Reger)의 소나타 녹음이 크리스토푸루스(Christophurus)에 남아 있다.

루트비히 횔셔는 나치독일시절 한참 주가를 올리던 엘리 나이의 눈에 들어 25년이 넘는 나이차이를 넘어 평생을 그녀와 음악동지가 되어 함께 연주하였고, 그녀외에도 다수의 명연주자들과 활발한 실내악 연주를 펼쳤었다.

루트비히 횔셔로부터 지금의 5손가락을 모두 쓰는 연주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의 연주는 얼마 음반으로 남겨지지도 않았고 그나마 양도 적어서 수집가들 사이에 그의 앨범은 늘 표적이 되어있다고 한다.

다행히 최근들어 그가 남긴 음반들이 CD로 재발매되어 그의 연주를 좀더 손쉽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카일베르트와 함께 한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도 명반중의 명반으로 이름이 높다.

스테레오 녹음인 이 음반은 그의 연주중 최로로 뽑히는것의 하나로 녹음연도가 1950년이다.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깝다는 첼로.

첼로 협주곡 하면 1순위로 떠오르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이다.

너무나 많은 녹음이 있어, 절대명반 하나만을 꼽기는 어렵지만, 우선 푸르니에와 셸의 협연이 떠오른다.

첼로와 오케스트라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융합된 뛰어난 연주로, 국내에는 이 연주가 가장 널리 소개, 발매되었기에 그 지명도가 상당히 높다.

다음은 로스트로포비치와 카라얀의 협연.

아마도 오케스트레이션이 제일 탁월한 연주로 손꼽히며, 첼로가 오케스트라에 잠겨버린 듯해 아쉽기는 하지만, 첼로 독주가 딸린 교향곡이라는 타이틀에는 잘 어울린다.

그리고는 그 밖의 여러 연주들… 그러나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녹음이 하나 있다.

애호가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바로 횔셔와 카일베르트의 협연이다.

카일베르트의 지휘도 훌륭하기는 하지만, 첼로 하나만을 놓고 보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연주로, 마치 오케스트라 반주가 딸린 첼로 소나타의 느낌을 준다.

선이 굵은 첼로의 음색이 담담하지만 기가 충만하여 저 단전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저력을 보여준다.

또한,3악장의 종반부 연주는 특별한 바가 있는데, 대부분의 다른 음반에서 첼로소리가 오케스트라에 묻혀 희미하게 들리는 경우가 빈번한 소절에서조차 횔셔의 첼로는 빛을 발하여,전혀 다른 선율로 들리기까지 한다.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이스라엘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1948~    ,라트비아)는 우리 시대 최고의 첼리스트 중 한 명이다. 20세기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는 "미샤 마이스키"에 대해 “젊은 첼리스트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

시적인 감성과 폭풍 같은 격정, 눈부신 기교가 조화를 이루는 연주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마이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수학하며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했고, 1974년 미국 카네기홀에서의 첫 데뷔 이후에는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를 사사하면서 이 시대 최고의 두 거장에게 모두 가르침을 받은 유일한 첼리스트가 되었다.

-"자크린 뒤프레"가 연주하는 "엘가"첼로협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