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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이야기

"두얼굴"- 조중걸(탄사모)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09. 12. 27. 14:41

 

 *이글은 탄사모 조교수님의 탄노이 동호회 란에 올린글을 모아 편집한것 입니다.

 섬세한 감성으로 탄노이의 모든것을 파헤쳐 많은 매니아들의 호평을 받은바 있습니다.

 또한, 현재 내가 운용하고 있는 tannoy 시스템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조언과 아끼던 기기까지 양도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좋은음악 품격높은 소리를 들을수있게 해주신것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두 얼굴

탄노이 오토그래프는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 경험에 비추어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단순히 유저들이 제대로 된 앰프를 매칭하지 않을 때에만 탄노이는 이상한 스피커가 되고 맙니다. 우선 탄노이는 앰프를 상당히 가립니다. 이것은 비단 탄노이만의 성향이 아니고 영국 계열 스피커들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ATC나 하베쓰 등의 영국 스피커들은 모니터적인 성격이 강해서 소스와 앰프의 명령에 매우 수동적으로 응합니다. 그 스피커들은 성격이 이를테면 시냇물처럼 투명합니다. 더하여 탄노이 모니터 시리즈들은 매우 예민합니다. 다른 시스템으로는 별 불만 없이 듣던 소스들도 일단 탄노이에 걸면 도저히 못 들을 정도로 녹음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동시에 악마의 얼굴도 가진 걸까요?

관념은 경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고 다음의 주장들은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치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저는 상당히 만족스럽게 - 자기만족일지 모르겠습니다만 - 탄노이를 울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탄노이는 유럽계의 3극 직렬관과 잘 어울립니다. PX4, PX25, Ed, RE604 등을 사용한 파워 앰프에 매칭하면 가슴에 스미는 듯한 감동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RE604를 제외한 다른 관들은 싱글로도 충분히 탄노이를 울립니다. RE604의 경우 PP나 파라싱글이라야 가능합니다. 300B 싱글의 경우도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300B를 싫어하는 것은 제 취향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PX25라 싱글일 경우가 제 경험상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어떤 애호가의 경우 PX25에 대해 심한 악담을 퍼붓습니다. 멍청하다고 하죠. 그러나 제 경우에는 아마도 제 자신이 PX25보다 더 멍청한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좋았습니다. 특히 벌룬관일 경우에는 더욱 좋았습니다. 우선 대역이 넓고 밸런스가 좋습니다. 그리고 음색은 부드럽고 침착하고 관대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에 스미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초연하고 의연한 음이면서도 감동적이라는 것이 이상하기조차 했습니다.

두 번째로 조심할 사항이 있습니다. 5극관이나 빔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자신 WE350B PP(124B, 142C)를 사용하고 있는 바 별 다르게 매혹적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부드럽고 푸근한 맛은 있지만 탄노이 모니터 시리즈의 그 매혹적인 섬세함을 끌어내지는 못합니다. 이 경우야말로 진짜 멍청한 경우죠. “상관없다. 난 백치미가 좋다.”라고 주장하신다면 이 경우도 괜찮긴 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 5극관은 오히려 알텍이나 독일계의 혼 스피커에 더 잘 어울립니다.

저는 오랫동안 탄노이를 사용해왔고 현재는 15인치 블랙, 12인치 레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읽으신 분들이 마땅치 않다고만 하지 않는다면 차례로 제 경험을 올리겠습니다.

포노단은 어떻게 쓰는 경우가 좋은지, 라인 스테이지는 어떤 형식일 때 가장 좋았는지, 또 다른 3극관들은 어떠했는지 등을 차례로 올리겠습니다.

듣다보면 탄노이에 대해서 별별 이상한 평론이 난무합니다만 그 평론대로라면 이것은 완전히 도깨비 같은 스피커가 되고 맙니다. 제인 오스틴이 전쟁소설에는 형편없는 작가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면 탄노이는 재즈나 록에는 멍청한 스피커라고 말하는 것도 타당성이 있겠죠.
탄노이 애호가들의 기질은 대부분 점잖고 약간 수줍어하고, 섬세하고, 직설적이지 못하고 조심스럽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이 어느 분 마음이라도 상하게 하지 않았는지 걱정됩니다.

 

두 얼굴 2

저의 집 가족은 한결같이 애견가 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집에 강아지가 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종류도 다양했고 성격도 다양한 녀석들이 었습니다. 진돗개, 도베르만 핀세르, 세퍼드, 리트리버 등등...
강아지를 기를때의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사랑스러운 교태, 무한한 충성심,외로움을 잊게 만드는 동지감.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가장 큰 즐거움은 단지 기쁨이라고만 하기에는 좀 서글픈 느낌이 드는 감정에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것이야 말로 강아지를 기를 때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강아지는 모든 것을 주인에게 내맡깁니다. 그 녀석의 행,불행과 생사는 전적으로 주인에게 달린 것이지요. 강아지들은 주인의 사랑을 조급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홀대 받을 수도 있다는것, 심지어는 버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도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피조물에 대하여 가슴아픈 측은지심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아무리 애써도 운명의 순간은 결국 다가옵니다. 그 녀석이 그토록 즐거워했던 외출이 이제 영원을 향한 이별로 이어집니다. 단 한번의 주사와 무겁게 닫히는 눈까풀이 이제 몇 달간의 우리 가족의 슬픔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다른 어떤 강아지도 필요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 개-노란털과 가슴의 흰색 곱슬 털, 멍하게 뜬 눈의 우리 그 개만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이지요.
골든 리트리버,잉글리시 십독, 보더 콜리 등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견종입니다. 이 개들은 대체로 공유되는 몇 가지 성격을 지닙니다. 너그러움.소박함, 차분함, 수줍음, 온순함, 맹목성(주인을 향한), 영리함 등등. 행복하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개들이지요,. 저는 캐나다에 살때, 보트를 타고 놀러나간 주인님을 선창에서 하루 종일 호수만 바라보며 기다리던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를 기억합니다. 저는 하루종일 거기서 낚시를 했거든요. 도대체 그 주인님은 어떤 사람일까요. 친구들과의 흥겨운 놀이 때문에 자기 개 조차 잊은 걸까요. 이 충실한 개는 음식도 물도 먹지 않은 채로 하염없이 보트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스름해져서 떠들석하게 주인님의 보트가 선창에 돌아올때까지요. 우직하고 사랑이 많은 개지요.
독일인들은 도베르만 핀세르, 로트 바일러, 세퍼드, 포메라니안 등을 좋아 합니다. 그 개들은 한결같이 날카롭고, 매섭고, 정확하고, 직설적이고 정교하고 신경질적입니다. 세퍼드 같은 경우는 온몸이 신경 으로 만들어진 견종이라는 말까지 듣지요.이 독일 견종들의 민첩성과 정확성은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 였습니다. 영국 견종들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인과 함께 있을 때에만 존재 의의가 있지요,. 반면에 독일 견종들은 주인과 상관없이 독자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 양국의 이러한 차이가 스피커에도 정확히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탄노이는 정교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 물리적 스펙도 거의 엉망이지요. 탄노이의 저음부는 심지어 애매한 통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일 스피커에는 도대체 백 로디드 (back- loaded)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면으로 향하는 유닛이 모든 대역의 소리를 내지요. 물론 자이스 이콘 같은 경우에 저음부를 아랫쪽으로 내도록 인클로저를 만들기도 합니다만 그 경우도 위상이 달라진 저음은 아닙니다.
원칙과 질서와 정교함을 사랑하는 독일인들의 기질이 오디오 기기에도 반영됩니다. 독일 앰프들의 만듦새는 숨이 막힐 적도로 치밀함니다. EMT 턴 테이블보다 회전수가 정확할 수 있을 까요. 지멘스의 앰프들 만큼 완벽한 밸런스가 있을까요.
다행인 것은 우리 자신은 기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정교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 빈듯하고 멍청하고 어리숙한 것이 좋습니다. 거기에는 푸근함과 따스함이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 미지의 우주와 인간이라는 심연이 정교함 만으로 해결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탐험도 하지 않은 땅의 지도를 그릴  수는 없지 않은가요.


탄노이 스피커는 정확한 선율의 표현 이상으로 화음의 표현을 중시합니다. 에이징이 잘된 인클로저와 좋은 특성을 지닌 앰프와 동시에 매칭되었을 때에는 마치 인클로저 전체가 춤을 추는 듯하고 온 집안을 음악적 화음으로 가득 채웁니다. 음악적 분위기가 뭉게구름 처럼 피어나지요. 즉 탄노이는 선적이라기 보다는 회화적이고,피렌체적이라기 보다는 베네치아 적이고 지적이라기 보다는 감성적이고 소묘적이라기 보다는 채색적이라고 해야 겠지요.

독일계열 스피커들은 이러한 탄노이의 특징들과는 정확히 상반됩니다. 벨런스가 정확하고. 멜로디가 날카롭고 선명하게 뻗어나옵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사랑은 역시 원칙론적이고 정확한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우리같은 바보 에게는 해당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취향의 문제 입니다. "취미판단에는 구속력이 없다"라는 것은 칸트의 유명한 금언입니다만 우리 조상들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어쩔 수없고,동냥집 첩도 제 좋으면 어쩔수없다."
제가 유럽에서 공부할 때 제 독일 친구와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겪은 제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마음대로 쓴 글을 닫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남부 유럽사람들은 좀 그렇습니다. 우리가 식당에서 바가지를 뒤집어썼습니다. 주문도 하지 않은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서비스로 알고 먹었고,요금이 청구된 것입니다. 약2만리라(1만원)정도. 제 졍교한 독일 친구는 분개했습니다. 그리고는 도베르만 핀세르처럼 해결해 나갔습니다. 먼저 경찰에 연락하고 정식으로 고소한 것이지요. 하루에 1인당 10만원이 드는 여행이었는데 그 만원 때문에 2박3일을 이탈리아의 시골 구석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그 놈의 빌어먹을 독일 정신 때문에. 여러분 원칙과 정확함이 정말 지혜로운 것일까요.저는 되는 대로 타협해서 살겠습니다. 영국적 어리석음에 한국적 융통성을 뒤섞어서요.그 후에 사귄 독일 친구는 없습니다. 기계나 법조문과 친구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요.

 

두 얼굴 3

<이상적인 오디오>에 대한 개념은 각자가 다릅니다. 그런데 어쩌면<개념>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리에 관한한 생각보다는 <느낌>을 따라가니까요. 우리의 감정 중 느낌처럼 애매한 것도 없고 느낌처럼 자기 주장이 강한 것도 없습니다. “느낌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미치광이이다”라고 어느 현인께서 말씀하셨다는데 바로 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에 관한한 저는 구별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란 실상 하나의 안타까움인데, 어떤 애호가들은 느낌(취향)의 차이와 우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못한다?)는 것입니다. 강호에는 노이만이나 윌리엄슨이나 마란츠 보다도 대단한 사람 많습니다! “싱글이래야지. 푸시풀 듣는 것도 귀라고 할 수 있어?”라거나“3극 직렬관이래야지. 5극관이나 빔관은 갖다 버려야 해 (부디 저한테 버려 주십시오)”라는 말씀을 아주 쉽게 하십니다. 빔관에 푸시풀도 즐겁게 듣는 제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씀이십니다. 네 귀는 <막귀>라는 말씀에 다름아니지요. 한 달쯤 전에는 3극관 싱글 애호가께서 무려 한시간에 걸쳐 그 구성의 우수성에 대하여 끝없는 설교와 설득을 하셨습니다.

나쁜 푸시풀 앰프가 있을 것이고 나쁜 5극관이 있을 뿐 아닌가요? 또 좋은 싱글 엔디드 회로와 좋은 3극 직렬관이 있을 뿐이라고요. 어떤 분은 ‘3극 직렬관은 숯불구이이고 빔관은 삶은 고기( 혹은 프라이팬 고기)’라고 멋진 비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삶은 고기도 좋아합니다. 암(癌) 걱정 안 해도 되고 부드러우니까요. 알텍당 당수께서도 6L6에 알텍을 물려 듣고 있는 것을 저는 압니다. 좋더군요. 정말이지 나름대로 좋습니다! 유연하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고 푸근합니다.

화류계 생활 33년에 스쳐간 기기도 숱하게 많은데 (날린 돈도 많고요) 저는 아직까지도 지조도 줏대도 없는 인간입니다. 섬세하게 살랑거리는 3극관 싱글이 좋다가도 갑자기 잔변감이 들기도 합니다. 푸시풀의 시원하게 내지르는 호쾌함이 그립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무지막지해서 싫고요. 기호만큼 변덕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근래에 강남 사람들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들처럼 많이 씹힌 사람들도 없습니다만, 아마 탄노이 스피커처럼 많이 씹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심지어는 강남 사람들하고 탄노이가 같이 묶여서 씹힙니다. 공부 많이 하고 강남 살고 탄노이 듣는 사람은 이제 트리플로 씹히는 겁니다.

<윤**>씨의 <소리의 **>이라는 책에서는 탄노이 스피커에 한 챕터를 할애하는데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탄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 탄노이 웨스트민스터에서 훨씬 성능이 뛰어난 와트 퍼피로 바꾸었을 때 왜 이렇게 가난해졌느냐는 위안의 설 …… 한때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에는 한 집 건너 하나씩 탄노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이 멋진 스피커로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강남 사람들하고 탄노이 듣는 사람들은 하릴없이 속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특정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무차별폭격을 가해도 되는 건지…… 고 민**선생께서 탄노이를 비판한 것을 필두로 탄노이는 귀가 트였다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의 비판 대상입니다. 그런데 윤**씨께 한 가지 궁금한 사실이 있습니다. 와트 퍼피가 탄노이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혹시 본인의 느낌을 사실로 바꿔 놓은 것은 아닌가요? 어떤 근거로 와트 퍼피가 탄노이보다 더 뛰어난 걸까요? 혹시 더 비싸다는 애기를 이렇게 바꿔서 말한 것은 아닌가요?

