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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음반)이야기

-왜 클래식을 듣는가?-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5. 12. 5. 22:23

 

 

 

--사실은 그동안 ‘왜 클래식을 듣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질문에도 섬세한 결의 차이가 있더군요. 나름대로 풀이해보자면, ‘클래식을 들으면 어떤 이득 혹은 실용적 이익이 있는가? 라는 것과, ‘왜 20세기 동아시아에 살면서, 지나간 시대의 서구 음악문화에 관심을 갖는가?’라는 것으로 나눌 수 있을 법합니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를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의 질문, 고전음악을 들으면 어떤 점이 유익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말하더군요. 정신적 수양을 위해서,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음악을 듣는다구요. 좋은 말인 듯합니다. 고귀한 음악을 듣다 보면 영혼에도 분명 이득이 될 겁니다. 분명 그런 분들에게는 음악이 복잡한 마음을 달래드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고전음악도 가지가지입니다.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을 들으며 복잡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 가능할까요? 살인장면이 나오는 오페라 「팔리아치」나 「오텔로」를 들으면 정신이 순화될까요? 물론, 음악이 정신수양에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런 의도를 가진 사람이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전음악의 특정한 용도일 뿐, 고전음악을 듣는 고유한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더군다나 정신수양이 인격수양과 동의어라면,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클래식 애호가 중에는 수많은 인격자와 선인, 인격 미달자와 사회부적응자가 섞여 있습니다. 그 비율은 음악을 안 듣는 사람들 속의 인격자,인격미달자 비율과 거의 차이가 없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떨까요? 고전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이른바 ‘모차르트 이펙트’로서의 음악듣기 말입니다. 글쎄요,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의 유력한 반증으로는 저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농담이겠지, 라구요? 감사합니다. 물론, 음악이라도 들어서 이 정도 머리나마 갖게 된 걸 수도 있죠. 그렇지만 머리가 좋아지려는 목적이라면, 그 시간에 수학문제를 풀던가 퍼즐을 맞추던가 ‘루빅스 큐브’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제가 생각하는 고전음악의 ‘효용’은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하시겠죠.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쾌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제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 업적과 여러 시대 문화의 음악이 쾌락을 가져다줄진대, 왜 저는 18,9세기 유럽이라는 한정된 시대와 지역의 음악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것을 먼저 잘 알고 난 뒤에 남의 것을 알아도 늦지 않는 일 아니냐구요. 문화란 상대적인 개념인데, 무조건 유럽의 음악문화가 앞섰다고 보는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 지적에 답하는 데 있어서, 우리 음악문화가 매우 독특하며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저는 말합니다. 분명 모든 문명권의 문화는 평등한 ‘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화와 문명이 균등한 수준과 차원으로 발전해 나간다고 본다면, 그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인 듯합니다. 분명 사회적 여건과 대중의 관심 등의 축복에 의해 남보다 빠른 속도로 진보하는 문화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만약 이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예진흥’도, ‘문화지원’도 필요없는 일일 것입니다. 문화의 발전수준이 언제나 균등하다면, 그것은 진흥이나 지원도 필요 없는 것일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18,9세기 유럽이라는 환경은 분명 독특했던 듯합니다. 귀족의 압제에서 해방된 시민층은 힘을 가지고자 했고,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고귀해지고자 했습니다. 당시 도시마다 커져가던 ‘필하모닉 홀’을 채운 청중들은 이런 상공업자 출신의 시민층이었습니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높은 이상을, 대부분 이기적으로 해석하기는 했지만, 가슴 깊이 간직하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겼던 사람들의 음악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듣는 고전음악입니다. 도시와 소국가들로 분열됐던 당시 독일 이탈리아 지배층들의 경쟁심도 문화예술에 대한 풍요한 후원에 한몫 했던듯 합니다. 앞서 제가 고전음악 감상의 목적은 ‘쾌락’이라고 했던가요. 가장 높고 순수한 차원의 정신적 쾌락을 당시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추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나간 시대의 음악인가. 그렇습니다. 20세기의 진보된 기술문명은 훨씬 다양하고 화려한 음색, 풍성한 음량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모든 지역과 부족의 지역음악이 발견돼 풍요로운 리듬과 선율미를 우리 세대의 음악문화에 흘러넘치게 했습니다.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대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잃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중주의’와 ‘작가주의’의 건전한 긴장입니다.

