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noy","아날로그",그리고 LP!

"Tannoy로 듣는 세상의 좋은 音樂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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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noy"오토그라프"사운드.

"생상스"의"서주와론도 Capriccioso"-"루지에로 리치"연주.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8. 8. 19. 20:00

피아니스트 이자 작곡가인 "까미유 생상스(프랑스,1835~1921)는 19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계

인물중 한사람이며, 낭만주의 시대와 근대사회로의 변천과정을 격은 역사의 산 증인이었으며, 고전주의의

부활을 지지했고, '리스트'와 '바그너'를 존경했으며 새로운 프랑스 음악을 알리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했습니다. '생상스'의 작품에는 독창적인 상상력과 선율적인 아름다운 영감이 존재합니다.

 

"Ruggiero Ricci"의 이앨범은 "사라사테"와 "생상스"의 유명한 4개의 소품이 녹음되어 있는 음반이며,

우리나라 정경화를 비롯한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들이 음반을 내고있는 그러한 곡들 입니다.

그중 "리치"의 이음반은 국내에서는 수십만원(초반이면 백만이상)을 주고도 구입하기가 쉽지를

않다고 합니다. 'Pierino Gamba"가 지휘하는 런던심포니 와의 협연을 Tannoy autograph 사운드로

감상하세요!  (오토폰Spu 구형사용,연주시간8분27초)  -1971년 발매-

"루지에로 리치(미국. 1918~2012)"는 완벽한 기교로 파가니니의 재현이라 불리며 20세기 음악계를 주도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와 더불어 바이올린의 개척자로 통하는 그는 191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트롬본 주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리치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는 아들을 메뉴인의 스승으로 유명한 루이스 퍼싱거(Louis Persinger)에게 데려갔고, 7세 때부터 퍼싱거의 문하에 들어간 리치는 10세인 1928년 11월 15일 4분의3사이즈 바이올린으로 데뷔 리사이틀을 하면서 화려한 신동의 탄생을 예고했다.

루지에로 리치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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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부터 그는 카네기홀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에 섰는데, 특히 어린 나이에도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벽히 연주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신동으로 급부상한 리치는 곧이어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 크라이슬러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히 연주를 마치며 인정받았고, 베를린 공연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찬사를 받았다.

-처음으로 대중앞에선 "리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징집 대상이 되어 입대한 리치는 군대에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병상을 돌며 위문 공연을 하는 일을 주로 맡았는데, 반주 악기 없이 홀로 연주하면서 무반주 작품들을 익히게 되었다. 제대 후 복귀한 1947년에는 초절정의 기교를 요구하는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전곡을 음반 역사상 최초로 녹음하면서 화제를 불렀다. 이후 카프리스는 루지에로 리치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1964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15곡을 연주하는 시리즈를 열어 큰 호응을 얻은 루치에로 리치는 일생 동안 500장이 넘는 음반을 녹음하고 5,000회가 넘는 연주를 이어갔다. 그동안 수많은 연주자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는데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와는 1979년 프랑크와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인상적인 조합을 선보였고, 그 외에도 지휘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Ernest Ansermet)와 귄터 반트(Gunter Wand) 등과 함께 무대에 섰다.

 

후학 양성에도 관심이 많은 리치는 1970년 이후로는 연주보다는 교육에 주력했는데 인대이나 음대, 줄리아드 음악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기교에 관한 노하우를 소개한 《리치 온 글리산도》(Ricci on glissando)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2003년 10월 12일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협회에서 고별 연주를 갖고 75여 년에 걸친 연주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으며 이후 교육에 힘쓰다 2012년 8월 6일 94세의 나이로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라모폰》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리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간 선구자였고 그의 음악은 따뜻함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부고와 더불어 그를 추모하기도 했다.

 

*클래식백과 에서인용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