탄노이와 와트 퍼피를 비교하는 것은 김치와 피자를 비교하는 것 이상으로 웃기는 애깁니다. 탄노이와 와트 퍼피는 음악에 접근하는 태도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거죠. 음악과 재현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이제 새로운 개념이 싹트고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전통적인 악기로 연주회장에서 실연되는 것이고, 오디오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그 연주의 재현이죠. 이 경우 오디오 기기가 필요한 이유는 매일 연주회장에 다닐 정도로 돈이 많지도 한가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음악은 컴퓨터로 합성된 인공적 음향과 스튜디오 녹음 등을 포함합니다. 이 경우 음악은 어딘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됩니다. 마치 칸딘스키나 말레비치가 자연을 그리기보다는 그들 내면을 그린 것과 같고, 영화 <가위손>이 몽상을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 것과 같죠. 음악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고 이 새로운 정의 하에서는 도대체 고유 명사적 음악이란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포스트 모던의 물결이 음악에 있어서는 이렇게 성립된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에서 들리는 소리가 연주회장의 소리보다도 더 박진감 있고 더 다이나믹해서 마치 오디오의 소리가 실체이고 연주회장의 소리가 모방된 소리라는 섬찟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느낌이 포스트모던의 시작이죠. 아마도 다음 시대를 선도할 창조적 음악의 출발점은 여기가 되겠죠.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오스카 와일드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통파입니다. 저에게 있어 음악은 휴식이고 위안이고 즐거움이고 센티멘탈리즘입니다. 이것이 저의 수준입니다. 소외감 때문에 몸을 떨고 하늘엔 보잉 747기가 굉음을 내고 있는 이 시대에 저는 한심하게도 현실의 고달픔에서 음악 속으로 도망가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시대정신 속에 살고 있습니다. 헤비메탈과 하드코어나 여러 실험적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죠.

스트라빈스키로부터 시작해서 힌데미트 등을 거쳐 존 케이지와 백남준에 이르는 계열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현대 하이엔드 기기들은 바로 이러한 음악에도 부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대음악과 대중음악은 그 도구로서 다양한 음악적 악기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거기에 부응하는 오디오 기기들도 광대역의 빠른 응답 특성을 가져야 하고 엄청난 해상력과 임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탄노이는 그중에서도 특히 모니터 시리즈는 반면에 전통적인 음악적 개념에 부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연주회장에 앉아 있듯이 탄노이 앞에 앉아 있을 것을 가정한 것이지요. 탄노이는 전통적인 악기 소리를 잘 재현해내고 또 전쟁시에 사용되었을 때에는 가짜 대포소리를 잘 내면 되었습니다.

탄노이에 대한 비판 중에 가장 큰 것은 탄노이는 저역에서 뭉친다는 것입니다. 저음부의 악기들이 생생하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연주회장에서의 저음입니다. 우리가 연주회장에 앉아있으면 음향은 일단 하늘로 올라갔다가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직선으로 뻗는 소리는 연주자가 자기 연주 소리를 들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정위감이라는 것을 ‘연주회장의 전면에서 수동적으로 음악을 들을 때’라고 가정한다면 이 경우 정위감은 완전히 희생됩니다. 하이엔드 기기에서 느끼는 정위감은 사실상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단 긴 혼이 달린 스피커나 멀티웨이의 스피커들은 정위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정위감은 오로지 풀레인지나 동축형에서 가능합니다. 사실상 탄노이가 정위감에 있어서 가장 정확한 스피커 중 하나라는 것이죠. 우리가 멀티웨이, 멀티스피커에서 시끄럽다고 느끼고, 탄노이에서 단정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이유입니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왜 그런가 하는 것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주회장에서는 저음부가 애매하고 희미하게 뭉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저음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연스러운 태양광은 애매한 주광색인 것과 같습니다. 태양광을 스펙트럼으로 분석해 놓았을 때 그것이 진짜 햇빛인가요? 낱낱의 저음부 악기가 제각기 자기의 음을 선명하게 우리에게 전달해야 한다면 - 와트 퍼피는 그것을 잘합니다만 - 그것이 멋지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연주회장 소리는 아닙니다. 이것은 와트 퍼피가 더 나쁘고 탄노이가 더 낫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지 제작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죠.

사실상 ‘정위감’이라는 용어도 애매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위치에서의 정위감이 진정한 정위감인가요? 연주회장의 전면인가요? 아니면 측면인가요? 연주자들 사이에서 음악을 듣는다고 가정한다면 놀랍게도 동축형보다도 오히려 멀티스피커가 더욱 훌륭한 정위감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암스테르담의 콘서트헤보우 홀에서 <비창>을 들은 적이 있는데 뒤쪽 좌석이었습니다. 거기가 C석이었습니다. 탄노이보다는 차라리 린(Linn) 아이소바릭 스피커에 가까운 소리가 나더군요. 린 스피커는 우퍼 하나의 위상을 하늘로 향하여 반전시키니까요.

‘결국 어떤 기기가 좋은 것이냐’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듣고자 하는 음악과 내가 앉고자 하는 좌석과 내가 느끼고자 하는 음색에 비추어 내게 가장 알맞은 기기가 무엇인가?’ 저는 개인적으로는 클래식을 듣고자 하고 R석에 앉고 싶고 간결하고 단정하고 차분한 음색을 원합니다. 그래서 탄노이가 좋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다른 스피커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탄노이를 택합니다. 약간은 구슬픈, 튀지는 않지만 스미듯이 다가오는 예쁜 고음, 삶의 영고성쇠를 다 겪은 듯한 차분함을 지니는 중음, 온화하고 포용력 있는 저음 등은 탄노이에서만 만족스럽게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더하여 음색과 분위기가 동시에 만들어내는 고풍스럽고 품격에 넘치는 화음 등은 제 경험상 탄노이에서만 가능했습니다. ‘은회색의 그을음’이라는 문학적 수사가 사용되는 바로 그 음색이죠. 결론적으로 탄노이에 대한 저의 사랑은 탄노이가 지닌,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물리적 성격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죠. 탄노이와 동일한 성격을 지닌 어떤 스피커도 내지 못하는 탄노이 고유의 음 -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음 - 그 음색에 있는 것입니다.


두 얼굴 4-a
탄노이사에서는 애초에는 인클로저(이하‘통’이라고 하죠)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단지 설계도만을 제시하였죠. 탄노이사가 1949년도에 런던 CES에 출품했을 때에도 15인치 블랙 유닛만을 내보냈습니다. 탄노이사가 적극적으로 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53년에 15인치를 위한 오토그래프를 뉴욕 CES에 출품했을 때부터입니다. 탄노이사가 직접 만들거나 설계도 만을 제시한 것을 다 합치면 통의 종류는 13가지가 됩니다. 많죠?

그러나 이 13개의 통들은 사실은 세 가지 통의 변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세 가지는 우선 미로형 (오토그래프, 메모리...) 저음 반사형(일부의 코너요크, 벨베도르, 랑카스터...) 밀폐형 (10인치 북셀프형, 일부의 코너요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7가지 통을 사용한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15인치 오토그래프와 12인치 저음 반사형(측면개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닛의 종류에 따라, 유닛의 크기에 따라, 통의 형식에 따라 매칭되는 파워 앰프의 출력과 회로와 프리앰프의 양식이 모두 달라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경험상 중요한(거의 결정적인)사항이었습니다. 제가 이 조합에서 경우의 수를 따져 보니 무려 54개였습니다. 어찌할까요. 제가 54편의 <두 얼굴>을 쓸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애초에 계획한 것은 20회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먼저 밝히겠습니다. 우선 놀랍게도 탄노이는 같은 형태의 통일 경우 12인치 블랙이나 12인치 실버가 15인치 블랙이나 15인치 실버보다 출력을 더 요구하고 볼륨도 더 먹습니다. 10인치 레드 밀폐 형으로 갈 경우 최소 출력이 10W나 됩니다. 고운 소리를 얻기가 힘들죠. 왜냐하면 같은 조건일 경우 낮은 출력일수록 더 고운 소리가 나니까요. 가령 발보 Aa는 0.2W의 출력을 냅니다. 푸시풀일 경우 0.7W 정도지요. 그러나 그 소리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애교스럽고 예쁜 소리가 납니다.

발매 당시에는 15인치의 가격이 159$였고 12인치의 가격이 139$였습니다만, 지금은 어느 경우에나 15인치의 가격이 12인치 가격의 거의 두 배에 이릅니다. 이 이유는 말씀드린 바대로 15인치의 소리가 더 곱기 때문입니다. 상식과는 상반됩니다. 이것은 탄노이의 모든 경우에 해당됩니다. 일단 논의를 모니터 시리즈에 한정시킬 때, 같은 통일 경우 작은 유닛이 큰 유닛보다 더 큰 출력을 요구합니다. 15인치 레드가 12인치 레드 보다 출력을 덜 요구하고, 12인치 레드는 10인치 레드보다 출력을 덜 요구합니다. 또한 같은 통일 경우 저음 반사형-오토그래프-밀폐형의 순서로 출력을 더 먹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조합을 통틀어 15인치 블랙 저음반사형이 가장 출력을 덜먹고 10인치 골드 밀페형이 가장 출력을 많이 요구합니다. 예를 들면 15인치 블랙의 경우 4W정도면 제법 만족스럽고 8W정도면 이제 충분합니다. PX4 푸시풀일 경우 볼륨 올리기가 겁납니다. 아래층에서 뛰어 올라옵니다.

탄노이는 통 울림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특히 오토그래프는 3m나 되는 긴 미로를 사용하여 저음부의 위상을 반전 시킵니다. 이것이 음의 왜곡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듣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가짜 소리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는 두 개의 변명을 해야겠습니다. 연주회장에서는 저음부 악기를 뒤쪽에 배치시킵니다. 저음부 악기들은 오케스트라에 있어서는 화음을 담당하는 보조적 입장에 있게 됩니다. 주선율과 보조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들을 화음으로 싸는 것이 목적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연주회장에서는 주선율이 우리 귀에 먼저 도착하고 화음이 천천히 도달합니다. 그러나 마이크 녹음에서는 이러한 시간차가 없습니다. 공중에 매달린 마이크가 동시에 녹음하기 때문에 시간차가 없지요. 이것을 전면으로 향하는 유닛이 재생한다면 모든 대역의 악기가 동시에 소리를 내는 것이 됩니다. 탄노이는 시차를 둬서 저음부의 소리를 천천히 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미로를 사용하여 위상을 반전시킨 겁니다. 커다란 도전에 대하여 대단히 창조적으로 대응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인클로저 자체를 유닛의 세 번째 부분으로 만든 겁니다.

그렇게 되어 탄노이는 전 대역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탄노이는 대역의 분리라는 선명성을 희생시키고 화음과 실제연주라는 이득을 취했습니다. 독일계열 스피커에 심취해 있는 분들은 탄노이 소리를 듣고는 ‘마치 막이 끼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만, 탄노이도 벗겨놓고 들을 수 있습니다. 누드 스피커라고 장난스럽게 부르는 그것이지요. 독일 계열 스피커들은 어차피 누드고요. 이 경우 탄노이 소리는 제 경험상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유닛보다도 선명합니다. 다른 유닛들은 스피커라고도 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물론 연주회장 소리는 아니지만요. 독일 스피커처럼 평판에 부착시키면 독일 스피커에서 얻는 선명성에 탄노이특유의 화음도 어느정도 얻게 되지요. x-ray로 뼈만 찍어 놓으면 그것이 인간일까요? 근육과 지방과 털이 붙어 있어야 진짜 인간 아닌가요? 탄노이에는 옷을 입힙시다! 저는 먼저 피아노를 직접 연주해서(쇼팽의 C# minor Waltz 였습니다.) 독일 매니아께 들려주고, 옷 입힌 탄노이를 들려 주였습니다. “자 진짜 피아노 소리지요!”

왜곡? 이것이 왜곡일까요? 도대체 이런 단어를 배짱 좋게 사용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용감한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다 같이 어리석은 중생이어서 자기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지도 않은 채로 짖어댑니다. 소크라테스가 개탄한 바로 그것이지요. 이렇게 보자면 저도 훈장 짓 그만두고 산으로 은퇴해야 합니다.  

왜곡된 음이 있다는 것은 왜곡되지 않은 실제적 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실체적 음>이란 것은 신기루입니다. 실체적 음이란 아마도 음향의 매개체 (악기)에서 나오는 바로 그 소리를 말하는 것일 테지요. 그러나 ‘듣는다’ 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음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란 곧 인식’ 인 것이지요. 그러면 악기 전방에서 듣는 소리가 실체적 인가요 아니면 악기 측면에서 듣는 소리가 실체적 인가요? 전방 몇 미터에서 듣는 소리가 실체적 인가요? 80%의 습도에서 듣는 것이 실체적 인가요, 20%의 습도에서 듣는 것이 실체적 인가요? 3m의 천장을 가진 홀이 실체적 음을 내나요, 아니면 5m의 천장을 가진 홀이 실체적 음을 내나요?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관련해서 더욱 큰 문제가 발생 합니다. 행복할 때 들었을 때가 실체적 음인가요, 아니면 슬플 때 들었을 때가 실체적 음인가요? 배고플 때 들었을 때와 식사 후에 들었을 때 사이에도 차이가 큽니다. 오줌 마려서 미치겠을 때 연주 회장에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바이올린의 비브라토가 마치 방앗간 모터 소리보다도 더 듣기 싫었습니다. 실체적 음인가요? 도대체 <실체> 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요? 이제는 법에서 조차도 실체적 진실을 포기하고 <절차적 진실>만을 다룹니다. 저는 여러분을 끌고 <철학적 인식론>이라고 이름 붙은 그 지저분하고 찜찜한 늪으로 들어가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실체적 음의 개수는 음악 매니아의 머리 수 만큼이나 많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매트릭스>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삶 전체가 지극히 주관적인 허상적 존재인 것이지요. 우리 삶과 그 인식이 이와 같을 때 우리의 사랑하는 오디오 기기 역시도 하나의 왜곡된 세계를 우리 앞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오디오는 환각과 왜곡의 매개체인 것이지요. 여기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단지 우리의 취향일 것입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왜곡은 어떤 종류의 왜곡이냐 이지요.