18,9세기의 음악계는 작가주의와 대중주의가 가장 건강하게 긴장을 이뤘고, 그 결과 인간의 정신에 가장 풍족한 영양을 공급해 줄 수 있었던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1920년대 방송의 보급 및 음반의 대중화와 함께 이런 긴장은 사라졌습니다. 문화적 생산자의 취향은 대중의 취향에 비추어 중요치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건강한 ‘작가주의’가 아주 사라져 버렸다면 그것은 과장된 선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의 전반적인 정신적 환경은 역시 지나간 그 시대만큼 풍요롭지 않습니다. 반대로, 외골수의 작가주의가 건전한 수용자를 내버리는 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고전음악을 듣는다는 것, 그것은 술 향기나 차 향기의 오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것처럼, 아주 섬세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의 호사 취미 아니냐구요. 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폭풍처럼 몰아치고 해일처럼 가슴을 덮쳐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것, 첫사랑처럼 온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밤새 잠못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좋아해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바로 고전음악의 세계였습니다.

위글 : 유윤종

 

-클래식, 새로운 향유(기돈 크래머 되기)-

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낡은 질문을 늙은 아티스트가 던져온다. 누군가는 ‘피식’ 조소를 내보이며 비아냥거릴 것이다. 중등 교과서를 덮으면서 마감했어야 할 질문이 아닌가? 하지만 질문이란 패션계의 지루한 유행처럼 반복된다. 이번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클래식 공연이라기보다는 클래식 쇼에 가까운 ‘기돈 크레머 되기(Being Gidon Kremer)’를 보고 왔다. 유쾌하다. 위트가 넘친다. 그러나 공연이 던지는 질문은 만성 변비 환자의 아랫배만큼이나 묵직하다. 공연의 인상은 우디 알렌의 코미디 시나리오를 음악으로 연출한 것 같은 모양새다. 모차르트와 영화 ‘007 제임스 본드’의 테마곡이 엮이고, 피아졸라를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우스꽝스런 탱고를 춘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8 1/2>를 인용한 철학적 화두가 언급되고, 슬랩스틱 코미디가 이어진다.


↑ 이미지 제공 : 인터파크공연


몇몇 열혈 클래식 마니아들과 미처 레퍼토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티켓을 구입한 사람들은 인터미션을 틈타 작은 항의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남아 있는 객석에선 계속해서 웃음이 터지고, 그 시간 동안 질문도 일관되게 던져진다. 과연 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휴대폰의 배경 음악과 미니홈피의 장식음으로 전락한 음악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이 지면을 통해서도 거론했던 것이다. ‘명성이 그 음악가를 더 훌륭한 음악가로 만들어주는가?’라는 노골적인 질문도 평론가들의 펜대를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 돼온 지겨운 상용구다. 그럼에도 공연 ‘기돈 크레머 되기’는 매력적이다. 아마도 그것은 지난 50년 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해온 그의 삶이 가진 진정성에 기인 할 것이다. 변변찮은 글 하나 쓰지 못하는 동양의 팝 칼럼니스트의 문제 제기보단 이목을 끌고, 동의를 구해 잠시나마 음악에 대한 사유를 진행시킬 힘이 있을 테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눈앞의 코미디에 흥이 겨워 박수를 쳤다곤 하지만, 그저 잠시의 유흥으로 공연장을 찾은 관객이나, 뼛속까지 패배주의에 침식당한 관계자들이 아니라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그리 상쾌하지 많은 않았을 것이다. 버튼을 눌러 너무도 쉽게 찾아지는 라디오의 음악 어디에도, 그가 던진 화두에 대답을 건넬만한 내용물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음악인가? 아니면 그저 빨강, 파랑, 노랑으로 색감만을 달리한 주방용 그릇의 청각 버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음악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해야만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클래식의 ‘클’자 하나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기돈 크레머 되기’의 레퍼토리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은 코미디와 나레이션이 섞여 들어가지 않은 순수 음악의 연주들이었다. 신이 만든 두 개의 고막만 있다면 누구나 느꼈을 아름다운 멜로디의 감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손을 꼭 잡았고, 까다로운 정통주의 청자들도 잠시나마 흐뭇해했으며, 혼자 온 누구누구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왜 음악을 듣는가를 설명하는 충분한 이미지들이 아닐까?

