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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음반)이야기

뮤지컬"명성황후"-대구 계명아트센터(2015.12/26)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5. 12. 30. 10:38

현대자동차 고객초대 행사에서, 무료초대장이 나와 다녀온 뮤지컬 "명성황후"는, 조선말기 일본의 대륙진출의 야욕을

여실히 보여준 뮤지컬 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출연진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좋았고, 무대를 꾸미는 아이디어도

돋보였네요.  "계명아트센터"는 이번에 처음 갔었는데,건물의 화려함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한가지,음향시설은 나이트클럽 수준

이라서 개선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쿵쿵 울리는 서브우퍼의 음향이 귀에 거슬립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저음이 좋지 않을까요?

 

 

 

-포토 라인-

                                               -많은 괄람객들-

 

 

-출연진들- 

 

 <명성황후(1851~1895)>

명성황후 민자영, 그녀는 남편 고종과 함께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옴)의 거친 파고 속에서 일제 침략자들의 야심에 정면으로 맞서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조선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쥐고 흔들던 왕권을 남편 고종에게 되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임오군란으로 절체절명의 고비를 넘긴 그녀는 고종을 보좌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한다.

제국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욱일승천의 기세를 뽐내던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조선 병탄의 야심을 숨기지 않는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강대국 러시아와 미국 등을 끌어들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제압함)의 외교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국체를 보전하고자 했다.

이런 전략적 묘수는 소위 ‘여우 사냥’이라는 일제의 야만적인 도발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함)이라는 대반전의 승부수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대한제국 수립이라는 결실로 맺어졌다.

오늘날 그녀는 ‘민비’와 ‘명성황후’라는 극단적인 호칭이 말해주듯 조선을 망친 여인, 혹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 순절한 영명한 조선의 국모라는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실로 명성황후의 치적에는 숱한 유언이 나돌지만 당시 조선을 병탄하려던 일본에 있어 그녀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제거해야 했던 최대의 걸림돌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감고당의 외로운 소녀, 면류관을 쓰다

명성황후 민씨는 노론의 거물이었던 민유중의 6대손 민치록과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외동딸이다.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 섬락리에서 태어났다. 정3품 사도사첨정을 끝으로 낙향한 민치록은 딸에게 ⟪소학⟫, ⟪효경⟫ 등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담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위치해 있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6호)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있는 인현왕후의 사가인 감고당으로 이사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그녀는 쓸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바로 그 시기에 일본에서는 극렬 정한론자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제자들에게 조선 정벌의 당위성을 극력 설파하고 있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왕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처가인 여흥 민씨 가문의 사고무친한 민자영에게 주목한다. 여기에는 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원군은 본래 안동 김씨 집안의 딸을 왕후로 내정했지만 그 약속을 어김으로써 안동 김씨 세력과 척을 지게 된다.

민자영은 그해 3월 6일의 삼간택에서 왕후로 간택되었다. 당시 15세의 남편 고종은 궐내에서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가례 첫날부터 소박을 맞았지만 상심한 마음을 치국의 서책으로 달랬다. 이때의 공부를 통해 그녀는 대원군이 장악한 내정을 회수하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동북아의 소국 조선이 살아남는 묘책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당시 그녀는 민승호, 민겸호 등을 통해 일찍이 대원군이 조정에서 쫓아낸 조영하, 김병기, 흥인군 이재면, 최익현 등과 제휴하며 정치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1868년 4월 귀인 이씨가 완화군 이선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몹시 기뻐했다. 방심한 그는 며느리의 정치적인 행보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71년, 고종의 사랑을 되찾은 민씨는 아들을 낳았지만 항문폐색증으로 생후 5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세 살이 된 완화군이 요절하자 그녀는 생모인 귀인 이씨를 궁궐에서 내쫓아버렸다.

이윽고 정계의 전면에 등장한 왕후 민씨는 성년이 된 고종에게 친정을 하도록 설득하면서 한편으로 대원군 퇴진 공세를 펼쳤다. 여기에는 고종의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소외당하고 있던 조대비의 친족 조성하, 조영하 형제, 대원군의 형 흥인군, 서원철폐로 인해 분개한 유림 세력,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던 노론 세력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1873년 10월, 최익현은 고종의 친정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 당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고종을 설득하여 그에게 정3품 돈령부 도정 벼슬을 제수했고, 금세 호조 참판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최익현은 그해 11월에 재차 대원군 규탄 상소를 올렸다. 바야흐로 대원군 퇴진 분위기가 고조되자 고종은 운현궁에서 대궐로 통하는 대원군의 전용 출입문을 폐쇄해 버렸다.