더 좋은 탄노이와 더 나쁜 탄노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잘 관리 되지도 잘 튜닝되지도 않았을 때에 나쁜 탄노이가 되는 것은 불가피 합니다. 그러나 탄노이가 나쁘거나 기타 스피커가 좋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탄노이는 탄노이 일 뿐이고 와트 퍼피는 와트 퍼피일 뿐입니다. 탄노이는 우리가 마치 연주 회장의 중간쯤에 앉아 있고 아마도 50%의 습도쯤되는 날씨 속에서 듣는 표준적인 소리를 기준으로 왜곡을 감행했을 것이고, 여기에서 블랙은 90%쯤 성공했고 레드는 80%쯤 성공했을 것입니다. 와트퍼피는 재즈바의 열기띤 연주자들 사이에서 스스로 흥겨워 하는 분위기를 시도 했고 역시 80% 쯤 성공한 것 같습니다. 멋진 스피커지요. 단지 제 취향이 아닐 뿐입니다. 와트퍼피를 수입하시는 분의 취향은 저와는 상반되겠지요. 상황이 이러하니 취미 판단과 관련된 모든 언급은 조건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그 중 가장 큰 조건은 <내 취향에 비추어...> 라거나 <내가 듣고자 하는 음악에 비추어...>라거나 <재즈를 듣기에는...> 등등일 것입니다. 탄노이에게서 구해야 할것을 와트퍼피에서 구하거나 혹은 그 반대 일 때에는 이제 우리의 오디오 인생은 망가지는 것이지요.

탄노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역과잉이라든가 벙벙거린다거나 하는 비난을 듣습니다. 탄노이 모니터 시리즈는 본래 가정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아파트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탄노이는 초기에는 100% 영국 정부 조달청에 납품되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것을 주로 공공기관에서 사용했고 외국 정부에 수출했습니다. 탄노이는 영국 하원, UN 본부, 인디아의 뉴델리 국회, 버킹검 궁 등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인도나 호주 등의 영연방국가에서 매끈한 블랙들이 발견되는 일이 있는데 원래 조달청 소유였던 것이지요.

탄노이사 에서는 50년부터 가정을 위한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12인치 모니터 블랙입니다. 그때에는 이미 15인치 블랙은 실버로 바뀌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12인치에 있어서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블랙은 없습니다. 저는 바로 얼마 전까지 12인치 블랙을 갖고 있었는데, 15인치 블랙과 비교해 보면 음색은 상당히 달랐고 오히려 15인치 초기 실버 소리와 같았습니다. 우습게도 12인치 블랙이 15인치 블랙보다도 더 큰 출력을 요구합니다. 볼륨도 더 먹습니다. 사실은 실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터무니없이 비쌀 이유가 없지요. 가치가 아니라 상업주의가 가격을 결정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12인치조차도 가정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컸고 너무 비쌌습니다. 당시 맨허튼의 대 저택이 800불이었을 때 12인치 한 조각이 139불 이었습니다.

만약 천장이 성당처럼 높고 면적이 상당하다면 탄노이의 벙벙거림은 역시 연주회장의 저음부 소리와 흡사 합니다. 소위 말하는 홀 톤인 것이지요. 예일 대학의 대형 강의실에 탄노이 오토그래프 실버가 모노로 있었는데 정말 멋진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문제는 탄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의 조건에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오디오 해결책이 있을까요?

먼저 5cm 정도의 대리석을 스피커 밑에 깔면 상당히 개선됩니다. 저는 총각시절 (그리워라) 에 깔아 본적이 있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연주 회장에서는 보통 피아노를 부양시키는데 그건 효과인 셈이지요. 집안에 돌멩이 들어오는거 싫다는 마누라 주장에 제 탄노이는 그냥 벙벙거리고 있습니다. 대리석이 무겁고 번거롭다면 실리콘 매트도 상당한 두께만 있다면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대리석 보단 못하지요. 그러나 그 경우 탄노이 특유의 목질의 부드러운 울림은 희생됩니다. 소리가 딱딱해지지요. 콜라도 마시고 돈도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해결책은 놀랍게도 스피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라인 스테이지에 있습니다.
제 경험상 저음부의 지저분함은 상당부분 시원찮은 프리앰프 때문에 발생합니다. 탄노이의 벙벙거림은 저음부의 위상 반전이 한 원인일 수 있습니다. 라인단이 시원치 않을 경우 응답특성이 느려지고 나중 나오는 고음과 중음이 앞서 나가야할 저음에 참견합니다. 이 경우 악마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저음부가 제대로 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라인단의 3극 직렬관과 트랜스매칭은 필수입니다. 저는 마란츠7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 경우 언제나 이러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오토그래프와 마란츠7의 라인단은 미스매치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 해결책은 잘못하면 돈이 많이 들게 됩니다. 3극 직렬관을 더블게인으로 트랜스 매칭시키면 대리석조차도 필요 없게 됩니다. 즉  입력트랜스 - 증폭관 - 인터스테이지 -증폭관 -출력트랜스 의 구성을 지닌 라인 스테이지면 저음부가 훌륭해 집니다. 만약 적절히 준비하고 많은 공부가 있으면 150만원 정도의 부품 값으로 자작할 수 있습니다. 포노부는 70만원 정도로 가능하고요. 마란츠 신형보다 적게 듭니다. 이것을 어떻게 제가 여러분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드릴 수 있을까요? 선량하고 품위있는 탄노이 애호가들을 만나는 것은 저에게 있어 인생의 큰 기쁨이 되겠지요. 언젠가는....

두 얼굴4-b
저와 절친하게 지내는 한 독일 오디오 애호가께서는 탄노이 스피커에 대하여 ‘마치 음악이 장막을 통하여 들리는 듯 갑갑하다‘ 고 하십니다. 여기에 대하여 저는 ‘그래도 바로 그 소리가 연주회장 소리’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모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대단한 음악 평론가께서 연주회장에서 ‘소리가 갑갑하다’고 하시는 것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분 역시 독일 스피커를 쓰고 계셨습니다. 저는 또한 제가 알고 지내는 한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어떤 때는 자신의 연주 자체가 자기에게 고역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분은 탄노이 애호가 이십니다. 이러한 예의 백미(白眉)는 다음과 같은 일화입니다. 한 독일 기기 매니아가 저희 집에 놀러 오셨습니다. 저는 마누라에게 피아노 한 곡을 부탁했고 우리는 감상했습니다. 그 독일 매니아 왈, ‘오디오가 확실히 대단한 거야.’ 저는 웃음을 참느라고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진짜 주화 두 개로 가짜 주화 한 개를 만드는 한심한 위조범보다 더 한심한 감상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무엇일까요?

독일과 영국은 스피커의 제작에 있어 완전히 상반된 접근 태도를 지내고 있습니다. 독일 기기들은 음원자체에 집중합니다. 즉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우리 귀에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 경우 악기 소리가 우리 귀에 그대로 들어옵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유이지요. 영국은 음악을 듣는 감상자에게 집중합니다. 즉 악기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음 이상으로 그것을 듣는 우리 귀에 맞도록 스피커를 튜닝하는 것이지요, 음원에서 애초에 나오는 음향은 그 끝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공기를 타고 파동으로서 우리에게 다가 올 때 부드러워 지는 것이지요. 자신이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를 들어보면 그 소리는 확실히 독일 스피커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상하는 입장에서 좀 떨어져서 연주를 들으면 음 끝의 날이 상당히 동글동글 해 집니다.

독일 기기의 애호가들은 오히려 독일 스피커가 부드럽다고 느끼고 탄노이가 갑갑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양념된 갈비를 먼저 먹을 경우 생고기를 도저히 먹지 못합니다. 밋밋하지요.
둘 다를 먹고 싶을 경우 주물럭 다음에 양념갈비를 먹어야지요. 일단 혀가 자극에 익숙해지면 자극적이지 않을 경우 무미건조 해지지요. 강아지의 경우에도 개밥만 주는것이 서로에게 편안하고 바람직한 것이 됩니다. 일단 사람들이 먹는 강한 소오스의 입맛에 길들여진 강아지들에게는 자기네 사료가 너무 맛이 없지요. 그 강아지들은 인간이 걸리는 대부분의 성인병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변도 지독히 냄새나는 것을 봅니다. 변 치우는 것이 가족간에 불화의 씨앗이 됩니다. 인간 역시도 건강을 생각한다면 대구 매운탕 보다는  대구 지리를 택하는 것이 낫지요. 악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 악기의 강렬한 음향에 노출된 귀는 어쿠스틱 악기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전자 악기가 난리를 쳐야 속이 시원하다고 느끼지요. 불행하게도 모든 향락적 도락은 자극의 상승만을 요구합니다.

탄노이로도 이러한 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인클로저를 엄청나게 두껍고 무겁게 짜고 그 안을 솜으로 채우면 됩니다. 그 경우 음 끝이 날카로워지고 선명해 집니다. 이제 양념갈비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화음은 포기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탄노이를 듣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제게서 필드형 클랑필름을 가져간 B모씨입니다. 탄노이는 곧장 쫓겨 나갔지요. 생긴 대로 살아야 했던 건데 자기 자신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독일 스피커가 훨씬 맞는 사람이었지요.

독일 사람들은 우리 외부 세계에 어떤 객관적 실체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인식과는 독립되어서 홀로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엄정한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관념론적 실재론이 특징적으로 독일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영국의 흄이 외부 대상의 객관성을 공격했을 때 악착같이 버텨본 사람도 사실 독일인인 칸트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뼛속까지 경험론자 들입니다. 윌리엄 오캄 - 존 로크 - 죠지 버클리 - 데이빗 흄 - 러쎌 -비트겐슈타인 -오스틴 에 이르는 경험론적 전통은 영국인의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기질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영국인들은 객관적인 존재를 부정합니다. 모든 지식은 상대적인 것이고 인식주체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보는 것만이 믿는 것이다>라는 주관 관념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차이가 음향기기의 차이를 불러온 것 같습니다. 음원에서 나오는 소리를 가감없이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과 그 소리야 어떻든 우리가 듣는 바로 그 음을 중시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경험론자입니다. 바이올린 소리가 원래 어떻든 그리고 엘리 아멜링의 목젖이 어떻게 진동하든 별 관심 없습니다. 저의 오디오는 “R석에 앉아 있는 나” 라는 환각을 저에게 심어주기만 하면 되고 이것이 제가 탄노이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 인 것처럼 “제 귀의 한계가 음의 한계” 인 것입니다.

엔지니어들은 트랜스 매칭 방식은 소리의 대역을 좁히고 음에 비음(nasal sound)을 섞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마 90% 이상의 엔지니어들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는 무한소의 임피던스를 무한대의 임피던스로 받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지요. 그들은 도대체 실연을 들어본 사람들인가요? ‘있는 그대로의 음’ 이란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제 개인적인 경험은 오히려 LCR방식의 포노단 - 입출력 방식의 라인단 - 입출력 방식의 파워앰프로 연결될 때 실제 음에 가장 가까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듣지도 못하는 초고역, 초저역이 있어야만 있는 그대로의 소리인가요? 탄사모 여러분, 소리를 듣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고 소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바로 여러분입니다. 평론가들이나 엔지니어들이 그것을 대신 해 주지는 못합니다. 기기를 파는 일에는 숍이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트랜스 없이 프리와 파워를 연결해서 듣다가 그 사이에 아웃풋, 인풋 트랜스를 삽입시키면 확실히 음의 열기는 감소됩니다. 음이 명확하지만 부드러워지고 감기 걸린 듯한 소리가 되지요. 그러나 다시 트랜스를 떼어내면 갑자기 사납고 새된 소리가 나온다고 느껴집니다. 기호의 문제겠지만 제 경험상 어쨌든 트랜스 방식이 실연과는 더 비슷합니다.


확실히 트랜스 매칭 방식은 음의 감쇄 -소위 말하는 클리핑-를 감수해야 합니다. 임장감과 날카로운 차가움을 좋아하는 하이엔드 유저들은 트랜스 매칭 방식을 기피해야 합니다. 매킨토시사의 초기 솔리드 스테이트 앰프에는 출력트랜스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반도체 소자의 날카로움을 감쇄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이 경우 역시도 트랜스가 음의 날카로움을 깎아냈던 것입니다.

스피커에 있어서 인클로저의 역할은 앰프에 있어서 트랜스 매칭의 효과와 비슷합니다. 만약 음 그 자체를 듣는다고 한다면 유닛이 내는 소리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귀와 연주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울림이 있습니다. 또 전통적인 양식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우리 탄노이 애호가들은 연주 회장에 앉아 있다는 환각을 갖고 싶습니다. 만약 통울림이 왜곡이고 트랜스매칭이 왜곡이라면, 바이올린이나 기타등의 악기의 경우에도 울림통 없이 막대기에 줄만 묶어서 연주 되어야 합니다. 하기야 센세이션을 좋아했던 파가니니는 자기 지팡이에 줄을 묶어서 바이올린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는 지팡이로 쓰다가 연주회장에서 지팡이 껍데기를 벗겨내고 연주했던 것이지요. 이 경우에는 연주가 아니라 코메디를 했던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센세이션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왜곡과 환각의 존재의의를 인정해야 합니다. 아폴론 신뿐만 아니라 바쿠스도 엄연히 중요한 신이니까요. 환각 자체가 실재(reality)는 아닐 지라도 적어도 환각 없이는 실재가 존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실재가 어떠한 것인지 또 그 실재가 도대체 존재하기나 하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나는 어제 오렌지의 낙원을 꿈꾸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더 이상 오렌지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 꿈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숙면을 방해하는 쓸모없는 것일까요? 현대 정신분석학은 오히려 꿈이야 말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희망에 대한 환각적 성취라고 말합니다. 꿈에서나마 우리의 소원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즉 우리의 무의식이 자기 희망의 충족을 이루지 못할 경우 -우리는 현실 생활 속에서 모두 노이로제의 먹이가 되는 것이지요. 환각 자체가 실재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실재를 가능하게 하는,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다리>인 것이지요.