두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거기엔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짝퉁과 진품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나 두 물건을 같은 자리에 놓았을 때, 선뜻 판단을 내릴 정도의 판단력은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

존 케이지는 피아노 앞에서 침묵으로 ‘음악의 본질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고, 60년대의 히피들은 LSD를 촉매제 삼아 어렴풋이나마 손끝에 그 감촉을 느껴보려 했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내내 내 머리를 돌아다닌 생각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 답을 찾으려 했는가, 이다. 날씨도 스산한 11월에 공연 관람의 후유증으로 인해 한 동안 꽤 심란할 것 같은 예감이다.

 

클래식 연주회에 웃음과 유머가 끼어들 여지는 많지 않다. 대개의 클래식 공연장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강파른 격식과 근엄한 미소인 경우가 많다. 어느 누구라도 클래식 공연장에서 낄낄거리며 웃기란 쉽지 않다.
위글: 김태훈


오는 11월 10일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지는 ‘기돈 크레머 되기-클래식 음악가의 흥망성쇠’는 클래식 음악을 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파가니니의 재래(再來)’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 그가 이끄는 젊은 앙상블 크레메라타 발티카, 그리고 클래식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온 클래식 코미디 듀오 리처드 형기 주와 알렉세이 이구데스만이다.

이번 공연의 방점은 기돈 클레머에 쾅쾅 찍혀 있지만 무대의 색깔을 규정짓는 것은 영국을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피아니스트 겸 배우 리처드 형기 주와 러시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배우 알렉세이 이구데스만이다. 이들의 직업이 단순히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배우’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는 사실에 관객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예후디 메뉴인 스쿨 동창생인 두 사람은 지난 2004년부터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탈피해 클래식 연주회에 유머와 코미디를 가미한 그들만의 쇼를 펼쳐왔다. 지난 2004년 오스트리아 빈 무지크페라인잘에서 초연된 ‘거대한 악몽같은 음악(A Big Nightmare Music)’이 그것으로 이들은 여기서 활 대신 바이브레이터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진공청소기 속으로 활이 빨려들어가는 짤막한 상황극을 펼치는 등 엽기적인 행위예술을 선보였다.

‘기돈 크레머 되기-클래식 음악가의 흥망성쇠’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이들과 의기투합한 비슷한 컨셉트의 공연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지난해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투어 공연을 펼치고 있는 ‘기돈 크레머 되기’에서는 모차르트, 바흐, 쇼스타코비치 등 정통 클래식에서부터 엔니오 모리코네, 존 윌리엄스, 한스 짐머 등 영화음악까지 다양한 레퍼토리가 연주된다.

이런 음악들이 어떤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연주되느냐가 이번 공연의 관전 포인트다.

클래식 연주회에 웃음을 끌어들인 기돈 크레머의 제작의도는 그러나 전혀 우습지 않다. “시장경제가 예술을 점령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전제한 기돈 크레머는 “그 결과 우리는 너무나 자주 감성과 지성의 조화로운 함양이나 영혼의 울림과 같은 음악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놓치게 됐다”면서 “이번 공연이 클래식 연주회의 상업적인 하향평준화에 대해 건강한 비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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