당시 고종의 나이 22세, 성년을 넘긴 국왕이 친히 정사를 돌보겠다는데 반박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대원군은 11년에 걸친 농단하던 권력을 빼앗기고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에 은둔하고 만다. 이때부터 대원군은 자신을 내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며느리를 정적으로 인식하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이듬해인 1874년 왕후 민씨는 둘째 아들 을 낳고 한 시름 놓았지만, 대원군 일파의 폭탄테러로 친정오빠 민승호와 그의 아들, 어머니 등 3명을 잃었다. 민승호는 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으로 왕후의 본가에 가족이 없어 대를 잇기 위해 민치록의 양자로 입적시킨 인물이었다.

1875년 왕세자 책봉으로 심기일전한 왕후 민씨는 대원군이 정계에 끌어들인 여흥 민씨 일족과 청년 개화파 인재들을 중용하면서 정계를 리드했다. 때 마침 일본이 조선정벌의 야심을 숨긴 채 운요 호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하자,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문호를 활짝 열었다.

이때 고종은 개항의 상징적인 기관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를 폐지했다. 아울러 영선사신사유람단을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여 공업·무기제조법 등을 배워오게 했다. 당시 왕후 민씨는 김윤식에게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 한미수교를 주선하도록 부탁했다. 또 개화승려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하여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수교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부강한 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조선의 국체를 보전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군란과 정변의 파고를 넘어서

1881년 8월, 대원군을 추종하는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고종을 폐위하고 이재선을 옹립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하지만 정권을 탈환하려던 대원군 일파의 시도는 더욱 면밀하고 거칠어졌다.

1882년 6월 5일,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선혜청 도봉소에서 군료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하면서 임오군란이 시작되었다. 당시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미숙한 대응으로 군병들의 분노가 확산되자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이 주동하여 관공서 및 고관의 저택을 습격하더니 급기야 대궐 난입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어느덧 폭도로 변질된 군병들은 대원군의 친형인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을 잡아 죽이고 왕후 민씨를 부정부패의 수괴로 지목하면서 대궐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급박한 위험 속에서 그녀는 여흥부대부인의 도움으로 가마에 올라 대궐을 빠져나온 뒤 무예별감 홍계훈의 기지로 도성을 벗어나 여주 땅에 은신했다.

당시 이성을 잃은 폭도들은 일본공사관으로 몰려가 불을 지르자 하나부사(花房義質) 일본공사가 급히 제물포로 탈출했다. 그 혼란의 와중에 대궐을 장악한 대원군은 고종에게 정권을 위임받은 다음 왕후 민씨의 국상을 선포하고 맏아들 이재면에게 재정권과 병권을 위임했다.

왕후 민씨는 얼마 후 군란의 열기가 가라앉자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자신의 안전을 통보한 다음 청에 지원을 청하게 했다. 그러자 청의 해군 제독 오장경과 정여창 등이 신속하게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들어온 다음 방심한 대원군을 납치하여 보정부에 연금해 버렸다. 그 결과 조정이 정상화되자 왕후 민씨는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 무렵 청나라를 배경으로 점진적 개화를 모색하던 민영익, 김윤식 등의 온건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일본의 지원을 통해 전면적인 개화를 주장하는 급진 개화파 인사들은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추구하던 온건개화파 인사들을 사대당 혹은 수구당이라고 조소했다.

1884년 9월 안남 문제로 청불 전쟁이 일어나자 급진개화파 요인들은 청나라가 당분간 조선에 관심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리하여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기회로 온건개화파 인사를 참살하는 일대정변을 일으켰다. 이른 바 갑신정변이었다.

이튿날인 18일, 정변의 성공을 확신한 개화당은 경우궁에서 새 내각을 조직하고, 14개조의 혁신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흘 째 되는 날 그들은 예기치 못한 청군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는다. 그날 창덕궁에서 벌어진 일전에서 개화당을 후원하던 일본군이 패배하면서 정변은 3일천하로 귀결되었다.