수영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제 동생은 잠자다 수영했고 머리에 큰 혹을 달기도 했습니다. 멋진 자유형의 결과가 책상다리에 머리를 박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먹는 걸 좋아했던 군 시절의 제 후임병은 온갖 종류의 쩝쩝 소리를 잠꼬대로 실연했습니다. 소리만 들어도 뭘 먹고 있는지 알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머리의 혹과 고참병들의 짜증이 사실은 현실속의 그들의 안위를 보살폈던 것을...   실수체계는 허수의 도움없이 완벽해 질 수 없고, 존재는 반존재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하고, 지젤(Giselle)의 몽환적 2막은 실제적 1막보다 더욱 예술성이 넘칩니다. 그러니 실재라거나 실체라거나 사실(fact)이거나 하는 단어를 너무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말아야 할 노릇입니다. 어쩌면 환각이 실재 일 수 있고 실재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탄노이의 통울림이 주는 환각에 우리 자신을 내 맡깁니다. 그 환각적 통울림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지”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누릴지도 모르는 어떤 행복 이상으로 견뎌내야 할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일체개고>라고 까지 하면 너무도 비관적인 세계관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겪어내야 할 고통이 참으로 많습니다. 누구도 운명을 이길수는 없고 그저 “기쁨이고 슬픔이고 이것도 다 지나가려니”하고 버텨보는 수밖에는 없지요.

제 주위에 제가 사랑하고 또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 할 때마다 이루 형연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 제 가슴을 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도 사랑하고 이렇게도 아끼는 사람들이 허다한 고통과 상실을 어떻게 겪어 나가며 인생을 살아나갈까 라는 두려움과 동시에 그들이 상실 되었을 때에 제가 느껴야 하는 고통도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공포감도 들지요. 저는 누구도 제가 감당해야 할 슬픔을 경감시켜주길 원치 않으면서도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제가 겪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 중 제 자신이 가장 불행할 때 오히려 운명에 감사할 것도 같습니다. <등신불>의 주인공이 소신공양  을 하듯이 말이지요. 그리고 라스꼴리니꼬프가 “나는 그대의 고통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통에 무릎 꿇은 것입니다”고 소냐에게 말하듯이 말이지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공감과 감정이입니라도 생각합니다. 내 자신의 행복한 운명은 다른 어떤 사람이 불행한 댓가이고 우리는 모두 한 뿌리에서 자라나온 여러 나무 일 뿐이라고요. 그러니 어떤 운명의 우연이 어떤 한 그루의 나무를 잘 자라게 하듯이 다른 한 그루의 나무는 도태시키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형제일 뿐 아니라 운명이 바꾸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지요. 제가 사랑하는 한 후배는 불치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침대 한켠에서 멍하니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눈물짓습니다. 침대의 독서등이 흐르는 눈물너머로 마치 태양처럼 떨려 보이지요. 제 후배는 말합니다. “병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 야지요”
그러한 사람에게 어떤 위안과 조언과 충고가 필요하겠습니까. 말없는 공감과 응시외에 다른 것은 없지요.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오곤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유년시절부터 같이 겪어왔던 여러 즐거움들이 언뜻언뜻하며 뇌리를 치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대중반부터 이미 탄노이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탄노이와 우리 우정 사이에는 뗄 수 없는 연상작용이 있는 것이지요. 조물주는 왜 이렇게도 아름다운 피조물들을 만들었다가 그렇게도 무심코 소멸시키는가요. 저는 평생에 걸쳐 나의 그 후배 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예술과 학식과 탄노이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바하의 아리아 몇 소절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들뜬 밤을 보내곤 했었습니다. 탄노이 DMT 10 이라는 스피커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하잘것없는 소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세계의 모든 보물이 거기에 다 모여 있었습니다.

탄노이는 공감과 감정이입의 스피커입니다. 탄노이는 도도하거나 대자적(An Sich)이기보다는 우리와 더불어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는, 듣는 사람에게 음악을 일치시키는 스피커입니다. 저에게 탄노이는 항상 커다란 위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안은 탄노이가 제게 음악을 쏟아냄에 의하여가 아니라 집안을 채우는 부드럽고 조용한 화음에 의하여 입니다. 탄노이의 음악은 의식도 못하는 채로 우리 주위를 둘러싸는 새벽안개와 같은 종류의 것이지요. 즉 스스로 존재하기 보다는 거기에 있는 어떤 존재를 위하여 그 주위를 둘러싸는 그러한 스피커이지요. 이러한 효과는 선율을 명료하게 뽑아내는 종류의 스피커에 의하여는 절대 가능하지 않습니다. 탄노이와 같이 통울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스피커 전체가 하나의 악기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두 얼굴 5-a

오늘은 탄노이의 저역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성함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어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가를 말해 보겠습니다. 역시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권위의 뒷받침이 없습니다. 제가 이리저리 시도해 보니 나름대로의 경험이 쌓였고 거기에 준해 돈도 이리저리 많이 날렸습니다. 목숨을 부지 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알뜰한 오디오 매니아가 되세요. 저는 제 한 몸 희생한 셈 치겠으니까요.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엔지니어들에 대해서도 제 경험과 생각을 말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시스템을 자기네 기기로 갈아 치워야 속이 시원할 그 엔지니어들에 대해서요. 그런데 약간은 따분할 지도 모르는 이야기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참고 읽어주세요.

운동장 한 쪽 끝에서 누군가가 걸어온다고 가정해보죠. 100m쯤 떨어진 곳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 정도라는 것만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이나 초기 크로마뇽인은 멸종했으니까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분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점점 가까워집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입니다. 흔해터진 것이 인간이니 관심 갈 이유가 없죠. 뒤뚱거리는 유인원이었다면 눈이 번쩍 뜨였을 테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친하게 지내는 아무개였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우리가 그 사실을 인지했다고 하지요. 우리가 그 사람을 인지하지 못하고 인지하고의 거리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순식간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인식은 확연히 바뀝니다. 희미했던 그 사람이 갑자기 선명해집니다. 눈과 코와 입 등이 선명하고 확고하게 우리 마음속에 인식됩니다. 이상하지 않은가요? 단 1m의 거리조차 차이가 없는데 인식의 선명성은 엄청나게 달라지니까요. 왜일까요? 우리 모두는, 사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간단히 대답하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얼굴에는 빛이 번쩍입니다. 아무리 막막한 우주에서라도,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길을 잃은 행성으로 아무리 멀리 우주를 떠돌아다닌다 해도 우리는 그 사람들은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니까요. 많은 사람 사이에 섞여 있다 해도 그 사람의 단 한 번의 웃음소리나 단 한 오라기의 머리털만으로도 그 사람을 찾을 충분한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다른 하나의 실험을 해볼까요? 우리가 종이에 작은, 아주 작은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하여 가깝게 놓인 어떤 과일의 표면을 본다고 하지요. 과일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일 표면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는 것입니다. 자, 그 과일이 오렌지라고 가정하지요. 노란색으로 보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슨 색인지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색깔입니다. 누군가가 말해줍니다. “오렌지입니다.” 그 순간 갑자기 색깔이 인지됩니다. “노란색이네!”

우리의 감각은 객관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독립적(관념으로부터)이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는 끊임없이 우리의 감각에 참견합니다. 참견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가능한 것은 이것이 이유입니다. 임금님은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옷을 입고 계신 거지요. 영어식 표현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have eyes for'라고 하는 것은 타당한 것입니다. 젊은 여성의 눈은 단 한순간도 나 같은 할배한테는 머물지 않습니다. 감각이 독립적이라면 나한테도 공평하게 눈길을 줘야하지 않나요? “나도 한때 사랑받았노라.”

그리고 우리 자신이란 우리 자신의 경험의 축적입니다. 물론 그 경험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것은 각자의 DNA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나란 기껏해야 무엇이겠습니까. 나 자신의 역사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요. 우리의 유전인자까지 고려한다면 물론 태초의 폭발 이래의 개별적 역사겠지요.

이것이 우리에게 다양한 종류의 오디오가 팔리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의 감각이 수동적이고 객관적이라면 ‘좋은 음’이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인간의 귀는 생리적으로 동일하니까요. 누군가는 말합니다. 오디오에 있어서도 객관적 지표가 있는 바, 그 기준(parity)은 ‘돈’이라는 것입니다. 비싼 것이 무조건 좋다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위풍당당한 선언을 합니다. “귀는 다 똑같은 귀 아니겠어?” 이 사람은 귀가 우리 의지에 준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듣고자 하는 바만 듣는 법인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부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골드문트 시스템(그것도 full system)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피셔에 풀레인지를 물려서 듣고 있습니다. 두 조를 갖고 계신 거지요. 한 조는 허영을 위하여 한 조는 개인적 즐거움을 위하여. 저는 이수일처럼 외칩니다. “돈이 전부라고요?” 진부한 얘기지만 돈 자랑처럼 역겨운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감춰져야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면 (사실은 대부분의 미덕이 감춰져야 아름답지만) 여자의 몸과 개인의 부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볼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절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백화점 쇼핑에만 익숙한 아가씨를 앤틱숍에 데려다 놓아 보세요. 좋아할까요? 아닙니다. 아가씨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할 겁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그 아가씨는 쓰레기 집하장에 있다고 느낄 겁니다. 우리는 보물창고에 있다고 느끼고요. 우리의 오디오 라이프가 가족의 온갖 협박과 몰이해 때문에 고달프다면 이것이 이유입니다. 듣고자 하는 바가 아닌 것을 들으라니 부인들께는 하나의 고문이 되는 겁니다. 좋은 음악을 ‘이미’ 알고 있지 않는 한 그 귀에 ‘지금’ 좋은 소리를 들이대도 소용없습니다. 개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할 때, 여러분 눈에 백화점의 호사스러움이 들어오지 않잖아요. 저 역시도 백화점에 끌려가면 갑자기 색맹이 되고 배탈이 납니다. 사실이 이와 같으니 만약 여러분이 어떤 아가씨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오페라에라도 데려갈 양이라면 먼저 그 CD를 사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명령하세요. “열 번 들어!”

영화라는 것이 본래 허황된 것이라 해도 프리티 우먼은 좀 심했습니다. 고전 음악 연주회라고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아가씨가 라 트라비아타에 감동해서 웁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맞춰줘야 여성들로부터 호응을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좀 심하게 허황됩니다. 삼척동자가 임마누엘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졸도할 정도로 충격을 받기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초심자가 오페라보고 감동하기입니다. 싸구려 감상주의와 천한 자본주의가 결탁하면 이런 웃기는 거짓말들이 만들어 집니다. 생전 처음 오페라에 가본 아가씨가 자기는 울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고 때려치울까봐 걱정됩니다. 고전음악을 즐기기 위하여 선행하는 음악적 경험이 요구되는 것은 미,적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행하는 극한의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음을 들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떤 소리가 음악성 있는 소리인지 모르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합니다. 사실 자기 시스템에 어떤 부족함이나 문제가 있는 것을 자기 자신은 모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이전 시스템에서 더 좋은 소리를 들었거나 여기저기서 좋은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다면 문제는 다르지만요.

여러분께 비밀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큰 비밀입니다. 제 동생은 클래식 매니아이고 지방(춘천)에 삽니다. 치과의사선생입니다. 치과의사는 엄청나게 힘든 직업(자살률이 제일 높다지요)인 데다 지방에 사니 정보에는 깜깜합니다. 6L6 푸시풀을 듣고 있습니다. 저는 압니다. 350B로 바꾸고, 정류관도 274B로 바꾸면 소리가 엄청나게 좋아진다는 것을. 그러나 말 안 합니다. 본인이 만족해하는데 펌프질을 해댈 이유가 없지요. “겨울이 차라리 따스했거니” 모르는 게 약입니다. 동생이 저희 집을 방문할 때에는 관 바꾸느라 바쁩니다. 정류관은 5U4G로 바꾸고 초단관은 6SN7으로, 출력관은 6L6로 바꾸고 케이블도 2천원짜리 철물점표로 바꿉니다. 피가로도 스잔나도 백작부인도 케루비노도 모두가 만족스럽습니다.

좋은 음에 대한 축적되고 선행되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을 때에만 오디오의 업그레이드가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음과 음악적 즐거움은 별개의 사항입니다. 우리 모두 한때는 헤드폰 카세트 한 대와 한 보따리의 테이프가 우리 음악세계 전체이고 우리 행복 전체였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호사스러워진 시스템이 우리에게 그만한 행복을 주고 있나요? 오디오 숍의 주인이나 어떤 오디오 엔지니어들은 “한방에 가!”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합니다. 본래 남의 일에는 모든 판단이 연기와 같고 모든 말이 모래와 같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요! 그러나 언어는 관념을 배반하고 문자는 정신을 죽입니다. 절대로 한방에 가서는 안 되지요. 오디오의 경우에는 많은 돈이 들고 또 단계적인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애가 떡볶이나 오뎅의 맛을 우리처럼 즐겼을까요?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들인가요. 누구도 그 행복을 우리에게서 박탈해서는 안 됩니다. 혹시 누군가가 벼락부자가 되었다할지라도요.

그러므로 대부분의 음악 애호가들은 탄노이 레드 12인치만으로도 수십 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12인치 레드에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부족하다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점이 있는 스피커입니다. 어쩌면 그 결함조차도 다른 스피커의 장점보다 더 사랑스럽습니다. 탄노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벙벙거림을 제외하고는요.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권고를 하겠습니다. 소위 귀가 틔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나 오디오를 생업으로 삼는 분들을 함부로 여러분 집에 들이지 말라는 겁니다. 그분들은 귀가 틔었건 안 틔었건 (제 경험으로는 그들 대부분이 귀가 안 틘 사람들입니다만) 여러분 시스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겁니다. “대단합니다. 아주 질감 있고 품위 있는 소리가 나네요. 그런데 고역이 깎이고 저역이 풀어집니다.” 그 순간부터 즐거움의 대상이었던 우리의 애인들이 줄줄이 교체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르고 있으면 안 들렸을 결함들이 갑자기 나타난 겁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결함이 만들어진 겁니다. 문제없는 시스템인데요. 우리의 감각 중 청각처럼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앞에서 든 예에서 본 바와 같이, 가장 엄정하다는 우리의 ‘시각’조차도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청각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나쁜 음의 대부분은 사실은 ‘나쁘다고 생각되는 음’이지 실제로 나쁜 음은 아닐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약간의 문제밖에 없던 기기가 문제 그 자체인 기기들로 바뀌게 됩니다. 엄청난 돈이 더해져서 다운 그레이드가 되는 거지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좋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개성이라는 요소가 들어갑니다. 보편성을 부여받은 개성 - 이것이 우월성의 기준입니다. 음에 있어서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음은 여러분 자신이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반드시 ‘그렇다 치고’라는 전제하에 들으십시오. 자기 자신의 음에 관한 한 자기 자신이 군주(君主)인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듣고 오랜 세월을 듣다 보면 모든 것은 스스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래 사람은 배우기보다는 가르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법입니다. 음에 대해서, 음악에 대해서, 오디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으면서 주둥이만 바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직도 배워야 할 사람들이 가르치려 난리를 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탄노이의 저역 과잉을 잡는 방법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개인적 경험입니다. 어떤 권위에 의하여 검증받은 것은 아닙니다.

동질적이고 미분화된 사회가 이질적이고 분화된 사회로 나아갔을 때 역사학자들은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왔다고 말합니다. 중세에는 모든 지역이 천편일률적인 장원이었습니다만 ‘중세의 가을’에는 이제 도시의 분화가 일어나서 어떤 지역은 공업과 상업을 하게 되고 어떤 지역은 목축을 하게 되고 어떤 지역은 전통적인 농업을 고수합니다. 이것을 ‘진보’라고 이름붙입니다만, 저는 과연 진보였을까 싶습니다. 더 행복해졌을까요?

어쨌든 오디오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때는 인티앰프 한 대면 끝이었는데 이제는 포노스테이지, 라인스테이지, 파워앰프, 또 각각의 전원부 등으로 끝없는 분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분화되어 있는 라인스테이지가 탄노이의 저역과는 상당히 관련됩니다. 3극 직렬관으로 구성된 라인단을 쓰게 되면 저역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방열관을 사용해도 됩니다. 3극 직렬관은 때때로 웬수 같은 놈들입니다. 다루기가 까다롭고 험(hum)도 뜨기 쉽습니다. 단지 좀 더 선명하고 분명하고 스케일이 큰 음을 얻을 작정이라면 3극 직렬관을 시도해야겠지요. 추천할 만한 관으로는 WE 101D, WE 101F, WE 264A(혹은 B)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STC사에서 제작된 것 중에도 대체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격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서 선택하면 될 것 같습니다.

라인단에 3극 직렬관을 사용할 때의 장점은 음이 곱고 청명해지고 선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3극 직렬관들은 물리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관들입니다. 우선 전류 증폭도가 낮기 때문에 저역에서의 해상도가 약간 떨어집니다. 그러나 주로 클래식과 가요와 이지 리스닝 (easy listening)계열의 음악을 듣는 애호가의 경우에는 방열관 보다는 3극 직렬관이 좋습니다. 중역대의 아름다움과 청아함은 거의 천상적이라 할 만합니다. WE 관을 선택하는 것이 시행착오가 없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기술적 완성도에 있어서 최고라고 할 만하니까요.

구성은 여러 가지가 가능합니다. 우선 증폭관 - 아웃트랜스의 간결한 구성이 있을 수 있고, 인풋트랜스 - 증폭관 - 아웃트랜스의 구성이 있는 바,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다름으로는 인풋트랜스 - 증폭관 - 증폭관 - 아웃트랜스의 방식인데 WE 120, 129, 130이 이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세 경우 게인이 너무 높아 추천할 만하지 않습니다. 본래 광전관과 같은 극미 전압을 읽기 위한 것으로 카트리지를 읽기에는 너무 예민하고 과증폭이 되지요. 음이 불안하고 들뜬 느낌이 들어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증폭관 - 인터스테이지 - 증폭관 - 아웃풋트랜스의 방식인데 제 경험으로는 가장 이상적이었습니다. WE46C, WE 49B가 이 방식인데 이 경우 앞단에 인풋트랜스를 장착시키면 더욱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독일계 앰프의 경우, 마이학 V41이 제가 아는 바 유일한 인터스테이지 방식의 라인앰프입니다. 독일계에 정통한 매니아의 경우 라인단에 관한 한 마이학 V41이 노이만 WV2를 능가한다고 말하는데, 제 자신의 경험상 이것은 과장만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V41을 살 기회가 있다면 서슴없이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저는 이놈이 나가고 나서 웨스턴 49B를 만날 때까지 엄청나게 커다란 상실감을 겪었습니다.

인터스테이지 방식의 경우, 전체적으로 음이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해지고 저음부가 단단하게 맺히면서 벙벙거리기를 멈춥니다. 마지막으로 증폭관 - 증폭관 - 아웃트랜스의 방식도 있습니다. 알텍 1540A 라인단의 경우로 피어리스 16204라는 너무나 유명한 아웃풋트랜스를 사용한 것입니다. 전류를 흘릴 수 있는 아웃풋트랜스를 사용한 것으로 이 경우 고가이기 때문에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소리는 참으로 좋습니다. 음의 깊이가 확연히 느껴지고 전체적으로 대역폭이 넓어지면서 탄노이의 저역이 훨씬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여러분이 훨씬 더 부자가 되었을 때 시도하십시오. 파산합니다. 제가 아는바 전류를 흘릴 수 있는 프리 아웃풋 트랜스로는 WE 197A, 피어리스 16204, 피어리스 PP204 등이 있는데 그 뛰어남은 분명하지만 너무 고가입니다. 16204의 경우 트랜스의 값만 미국에서 3천 불 정도가 되고 모듈이 같이 있을 경우 4천 불 정도 됩니다.

일반적으로 매니아나 엔지니어들은 말합니다. 트랜스의 질이 좋지 않을 때 트랜스매칭 방식은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대체 좋지 않은 트랜스의 기준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요? 확실히 웨스턴 일렉트릭의 트랜스가 제 경험상 가장 좋았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라인단 하나가 2천만 원을 훌쩍 넘습니다.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시도하지 마십시오. 이혼당합니다.

저는 한때 피어리스 트랜스로 인풋트랜스 - 3극 직렬관 - 아웃풋트랜스의 구성을 한 적이 있었는데 누구에게라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환상적이었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닙니다. 130만원의 부품 값이 들었습니다. 인건비로 40만원, 샤시 값과 기타 부품 값으로 30만원, 총 200만원이 들었습니다.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데, 몇 천 만원짜리 외제 프리앰프보다 100배쯤 좋았습니다. 역시 친구 K모군(도둑에 진배 없습니다.)이 몰래 가져가고 나중에 2백만 원 송금했습니다. 울고 싶었지만 용기 있게 다른 시도를 했습니다.

저는 인풋트랜스 - 증폭관 - 인터스테이지 - 증폭관 - 아웃풋트랜스 방식을 현재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 포노단은 LCR 방식이니까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트랜스매칭 방식인 것이지요. 만족합니다. 33년간의 순례가 끝난 거지요. 피어리스 트랜스 중에는 값이 헐한 것은 많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제 방식의 라인단을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탄노이의 저역 과잉을 잡는 데는 확실히 효과적입니다. 피어리스 15095 같은 아웃풋트랜스는 한 조당 20만원 정도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조를 사면 인터스테이지와 아웃풋트랜스는 해결되는 것이고 적당한 인풋트랜스만 구하면 됩니다.
두 얼굴 5-b

자 이제 부품을 구했으면 라인단 제작에 들어갈 차례입니다.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까요? 엔지니어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오디오 애호가들은 그 기기의 선택에 있어서 의외로 수동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으로 만족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성품들은 터무니   없이 비쌉니다. 사실상 어떤 기성품의 경우는 가격의 90%정도가 부가가치입니다. 즉 부품 값은 10%정도라는 것이지요 그 10%에서도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샤시 값입니다. A사의 파워앰프 중에는 6천만원 정도되는 것이 있는데 들여다보면 아닐 말로 기가 막힙니다. 싸구려 진공관이 16개 박혀 있는데 -전부 3만5천원 짜리 러시아 산- 트랜스는 도대체 어떻게 감은 것인지 음악성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기성품의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상 많은 진공관을 사용하여 출력을 높이는 것은 음악성을 위해서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같은 조건일 때에는 출력이 낮을수록 고운 소리가 납니다. 싱글이나 pp정도가 바람직하지요. 기성품들은 우선 능률이 낮은 현대 스피커에 맞춰 튜닝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당히 놓은 출력을 지닙니다. 자연 섬세하고 정묘한 음악성을 잃기 쉬운 것이지요. 또 다른 문제는, 기성품은 40년대의 300B나 PX25, PX4, RE604, ED, DA30 등의 3극관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비싸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제가 열거한 위의 관들이야 말로 인간이 만든 가장 훌륭한 관들입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요. 이러한 관으로 만든 -그것도 싱글로 제작된- 앰프는 제작 이외에는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애호가의 수준이 진공관의 특성에 따른 차이에 관심을 기울일 정도가 되면 제작에 돌입할 수준이 되고 매니아 중의 매니아가 되는 것입니다. 탄노이 모니터 시리즈에 이르면 진공관의 특성에 따른 음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저는 언젠가 얼치기 전문가가, 자기도 한때 탄노이를 썼었는데 스피커가 둔해서 관의 특성을 잘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젠센 동축형으로 바꾸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정말이지 한참동안 웃느라고 정신을 못차린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젠센이야말로 둔한 스피커입니다. 그 분은 젠센 15인치 코엑시얼을 쓰고 계셨는데, 스피커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우퍼의 울림소리가 마치 종이 문창호지가 겨울 바람에 우는 소리를 내는 것과 흡사하였습니다. 버석거리더군요. 그런데 그 스피커가 관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망치로 바이얼린을 연주한다는 것을 믿을지언정 젠센 코엑시얼이 관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관의 개별적인 특성을 드러내는데에 있어서는 사실은 독일 계열의 유로딘이나 비오노르가 훨씬 유능합니다. 그 스피커들은 정교하고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탄노이가 관의 특성을 잘 드러냅니다. 각설하고, 오늘은 어쨌든 라인단이나 기타 앰프를 만든다고 자부하는 엔지니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정한 날입니다.

문제는 엔지니어입니다. 단언컨대 라인단을 만들어줄 엔지니어를 구하시기 힘들 겁니다. 그 이유는 우선 엔지니어 대부분은 고객이 라인단을 만들어 달라면 쉽게 응하지만 부품을 가져다 주면서 이러이러한 방식의 라인단을 만들어 달라면 대부분 거부감을 보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일만 하려 하지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새롭다고 돈 되는 것은 아니지요. 명의(名醫)라고 이름난 의사들은 고칠 수 있는 병만 고치지, 어려운 병은 고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환자를 고치려 고군분투하다가 실패하느니 흔한 질병을 앓는 환자에게 항생제와 스테로이드를 무차별로 퍼부어서 고쳐놓는 편이 명의 소리를 듣기는 훨씬 쉽기 때문이지요.

두 번째 이유는 자부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러이러하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면, “그렇게 잘 알면 당신이 하쇼.” 합니다. 부품 값에서도 좀 남겨먹고 싶고 또 스스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있는데 굳이 부품까지 갖다 주면서 참견하는 것에 자존심이 손상되고 이익도 손상되니까요.

엔지니어와 관련된 문제는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도대체 선택 기준이 없습니다. 모두가 가장 잘났다고 합니다. 또 못하는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력 없고 게으른 엔지니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게으르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작은 일들을 성실하게 하기보다는 큰일에 바가지를 씌우면 됩니다. 거기에 더하여, 자기 기기를 팔거나 수리해주고 나서는 이제 끝입니다. 그 기기가 문제를 일으키면 적극적으로 대응해서 신속하게 해결해주기보다는 어떻게든지 기피하면서 짜증스럽게 대합니다. 웃는 경우는 단 한 순간뿐입니다. 돈 받을 때!