이 갑작스런 정치적 소요 이후 서울에 눌러앉은 위안스카이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신임하던 베베르의 나라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을 견제할 요량으로 박정양, 이범진을 주축으로 하는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얼마 후 조선이 러시아에게 영흥항을 조차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1885년 3월, 러시아의 라이벌 영국이 거문도를 무단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청도 친러정권을 누르기 위해 연금했던 대원군을 석방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런 미묘한 국제 분위기 속에서 왕후 민씨는 수차례 정부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러시아와 비밀조약을 맺으려 했지만 위안스카이의 방해로 실패하고 만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오판

1892년 봄, 운현궁에서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났다. 또 건물 여기저기에서 폭발물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과거 민승호의 죽음을 앙갚음하기 위한 왕후 민씨의 음모라고 수런거렸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조선을 둘러싸고 러시아, 일본, 청나라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조정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에서 동학교도들이 탐관오리의 퇴출과 외세 축출을 주장하는 대규모집회를 열었다. 이듬해인 1894년 1월에는 전라도에서 동학 접주 전봉준을 필두로 고부군수 조병갑을 탄핵하는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왕후 민씨는 동학교도이 대원군을 추종하면서 조정을 뒤엎으려는 비적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특히 흥선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에 주목했다. 전봉준은 1890년부터 운현궁의 식객 노릇을 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입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해 4월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한양에 진입하면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분개한 왕후 민씨는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민영준을 청나라에 보내 원병을 청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동학의 무리를 내 어찌 왜놈처럼 여기랴만 임오군란과 같은 일을 다시는 참을 수 없다.’면서 청병을 주저하는 민영준을 꾸짖었다 한다. 그 결과 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톈진조약의 상호 군대파견조항을 내세운 일본이 기다렸다는 듯 대군을 급파했다.

그런데 일본군은 아산에 상륙하자마자 서울로 물밀듯이 치고 들어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해 버렸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에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개혁을 통하여 향후 조선의 병합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종 부부를 연금한 채 김홍집 친일내각을 앞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소위 갑오개혁을 추진한다. 당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왕후를 겁박하여 정계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이때 일본 측의 회유에 넘어간 대원군은 일본상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한 뒤 정권 회복을 꿈꾸었고, 손자 이준용은 고종과 명성황후 폐위를 꾀하기까지 했다. 이준용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공사관을 찾아가 오토리 공사를 설득했지만 스기무라 서기관의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얼마 후 일본은 아산과 둔포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습격하여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야심을 드러냈다. 급기야 청과 일본의 전쟁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대어 청일전쟁이라는 대회전으로까지 발전한다.

일본은 이 회심의 일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양도받고 조선에 대한 권리까지 위임받았다. 바야흐로 조선 병탄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의 대표적인 정한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내 생전이 이런 대사를 보다니 저승에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할 것이다.”라며 환희작약했다.

들꽃처럼 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껏 고조되었던 일본의 기세는 삼국간섭으로 금세 허리가 꺾였다.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에서 일본의 퇴거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열강의 힘을 두려워하던 일본은 1895년 5월 초순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에서 군대를 물려야 했다.

이런 국제정세를 면밀히 주시하던 왕후 민씨는 1895년 7월 이노우에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바탕으로 재차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을 망라한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또 민영환을 비롯해 민씨 척족 16인을 조정에 불러들인 다음 1894년 6월 이후 친일내각이 추진해 왔던 내정개혁을 백지화했다.

이때 고종은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국왕인 자신이 매일같이 대신들과 접촉하여 대소사를 심의한 다음 시행하겠다는 조칙을 발표했다. 이어서 관복을 옛날식으로 환원시키고 일본군 휘하에 들어 있는 훈련대를 해산시키려 했다.

이같은 조선의 민활한 움직임이 일본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요동반도의 포기로 정부가 비난받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결국 일본의 정객들은 현 정세를 뒤집을 비책으로 친러정책을 주동하는 조선의 왕후 민씨를 제거하기로 했다.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공사는 그와 같은 계획을 입안한 뒤 자신의 후임으로 미우라 고로 자작을 발령했다. 그러자 미우라 공사는 관저에서 불경을 외면서 고종 부부를 방심케 하면서 비밀리에 왕후 시해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는 궁중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명성황후를 시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자신들이 훈련시킨 조선군 훈련대를 내세워 내부 쿠데타를 가장하면서 일본 낭인부대를 투입하기로 했다. 이들을 위한 엄호와 전투의 주력은 일본군수비대가 담당할 것이었다.

운명의 8월 20일 새벽 4시경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가 이끄는 일본 낭인 30여명이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 앞에 도착했다. 이윽고 조선군 훈련대가 춘생문과 추성문을 포위하자 낭인들이 거사에 돌입했다. 한밤중에 궐내에서 급보를 받은 고종은 적도들이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왕후를 옥호루에서 자신이 머물던 곤령합으로 불러들였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왕후에게 궁녀 복장을 하게 했다.