다른 전자 영역은 조용한데 오디오 엔지니어들만은 마음 놓고 서로가 잘났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까요? 이유는 시장이 좁기 때문입니다. 별로 돈 되는 사업이 아니니까 대기업에서는 손을 대지 않고 여기저기 소규모 공방에서 작업을 합니다. 만약 대기업에서 손댔다면 이 분야도 벌써 논란은 끝을 맺었을 겁니다. 가장 뛰어난 인재들은 거기에 모여 있으니까요. 삼성이 실패한 것도 돈이 안되는 사업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대체로는 돈이 풍족하지 않은 사람들이 음악을 좋아합니다. 값비싼 음식점이나 고급 부띠끄를 좋아하는 우리 아줌마들은 음악도 오디오도 싫어합니다. 아줌마들과 예술의 관계는 제가 나중에 한번 다룰 것입니다만, 아줌마들에게 있어 음악 예술이란 테이블 뮤직 정도의 의미입니다. 음악보다는 자기네들 수다가 훨씬 소중합니다. 가끔 엔지니어들이 오디오 잡지와 힘을 합쳐 자기 자신을 홍보할 때 굳이 자기 경력을 광고하며 애쓰는 것은 사실 그 경력이 별 볼일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박사님이시고, 누구는 좋은 직장을 퇴직하고 (오로지 오디오가 좋아서) 오디오 제작에 투신했고, 누구는 30년간(혹은 20년간) 오디오에만 매진해 왔고, 누구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이론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이고 등등. 오디오 제작과 관련된 한 아직 중세시대에 있는 거지요. TV기사나 냉장고 기사나 에어컨 기사는 별로 잘난 척 안합니다. 유독 오디오 기사들만이 잘났습니다. 자기 우물 속에서 혼자 큰 소리 치는 거지요. 사실 저는 항공기 제작소에 근무하며 동시에 오디오 자작이 취미인 선배 한 분과 잘 지내고 있는데 그 분은 “오디오 제작이 가장 쉽고 휴대 전화 제작이 가장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지겨운 자화자찬이란....... 여기에 더하여 더 무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츄어 전문가들입니다.

대충 만들자고 들면 오디오 제작처럼 쉬운 것도 없다보니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좀 있고 기계만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공관에 관한 자료 좀 보고 또 몇 개 만들어서 실패도 성공도 하고 잡지나 인터넷에 기고하며 지명도를 좀 얻고 이제 오디오로 돈 좀 벌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이제 돈벌이를 하려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을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습니다. 저도 이런 사람 몇 명 알고 있는데 제게 바가지를 덮어씌우려고 엄청 애쓰다가 실패했습니다. 모르는 척하고 조용히 있으면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상투 꼭대기에 올라앉으려 듭니다. 취미는 취미로 그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더 거드름을 피우고 더 오만합니다. 자기는 다른 직업이 있고 취미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고귀하다는 것이지요. “내 걸작을 사려면 부탁하고 굽실거려야한다”는 태도인데, 이런 사람이야 말로 실력은 없으면서 돈은 더 무섭게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기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디오 제작과 수리는 이론만으로도 안 되고 경험만으로도 안 됩니다. 이 둘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가 하면 오디오 기기란 음악이라는 정묘한 예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계측기를 전투대형으로 배열하고는 “관 꽂아 볼 필요도 없어요. 계산과 오실로스코프로 다 나오니까요.” 하는 엔지니어를 믿지 마십시오. 소리는 냉랭하고 무미건조하고 비음악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30년의 경험’을 선전하면서 자기 경험과 자기 귀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는 엔지니어도 믿지 마십시오. 그 경우 어쨌든 그럴듯한 소리가 나온다고 하지만 밸런스가 안 맞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얼핏 들어보면 그럴듯하지만 집에서 조용히 들으면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30년의 경험’을 떠들어대는 엔지니어에게는 그 사람이 평소에 하던 것이나 맡겨야지 새로운 것을 갖다 주면 큰일 납니다. 도대체 ‘진공관 특성표’도 없이 앰프를 제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돈을 적게 받는 것도 아닙니다. 경력 대접을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오디오에 종사하기보다는 전파상에서 땜질이나 해야 할 수준입니다.

어떤 국가의 수준은 기기의 제작 능력에 의해서보다는 오히려 문제 있는 기기에 대한 책임의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현대자동차의 급격한 기술 향상은 자동차 자체의 성능 이상으로 북미 시장에서 ‘10년, 6만km’의 보증수리기간을 선언했을 때 결정된 것입니다. 제작 이상으로 AS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 오디오 엔지니어들은 이 점에 있어서 아직 수준 이하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그 지능은 의외로 단순 무지합니다.

드물게 좋은 엔지니어도 있습니다. 그러한 엔지니어의 첫 번째 특징은 겸허와 정직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우리 매니아는 대부분의 경우 기기의 기술적 측면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궁금한 것도 많고 두려움도 많습니다. 그러한 무지에 대한 엔지니어의 짜증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매니아 중에는 터무니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멀쩡한 기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도 하고, 조금 나는 험도 참지 못해하기도 합니다. 40년대 3극관 앰프에서 어떻게 험이 없기를 기대하나요. 이러한 요구들은 헤파이스터스가 환생한다 해도 해결하지 못할 것들이지요.

조금씩 개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엔지니어들과 숍 주인들 쪽에서의 개선이 더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지불하는 것은 매니아이니까요. 특히 엔지니어들은 음악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즉 음악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공학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잔머리의 약삭빠른 사람들은 학문을 비웃습니다만 이론 없는 경험은 맹목이고 경험 없는 이론은 공허입니다. 이 둘은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기 싫거나 음악 듣기 싫거나 땜질이 싫으면 은퇴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길이나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악 자체를 사랑하지 않거나 연주회장에 자주 다니지 않는 엔지니어도 자기 직업을 그만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황을 모를 때에 도대체 어디에 맞추어 기기를 튜닝하겠습니까? 그 빈약한 상상력만으로? 계측기만으로? 경험만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오디오 기기와 관련하여서도 소비자 운동이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자로서의 우리도 품위와 기준을 가져야 하겠지만 엔지니어와 판매자 역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의무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격, 기기의 신뢰성, 친절, AS 등의 항목을 정하여 동호인들의 의견과 평점을 거쳐 순위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것은 어떤 엔지니어나 상점주를 몰락시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고 친절하고 실력 있는 엔지니어들을 좀 더 번성케 하고 이제 오디오에 갓 발을 들여놓는 초심자들이 좀 더 실수 없이 음악의 세계에 다가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기 일에 대한 엄격한 사랑을 품고 오로지 연구와 실험적 시도에 매달리는 엔지니어를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의 기기는 한참 동안 좋은 평가를 못 받았지만 이제는 멋진 작품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외제 오디오에 대한 ‘허영의 시장’에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에 대한 저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저는 동호인 여러분의 의견을 더욱 존중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종합된 의견서는 ‘소비자 보고서(consumer report)’로 만들어져 1년에 두 번 인터넷상에 공표할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와 참고 바랍니다.


두 얼굴 6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구조주의를 들고 나왔을 때 학계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까지는 언어의 연구가 기껏해야 어원부터 따져 나오는 계기적(시간적) 학습이었는데 이때부터는 동시각에 공존하는 언어의 관계 자체를 동일한 비중, 아니 그 이상의 비중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으니까요.

오디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기들 사이의 관계와 조화가 중요합니다. 가령 어마어마하게 좋은 스피커와 그 이상으로 좋은 파워앰프에 형편없는 프리앰프를 사용한다면 그 소리는 유감스럽게도 프리앰프의 수준에 맞춰집니다. 모든 것이 다 좋아도 카트리지가 형편없다면 이건 정말 애석한 경우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는 경우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좋은데 스피커가 형편없다면 “아무리 좋은 걸 먹여도 소용없다. 그래봤자 스피커 소리다.”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어느 수준의 시스템을 원하는가를 먼저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로는 그 기준은 스피커입니다. 나의 여유와 나의 성향에 따라 스피커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전체 시스템의 수준을 결정하는 공시적(synchronistique) 판단을 했다면 그 다음으로는 그 시스템에 있어서 순서적(diachronistique) 고려를 해야 하고 가장 먼저 스피커를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마구잡이로 되는 일은 개울에서 미꾸라지 잡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 대한 남아는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소총의 분해, 결합이나 애인의 옷 벗기는 데 있어서 순서는 결정적입니다. 공이를 먼저 넣고 노리쇠를 넣어야지 그 반대면 이제 나가서 연병장 뛰는 일밖에는 남은 게 없습니다. 바지 입고 팬티 입을 수는 없지요.

스피커가 정해지면 그 다음에는 그 스피커와 매칭이 잘 되는 파워앰프를 정해야 합니다. 파워앰프가 정해지면 그 파워앰프와 잘 어울리는 프리앰프 혹은 라인스테이지를 골라야 하는데 이 부분이 오디오 라이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스피커와 파워앰프를 건물의 골조라고 한다면 프리단이 건물의 인테리어와 외부 마감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집을 지은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마감이 훨씬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것을요. 사실 어떤 오디오 매니아가 프리부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정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그 수준은 이미 범상한 매니아의 수준을 넘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범상치 않은 애호가께서 오디오를 포기하고 몽땅 팔아치우는 시점도 주로 여기입니다. 이렇게 해봐도 안 되고 저렇게 해봐도 안 되고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때려치우는 거지요.

제 경험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느낀 것은 트랜스매칭 라인단과 그 라인단 아웃풋 트랜스의 임피던스와 특성에 맞춰진 인풋 트랜스를 파워앰프에 장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증폭률입니다. 보통 파워앰프는 볼륨이나 어테뉴에이터 없이 무한대로 열어놓습니다. 이 경우 인터스테이지, 인풋 트랜스, 드라이브관 등이 모두 증폭률에 관계됩니다. 그리고 파워앰프의 증폭률은 라인단의 증폭률과도 상호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가령 REN 904 두 개로 증폭할 경우 증폭률(보통 ‘뮤’값이라 합니다만)이 무려 900이나 됩니다. 여기에 인풋 트랜스와 인터 스테이지가 들어가면 이제 못 들을 정도로 사나운 파워앰프가 됩니다. 더하여 라인단의 게인이 높을 경우 그 결과는 엄청난 험입니다. 망하는 거지요.

단언컨대 저는 상당한 가격표를 달고 나오는 기성품을 사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제 그럴듯한 외관을 가졌다면 수천만 원은 보통이지요. 부품값은 아마도 10%도 안 될 것이고 그 10%의 대부분도 샤시값일 것 같습니다. 저는 몇 번인가 초고가 하이엔드 오디오를 열어본 적이 있는데 공허했습니다. 엄청나게 큰 방열판 안에 엄청나게 큰 전원트랜스 하나와 PCB 한 장 - 이것이 끝이었습니다. 어느 평론가가 스위스 G사의 앰프에 대하여 ‘순백의 소리’라나 했습니다만 저는 ‘순백의 공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크 레빈슨> 스스로 말한 것처럼 이제 오디오 업계는 더 이상 썩을 수 없을 정도로 썩었습니다.

우리가 오디오에 대한 지식을 얻기를 원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식놈을 대학 보내기 위해서는 공부를 스스로 하는 자식님을 대학에 보내는 것보다 몇 배의 돈이 더 듭니다. 스스로 지식을 갖춰 나가지 않으니 돈을 퍼 들여서 과외를 시켜야 하니까요. 오디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기의 메카니즘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스스로 갖춰나가면 확실히 용산에 가서 바가지 뒤집어 쓸 일도 없고 A사(社)나 G사나 B사에 돈 퍼줄 일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밥을 먹여줘야 하나요. 우리나라에도 충분한 기술은 있는데요. 그리고 오디오 기기처럼 단순하고 간단한 것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잘 알고 있는 선배 한 분이 저에게 말하더군요. “오디오 기술이 제일 쉬운 기술이고 휴대전화 기술이 아마도 가장 어려운 기술일 것”이라고요. 많은 회사들이 ‘획기적인 회로도’ 운운하며 무지몽매한 우리에게 바가지를 뒤집어씌우려하지만 어떤 엔지니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디오에 관한 한 우리 할아버지 대에서 모든 기술이 완성되었다.”고요.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우리 스스로 원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자작 이외에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PX25 싱글에 대하여 말해보지요. 기성품은 없습니다. 어느 회사도 출력관 하나에 백만 원이 넘는 앰프를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싸구려 부품으로 샤시만 그럴 듯하게 만들기를 원하지요. 그리고 고전관들은 회사에서 사용할 만큼 무한정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PX4나 RE604나 Ed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300B의 경우는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기성품이 있고 AD1의 경우 클랑필름과 쾨르팅사의 것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가격이지요. 3극 고신뢰관 앰프의 경우 사실상 자작 이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싱글용 아웃트랜스만 구할 수 있다면 500만원 이내에서 PX25 싱글 앰프를 하나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매우 성실하고 양심적인 엔지니어 한 분은 인건비로 한 조에 50만원만 받겠다더군요.

자작의 불리한 점은 매각하고자 할 때 제 값을 받기 힘들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작을 할 경우에는 평생 쓰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독일 진공관 라디오의 아웃풋트랜스를 사용하면 정말 예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추천할 만한 것으로는 Mende, Sachsenwerk, Isophone 등이 있고 PX25나 300B와 같은 대출력관에는 V54B가 좋습니다. 어떤 전문가의 경우 독일 트랜스는 특성이 형편없어서 소리가 뻣뻣하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위에 열거한 모든 트랜스로 제작한 싱글들을 다 들어보았습니다만 뻣뻣한 소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백만 원짜리 partridge 2207보다 훨씬 낫게 느꼈습니다. 라디오 아웃풋트랜스는 40-60만원 정도이고 V54B의 경우는 100-150만원 정도면 아마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트랜스와 3극 고신뢰관으로 앰프를 제대로 자작했을 경우 이것을 내다 파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파워앰프니까요. 더 좋은 파워앰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국이나 미국 계열의 싱글 아웃트랜스 중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음이 품위나 고풍스러움은 전혀 없고 시끄럽기만 하거나 조잡하기만 하였습니다. 이러한 트랜스로 어설프게 자작된 300B앰프는 널린 채로 돌아다니지만 구매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본래 영국과 미국에서는 싱글 엔디드 앰프를 하이파이로 분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즉 푸시풀 회로만을 최고로 간주했던 것이지요. 이런 사고방식 하에서 훌륭한 싱글 트랜스가 나올 수는 없지요.

저는 두어 달쯤 전에 한 매니아가 Sachsenwerk 아웃풋과 RS 241관으로 싱글을 만들어서 자이스 이콘에 물려 듣고 있는 것을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눈치 채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리뷰를 하고 있는 바, 어떤 기기에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자작 싱글은 경이로웠습니다. 수천만 원짜리 기성품은 정말이지 빛을 잃더군요. 총 450만원이 들었다고 하는데 저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이제 탄노이 스피커와 파워앰프의 매칭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PX25 싱글을 권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여기서 취향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쁘고 살랑거리는 음보다는 심지가 굳고 덤덤하면서도 푸근한 음을 좋아합니다. 안정되고 한결같은 음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음이지요. 그렇다고 냉담해서도 안 됩니다. 저는 응답특성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예민한 관에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PX25는 뮤 값이 6으로서 상당히 응답특성이 빠른 편이지만 온순하고 수더분하면서 한결같고 깊은 맛이 있는 음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참으로 깊이가 있습니다. 특히 탄노이와 어울렸을 때에는 그 특질이 더욱 잘 드러납니다. 대체로 혈액형이 A형인 분들이 탄노이와 PX25를 좋아합니다. 혈액형 O형 분들이 대체로 RE604와 독일 계열 스피커를 선호합니다. 여러분은 웃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개떡 같은 분류냐고. 정말이지 저도 이상하게 생각됩니다만 제 주위의 한 50여 명에 대한 관찰은 위의 분류가 5%의 유의 수준 정도로 맞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B형이나 AB형 등은 좀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고 줏대가 없습니다. 술 취했을 때에는 RE604를 좋아하다가 멀쩡할 때에는 PX25가 좋다고 하니 도대체 취향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혈액형을 한 번 맞혀보세요.)

PX25가 좀 지나치게 무표정하다고 느낀다면 (저는 절대로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만) PX4 싱글도 좋습니다. 예전에 여기 탄노이 동호회에서 PX4가 낫다, PX25가 낫다 등의 토론이 있었던 것을 읽은 적이 있는 바, 사실은 둘 다 좋습니다. PX4의 경우는 특히 PP일 경우 PX25 PP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싱글일 경우에는 PX25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PX4는 PX25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쁘고 표현적인 음을 지닌다는 거죠. 물론 예쁘다고 해도 조잡하게 예쁘지는 않습니다. 품위 있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지니죠.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것은 PX4는 4W의 출력밖에 나오지 않는데 탄노이를 충분히 구동한다는 것입니다. ED관의 경우도 4W로 같은데, 구동력은 PX4가 확실히 낫습니다. PX4의 뮤 값이 높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PX25, PX4 싱글 등은 탄노이 스피커를 충분히 구동하고 또 가장 좋은 매칭인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탄노이는 능률이 높은 스피커라 해도 아주 높은 스피커는 아닙니다. 더하여 블랙 -> 실버 -> 레드 -> 골드로 갈수록 능률은 낮아져서 더욱 구동력이 있는 앰프를 요구합니다. 특히 밀폐형 인클로저의 경우 4W로 구동하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저는 밀폐형보다는 저음반사형 인클로저를 권합니다. 물론 저음반사형이 저음부의 일정 주파수 대역 이하에서 급격히 무너지는 약점을 지니긴 하지만 프리앰프의 라인단을 잘 만들 경우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밀폐형 인클로저라면 PX25와 300B 이외의 싱글로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푸시풀 앰프라면 물론 걱정거리는 없습니다. 같은 출력이라 해도 푸시풀은 구동력이 더욱 커집니다. 예를 들면 ED 싱글이 4W이고 RE604 푸시풀도 4W이지만 RE604 푸시풀이 더 큰 스피커 구동력을 지닙니다. 사실 스피커 구동력은 단지 출력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러나 싱글엔디드 회로 앰프에 대하여만 우리의 주제를 한정하도록 하지요. 출력관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U52를 WE274B로, 다시 274B를 WE274 각인으로 바꾸었을 때 충격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더욱 선명하고 부드러워지면서도 음이 시원스럽게 나오고 스피커 구동력도 훨씬 더 커졌습니다. 정류관 역시도 중요한 것이지요. 저는 정류관은 5U4G를 권합니다. 그 경우 상황에 따라 정류관의 업그레이드가 5U4G -> U52 -> 274B -> 274B 각인으로 가능해지니까요. 초단관의 경우에는 6SN7을 권합니다. 이 경우에도 여건이 나아짐에 따라 Mullard ECC32로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Mullard ECC32의 경우 전 세계의 평론가들로부터 거의 만점을 받은 드라이브관입니다. 고역은 아름답고 대역은 넓습니다. 저역이 깊게 내려가지요.

나머지 문제 중 중요한 것은 샤시(chassis)입니다. 샤시는 동호인들이 모여서 일괄적으로 몇 조를 한꺼번에 주문하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디자이너이며 오디오 매니아인 동료분이 한 분 계십니다. 지금 샤시를 디자인해서 주문에 들어갔는데 제가 여태까지 보아온 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듀랄루민과 동판과 가죽과 나무로 제작된 것인데 동호인 여러분 중 제작에 가입할 의사가 있는 분은 댓글에 전화번호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 몇 개 정도의 여유는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PX25 싱글, PX4 싱글, 300B 싱글 RE604 싱글, ED 싱글 등에 두루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렴합니다. 세련되었으면서도 고풍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출력 트랜스만은 30년대, 40년대, 50년대의 것을 사용하기를 권합니다. 제 경험상 탱고, 타무라, 파트리지(80년대 이후의) 등의 현대 트랜스는 고전관 특유의 아름다움을 끌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관이 제조된 그 시기에 같이 제조된 트랜스들이 더욱 아름다운 음을 내는 것은 확실합니다.

 

두 얼굴7

이제 유럽의 고전 3극관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훨씬 비싸게 되었습니다. 물론 40년대의 300B 역시 금값보다 비싸진 지 오래 되었고 300B 각인관은 개당 300만원을 가볍게 넘어섰습니다. 우리 같은 음악 매니아에게는 그것들이 음악과 관련되지 않는 한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싸다한들 의미가 없겠지만 “방금 들은 그 목소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처지이니 정말이지 신경이 곤두섭니다. 300만원이라면 사실 꽤 쓸 만한 프리․파워 한 세트를 살 수 있는 돈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구 하나의 값이 그렇다니…. 300A는 부르는 게 값이라네요.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데 양평에 있는 어떤 창고와 송파에 있는 어떤 아파트에 300B가 4천여 개, 300A가 수십여 개 있다고 합니다. 단지 그것들은 ‘Not For Sale'이랍니다.  정말 절박하게 필요하지만 살 돈이 없거나 또 돈이 있다 해도 살 수 없다고 하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것들을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한 조씩 나눠준다면 저는 -그 사람이 그것을 어떤 수단으로 구했든지-개의치 않을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관련하여 여러 영웅들을 알고 있습니다. 일지매라거나 임꺽정이라거나 쾌걸 조로라거나…. 저는 아주 실제적인 사람이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부친의 허영이 없었다면 모차르트는 없었을 것이고 부친의 회초리가 없었더라면 베토벤도 없었을 겁니다. 말 안 들으면 잡아 패야지요.
그러니 위에 열거한 여러 영웅들이 악질 탐관오리들을 몇 명 손 좀 봤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그런데 이제 그만 해야겠습니다. 군 시절에 고참병하고 쌈질하다가 영창에 2박 3일 머문 적이 있는데 할 일 아니더군요.
저는 평생 살아오면서(지천명입니다) 귀중품을 원해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우리 부부는 결혼반지도 인공 다이아몬드로 했습니다. 사실 부모님에게 받긴 했지만 그 돈은 오디오로 둔갑했고 큐빅으로 때웠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컴맹이신 것이 다행입니다. 그 사실은 여태도 비밀이니까요.

저는 아주 실사구시적 정신에 투철한 사람이어서 단지 허영과 과시, 그리고 장식만을 위해 큰 돈 쓰는 것을 꺼립니다. 사용할 것이 아니라면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지요.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시계를 착용해서 숙면을 취하거나 시원한 배변을 볼 수 있다면 저는 진지하게 고려했을지도 모릅니다. 플라톤이 시보다 훨씬 시적인 산문으로 젊은 제게 말해준 “가슴 속에 황금을 가진 사람은 세속의 황금을 탐낼 이유가 없다.”는 교훈이야말로  평생을 일관하여 제 마음속에 메아리쳐 왔습니다. ‘가슴 속 황금’ 역시도 제게는 없는 듯하지만 말입니다.
물론 저역시도 오디오를 제작하고 매입하기 위해 계속해서 황금을 탐해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다지 풍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개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탄이야말로 제 인품이 형편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저만해도 부러워할 사람이 엄청 많을 텐데요. 사실 제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면 200만원쯤 하는 일제 싸구려 시스템으로 만족하고 안 들리는 소리는 마음으로 들었겠지요. 유감입니다. 저 역시 필부에 지나지 않으니. 그러나 저는 최소한 음악 세계에 있어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매점(買占)을 하지는 않았다는 거지요.
C모 씨나 J모 씨는 엄청나게 많은 기기와 진공관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모든 것들이 다 필요할까요? 저는 오디오 매니아들에 대해 안타까운 공감을 합니다. 다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좀 더 좋은 음을 들으려고 긴축에 또 긴축을 하면서 오디오에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남대문표 티셔츠 한 장도 돈이 아까워 벌벌 떱니다. 저는 한때는 3500원 짜리 점심을 먹으려고 20분을 걸어 다닌 적도 있습니다. 단돈 500원을 아끼기 위해.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세 정거장을 걸어서 집에 왔습니다. 그렇게 보름을 걸으면 소위 ‘빽판’을 한 장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재벌 분들께서는, 훨씬 더 자신들에게 어울릴 것 같은 다른 취미를 제쳐두고 왜 오디오 기기를 매점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만약 이런 분들이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하고 그렇기 때문에 기기가 필요하다면 세상에서 알려진 가장 좋은 기기를 한 두 조 마련하면 끝나는 것 아닌가요? 제가 듣기론 C 모 씨께선 장차 오디오 박물관을 열 작정으로 기기를 모은다고 하셨다는데 구역질이 납니다. 그렇다면 왜 동일한 기기를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모으시나요? 박물관에 124B를 열 대, 142C를 여섯 대, PX25 관을 백 개씩 갖다놓을 작정인가요? 저는 그런 박물관은 상상도 못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악덕 중 허영과 허위의식을 가장 혐오합니다. 만약 C모 씨께서 “나는 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서”라거나 “모아두면 장차 큰돈이 될 것 같아서”라거나 “모조리 독점을 하면 값은 저절로 오를 것 아니겠어” 등등의 말로 자신의 기기수집 증후군을 해명했다면 화는 났을지언정 이렇게까지 인간에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이러한 내심은 감춘 채로 고귀한 목적을 끌어대, 우리 모두와 어쩌면 자기 자신까지도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분노와 역겨움을 보여서 점잖으신 탄노이 애호가 분들을 난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며칠 전 다음과 같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PX 25 싱글 앰프를 만들고 싶은데 도저히 관을 구할 수 없어요. 일본에 가서 구해야 하는데 한 조에 400만원을 달라고 하네요.” 여러분 이런 전화를 받았을 때 화가나지 않나요. 그 돈이라면 아예 오디오 세트 한 조 값입니다. 저는 유럽에 전화했습니다. 네덜란드 그로닝엔에 친구가 살고 있는데 그 친구에게 부탁을 해본 거지요. 그 친구는 며칠 후 “불가능하다”고 전화했습니다.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들이 싹쓸이를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싹쓸이된 관의 대부분을(26개) C모 씨가 한꺼번에 매입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절대 안 판다고 하네요. 창고에 처박아 두고 있는 것이지요. 창고에!

우리에겐 어마어마하게 소중해서 한 번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진공관들이 창고에서 썩고 있는 겁니다. 단지 돈 많고 무식한 어떤 속물들 때문에. 진공관 값이 터무니없이 치솟게 된 것은 그러한 속물들의 매점이 한 원인인 것이지요. 더구나 이러한 고신뢰관은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한정된 수량만 남아 있는 것이지요. 돈이 많다거나 돈을 잘 번다거나 하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경쟁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돈 모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진공관은 무차별적으로 모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도대체 이러한 것들을 독점하는 것은 인간성의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일까요? C모 씨는 듣기로는 S대학을 졸업했다고 하고 S산업의 이사진 중 한 명이라는데 그 정도 되면 가방끈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중동아시아의 왕들은 경쟁적으로 후궁들을 들였습니다. 어떤 왕은 수백 명씩 거느렸지요. 그런데 그 후궁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웃 국가의 왕에게 자기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허영이었지요. C모 씨, 부디 많은 허영과 더불어 잘 사세요.

제게 PX25 관이 세 개 있었습니다. 제 앰프를 하나 만들고 싶었는데 그 중 두 개를 그 친구에게 팔았습니다. 제가 매입한 가격으로. 이제 ‘양들은 침묵’하더군요. 제 PX25 앰프는 날아갔지요.
저 역시도 악덕과 탐욕에 있어서 누구와도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긴 합니다. 그래도 저는 사랑과 공감이 우리를 덜 불행하게 하는 커다란 두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소리는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또 문제가 생겼을 땐 같이 한번 애써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돈벼락을 맞더라도 C모 씨처럼은 살지 맙시다. Pecunia avarum irritat, non satiat.(돈은 탐욕을 부채질할 뿐이지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진공관의 역사 이래 RE604만큼 사랑을 많이 받은 관은 없을 겁니다. 심지어 K모 엔지니어나 A모 진공관 전문가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관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리는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소리란 없는 법인데도요. 보통 교양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언적 어법’을 쉽게 씁니다. 취향이란 다양한 것이라 이런 판단을 할 때에는 언제나 ‘나에게 있어…’라는 조건이 붙어야 하는 것임을 모르는 거지요. A모 진공관 전문가께서 RE604 관에 대해 모 잡지에 기고한 부분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AD1 앰프를 만들어 듣고 있던 터라 RE604의 존재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막상 RE604의 소리를 듣고 나서는 산산이 조각난 자존심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지와 오만에서 오는 편견과 아집이 20년이 지나도록 끝이 나지 않았다는 자괴감 때문에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는데도 방황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 (지멘스) ED는 음색이 너무 가늘지만 아름답고, PX4는 중후하면서도 섬세하다. 또 AD1은 약간 거친 듯하면서도 화려하고 RE604는 비단결같이 유려하니 어찌 상하를 논하겠는가.”