이윽고 폭도들은 경복궁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했다. 궁궐의 경비병은 총인원 1500명에 장교가 40명이나 되었지만 대부분 도망치고 5시 10분경 남아 있는 사병은 300여 명뿐이었다. 새벽 5시 30분경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광화문으로 들어오는 흉도들과 첫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10분 만에 홍계훈이 전사하고, 안경수와 시위대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춘생문 쪽에서 침입한 폭도들은 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작은 문을, 추성문 쪽의 난입자들은 다이 장군과 사바틴이 지키고 있던 대문 수비를 거의 같은 시간에 무너뜨렸다.

기세가 오른 폭도들은 두 패로 나누어 건청궁 안에 있는 곤령합과 옥호루 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가로막다가 양 팔목을 잘리고 살해되었다. 그들은 방 안으로 난입한 다음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2미터가 넘는 창밖으로 내던졌는데 한 사람도 달아나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고종 역시 폭도들에게 옷을 찢겼고 저항하던 왕세자는 부상을 입었다. 왕세자비도 현장에 있었는데 왕후를 보호하려다 넘어져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왕후 민씨는 뜰 아래로 뛰어나가다 붙잡혀 가슴을 짓밟히고 칼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충격적인 왕후 시해범의 정체는 전 조선군부 고문 일본인 오카모토와 스즈키, 와타나베로 밝혀졌다. 그들은 왕후의 시신을 녹원(鹿園) 숲속으로 옮긴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1895년 8월 20일 오전 8시경이었다. 이로서 밀려오는 외세에 당당히 맞서며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키려던 비운의 여인 민자영은 4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왕후 시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이 들끓어 올랐다.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쇄도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범인들을 체포하여 일본에 압송한 뒤 재판에 회부했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파렴치한 왕후 시해범들은 시간이 흐른 뒤 모두 풀려났고, 향후 승승장구하여 일본의 명사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사랑하고 의지하던 왕후를 잃고 나서 고종은 한 동안 폐인처럼 지냈다. 대원군이 조정에 들어와 국사를 좌지우지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모든 것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기 수순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삼엄한 일제의 감시 속에서 절치부심하던 고종은 정동의 외교관들과 친미파 인사들의 지원을 받아 미국공사관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고종은 포기하지 않고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함으로써 일본의 너울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2월,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한 다음 그해 10월 대한제국령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1897년 1월 6일, 고종은 죽은 왕후 민씨에게 문성황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능호를 홍릉으로 고쳤다. 3월 2일에는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정조 임금과 같다 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로 바꾸었다.

그녀는 조선의 국모다

《서유견문》의 저자로 개화파이자 친일파였던 유길준은 명성황후 시해 직후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를 영국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마리 앙투와네트보다도 더 악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명성황후가 일본의 너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리에 접촉했으며, 1894년 가을 개화당 인사들을 전부 암살하려다 대원군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고 혹평했다. 아버지 윤응렬과 함께 대를 이어 친일파로 활동했던 윤치호 역시 명성황후가 가족에 대한 집착으로 미신에 현혹되어 나라를 망쳤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런 악평은 주로 일본인과 친일파 인사들의 저열한 자기변호에 다름 아니다.

독립협회 설립자이며 독립신문의 주필이었던 서재필은 그녀가 매우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상황 분석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상찬했다. 당시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의 지략에 자신까지 넣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일컬었지만, 그 다섯이 명성황후 앞에 나가면 으레 기선을 제압당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나왔다고 한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남긴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서울에 들어와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의 집에서 5주간 머물 때 네 차례에 걸쳐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한 다음 이렇게 썼다.

‘왕후는 40세가 넘었는데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왕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호의, 뛰어난 지성과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통역자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화법은 탁월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국왕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명성황후 민씨는 아주 이지적이며 사려깊을 뿐만 아니라 친절하며 특출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다. 한편 우리가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하다고 여기고 있는 고종에 대한 평가도 색다르다. 우리는 그 동안 조선사편수회에서부터 내려준 일방적인 역사교시에 따라 고종을 폄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왕의 표정은 온화했다. 왕은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의 역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해도 명확하고 상세하게 답변할 수 있었다.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역과 연고까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통치자로서 지극히 근면한 사람이며 각 부처의 모든 일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많은 신하들의 갖가지 보고에도 지치지 않고 정성으로 이들을 수렴했다.’

미국의 외교관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 역시 명성황후가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 모두가 조선의 황혼기를 온몸으로 버텨냈던 명성황후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경복궁 건청궁

1895년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위 명성황후에 관한 내용은 "백과사전"의 내용을 복사 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