상당한 감상과 과장을 섞어서 글을 쓰시는 분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RE604에 대한 상찬은 어느 정도 인정을 해야겠습니다. RE604는 확실히 그 부드러움과 저역의 깊이, 확고한 분해력 등에 있어서 뛰어난 관입니다. 그러나 RE604의 음을 아름답다고 묘사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약간은 차갑고 명석하고 지성적인 느낌을 주지요. 섬세하고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초연하고, 애교 떨지 않고 품위 있는 여성-마치 알프레흐트 뒤러나 한스 메믈링 회화의 여주인공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탄노이 애호가에게 있어서 이 관은 치명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출력이 1.4W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싱글로 탄노이를 구동하면 모기 소리가 납니다. 결국 PP나 파라싱글이라야 하지요. 저는 제 텔레풍켄 파워앰프에는 출력관 소켓을 두 개 만들고 바이어스 전압을 조정하여 경우에 따라 ED관도 쓸 수 있고 RE604도 사용할 수 있게 해 놓았는데 RE604 소켓은 탄노이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RE604를 사용한 독일계의 진공관 앰프는 크게 7개가 있습니다. 우선 클랑필름 PP가 있고, 클람필름 파라 싱글, 지멘스 PP, 클랑필름 싱글 등이 있습니다. 모두 상당한 고가입니다. 1500만 원이 넘습니다. (제작합시다. 더 좋은 앰프를 만드는 데 700만원 정도 듭니다.)
저는 위의 네 앰프 중 클랑필름 PP와 지멘스 PP를 갖고 있는데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클랑필름 PP의 경우 REN 904 두 개로 증폭하고 인터 스테이지를 사용하여 입력감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고역이 아름다운데 밸런스가 약간 위쪽으로 치우쳐 있지요.

지멘스 PP는 밸런스가 실연과 상당히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역이 약간 둔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오디오 기기는 언제나 실황보다 약 2도 정도 높게 튜닝되어 있습니다. 고역으로 어느 정도 치우치는 게 듣기에는 더 자극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래 들으면 피곤합니다. 지멘스 PP는 다행히도 음역대가 실제 악기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듣기에 아주 편합니다. 단지 저역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하여 상당히 공을 들여야 합니다.
클랑필름 PP는 본래 영사기용으로 광전관을 읽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보통 관전관의 전압은 0.1~0.12mv이고 카트리지는 0.25~0.5mv이므로 광전관용 앰프는 가정에서 카트리지로 듣기에는 지나치게 예민한 것이지요. 프로용이라는 것을 어떤 앰프의 우수성을 가라는 한 조건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에는 가정용이 좋습니다. 그런데 좀 들을 만하다 싶으면 가정용이 오히려 엄청난 고가가 됩니다. A라는 진공관 앰프는 파워앰프가 6천만원이고 L이라는 앰프는 4천만원이고 B라는 앰프는 5천만원이고 …. 세상이 온통 미쳤습니다. 한국의 하이엔드 유저들은 국제적인 봉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A라는 앰프를 몇 년 전에 집에 들인 적이 있습니다.(제가 잠깐 지름신에게 넘어간 경우입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제 연봉 정도를 손해보고 그나마 사정사정해서 내보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조언하는데 진공관이 되었든 솔리드 스테이트가 되었든 빈티지를 듣던 분들은 절대로 하이엔드는 사지 마십시오. 엉터리없이 비싸고, 처분하기 어렵고, 중고 시세 형편없고, 미적 가치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타노이와는 미스 매칭입니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나 나감직한 길바닥 미인이 아프로디테 여신 정도의 품격 있는 여인과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 RE604 기성품 중에서는 지멘스 PP를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우선 푸근하고 매끈하고 풍성합니다. 본래 RE604는 저역의 댐핑 능력이 뛰어난 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인단을 상당히 가립니다만, 좋은 라인단과 결합되었을 때 지멘스 PP는 정말이지 기품 있고 안정된 소리를 냅니다. 또 열어보면 제작의 치밀함과 공들인 흔적이 금방 느껴집니다. 눈에 띤다면 빚을 내서라도 사놓을 만한 앰프입니다. 워낙 귀해서 평생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앰프입니다. 지멘스 PP와 탄노이 모니터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지멘스 PP는 저역의 댐핑능력이 뛰어나고 또 탄노이는 앰프의 그러한 특성을 잘 살려줍니다. 단지 라인단이 충실하지 않을 경우 저역이 벙벙거릴 위험이 있습니다. 클랑필름의 PP와 파라싱글은 저역이 깨끗하고 단단합니다만 고역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재조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이 앰프를 튜닝하기 위해서 꽤 고생했습니다. 서너 명의 엔지니어들이 고역을 치렀지요. 반면에 지멘스 PP는 저역을 단정하게 만들기 위해 고생을 치러야 하는데 이 경우는 오히려 프리부쪽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RE604 관은 클랑필름사와 텔레풍켄사에서 각각 제작했는데 양 사의 경우 모두 초기에는 벌룬(balloon) 모양의 관을 출시했고 후기에는 ST형의 관을 만들었습니다. RE604의 경우 매우 특이하게도 벌룬관과 ST관의 음색이 상당히 다릅니다. 심지어 같은 이름을 지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음색이나 다른 여러 성격이 상이합니다.
벌룬관은 부드럽고 우아한 소리를 내지만 약간 둔합니다. 어딘가 두루뭉술한 느낌이지요. 저역이 매우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그렇게 선명한 저역은 아닙니다. 벌룬관의 가치는 중․고역에서 나타납니다. 형언할 수 없는 유려함을 보이지요. 탄노이와 어울리는 측면은 여기에 있습니다만 사실상 벌룬관과 탄노이는 좋은 궁합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탄노이의 약점인 저역을 보강해주지 못하는 진공관이니까요. 반면에 ST관은 상당히 선명하고 시원한 소리를 냅니다. 저역도 단단하게 맺히고 응답특성도 빠릅니다만 이번에는 고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탄노이에 맥킨토시 앰프를 매칭시켰을 때 가끔 나타나는 현상-‘쏘는 고역’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경우 탄노이 역시도 혼 스피커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지요. 저 자신도 이 문제는 해결을 못했습니다. ST관을 오래 듣고 있으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섭니다. 3극관이 정말 싫어지는 순간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어쩌면 저의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날카로운 소리를 저는 워낙 싫어하니까요. RE604 애호가의 경우 ST관을 더욱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벌룬관이나 ST관이나 모두 클랑필름사의 것이 텔레풍켄사의 것보다 높게 평가됩니다. 주의 깊게 들어보면 클랑필름사의 관들이 좀 더 풍성한 소리를 내는 듯합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클랑필름사의 것이 좀 더 수명이 길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탄노이와 RE604의 조합은 어떤 조합 못지않게 잘 어울리는 매칭입니다. 단정하고 깔끔한 성격이 둘 다 비슷합니다. 특히 벌룬관일 경우에는 풍성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훌륭한 밸런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듣기에 매우 편하면서도 음색은 매혹적입니다.
독일 오디오 매니아들은  RE604 관을 매우 좋아합니다. 아마도 그 선호도에 있어서 ED관과 더불어 가장 선두에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말이지 RE604 싱글 엔디드와 유로딘. 비요노르, 클라톤 등의 조합은 거의 환상적입니다. 제가 아는 매니아 한 분은 위의 세 종류의 스피커를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RE604와의 조합이 매우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피곤하더군요. 두 시간쯤 듣고 나니까 엄청난 피곤이 몰려 왔습니다. 저는 역시 탄노이파입니다….


 

두 얼굴 8

저는 가끔 현재 우리나라의 전공 분류가 아주 우습게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계, 과, 속, 종식 분류로 따진다면 아마도 계에 해당하는 분류가 문과, 이과의 분류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분류에서는 공유되는 성격을 가진 전공들이 같은 게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수학은 어느 쪽이냐 하면 인문대의 한 전공으로 분류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수학이나 물리학은 공학이나 의학보다는 철학이나 예술 쪽에 훨씬 가까운 과목이라는 것이지요. 어느 과학 철학자가 “과학은 예술을 닮았다(Le science ressemble L'art)"고 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사실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은 관찰이나 논리에 의하기보다는 직관과 영감(inspiration)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하나의 예술이지요. 어떤 분은 묻겠지요. 그러면 왜 집합과 명제가 수학의 한 주제가 되냐고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수학은 철학의 한 분야입니다. 이 부분을 철학과 공유하니까요.

이렇게 분석하자면 물리학, 생물학, 화학 등의 순수과학은 모두 인문대에 속해야 합니다. 이러한 학문들은 모두 우리의 경험에 호소하기보다는 훨씬 더 많이 우리의 상상력에 의존합니다. 자연과학의 본래 명칭은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었습니다. 모두 철학의 한 분파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과목들은 기초과학이나 순수과학으로 불립니다만 어느 경우나 응용과학의 한 토대로서의 기능을 염두에 둔 명칭이지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과학들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부산물이 기술(technology)에 응용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물질주의적이고 현상적 세계에 갇혀 사는 우리는 항상 ‘쓸모’에 대해 말합니다만 이러한 우리 처지가 행복하진 않군요. 생산성에 공헌하고 물질적 풍요를 불러와야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생산성의 향상이 우리에게 더 질 높은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은 산업혁명이래의 자본주의의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우리 삶의 어떤 측면에서 질이 높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에어컨 등을 노예노동으로 환산하면 가구 당 몇 명쯤의 노예를 거느린 것일까요? 텔레비전 대신 광대가 있어야 하고 에어컨 대신 부채를 부쳐주는 노예까지 있어야 한다고 계산하면 가구 당 적어도 열 명 정도의 노예를 거느린 셈은 될 겁니다. 노예 노동이 우리의 시간을 이렇게 많이 벌어주고 있는데도 우리는 계속 시간에 쫓깁니다. 여가 없이는 질 높은 삶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우리 삶의 질은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 나빠져 왔습니다.

동일한 질문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답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예를 들어 “역사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다고 가정하지요. 여기에 대해 한 역사학자께서는 역사학의 효용에 대해 틀에 박힌 구구절절한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 우리는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바탕으로 미래의 희끄무레한 여명을 볼 수 있다. 고로 역사학의 존재의의는 분명하다.” 장엄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동기는 사실 밥그릇입니다.  역사를 전공했으니 이제 그것은 그의 숙명이 되었고 그것의 존재 의의를 인정받아야만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고, 취업문도 넓어질 것이고, 어찌어찌 거기에 편승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사학자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무사무욕(無私無慾)하게 보이는 언명들이 그 이면에는 간단하게도 밥그릇만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니 이 분만 탓할 노릇도 아닙니다. 사실 역사학의 효용에 대한 이 구차한 변명을 한 분은 우리가 우습게 봐도 될 분은 아닙니다. 역사철학에 관한 초베스트셀러인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아 씨입니다.

두 번째의 전적으로 상이한 답변을 한번 살펴볼까요. 어떤 역사학자는 되먹지 않게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역사학의 존재이유? 과거에 무엇인가가 발생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이것이 전부다.” 정말 되먹지 못한 답변인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즉 이 답변이야말로 옳은 선언이라는 것이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물질적 요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대체 먹고 살 수 있어야 다음 일을 생각할 여지가 있으니까요. ‘목구녕이 포도청’이지요. 그러나 ‘목구녕’만이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일인가를 무목적적으로 그리고 무상성을 지니고서 한다면 어쩌면 우리 삶의 의의는 거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즉 우리가 삶의 실천적 요구를 벗어날 때 인간 고유의 가치 있는 어떤 것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눈앞의 강을 건너야 할 장애물로만 바라보는 한 예술은 없다.”라고 말한 사람은 쇼펜하우어입니다만 이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언명입니다. 예술이 가능하려면 강을 건너서 자기 길을 재촉하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다리를 찾기를 멈추고 오로지 바라보고 감탄해야 하지요. 이제부터 그는 단순한 나그네이기를 멈추고 시인이 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오디오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무목적적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생존 경쟁의 물질적 측면에 사로잡혀 괴로운 일상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한때는 이러한 물질들이 우리 삶의 가치 있는 부분과는 상관없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산의 높은 곳에 머무르며 희박한 산소에도 개의치 않고 살아갈 각오가 되어 있던 시절이지요. 그러나 모두 지상의 진흙탕으로 끌어내려졌습니다.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애쓰지 순결한 젊은 시절도 돌아가려하지는 않습니다. 어리고 순진했고 세상일을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치부하면서요. 이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우린 몰랐습니다. 우리 순수함의 근거가 무지였지요.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린애이기를 멈추었습니다.” 우리의 순수함이 의미 있는 것은 이제 성숙한 순수함이라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주는 여러 추악함, 고통 속에서 다시 한 번 순수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예술 감상이란 이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인 오디오도 이와 같은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왕왕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고 의미가 무의미로 무의미가 의미로 전도됩니다. 음악을 위한 오디오가 아니라 오디오를 위한 음악이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부딪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투자가치로서의 오디오입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매니아들에게는 경악을 금치 못할 때가 왕왕 있습니다. 저는 어떤 매니아들이 오디오를 하나의 재화로 간주하는 데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즉 투자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이런 분들은 오로지 오리지널만을 사들이지 제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이 행위 자체가 일반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음악 애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음향 박물관 운운할 경우에는 잘못입니다. 오디오 기기를 투자 대상으로 매점하는 행위는 장사꾼이나 할 짓이지 신사가 할 일은 아닙니다. 사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교육적, 교양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오디오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준하여 각자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러나 값이 오를 것이라는 신념(?)을 지니고서는 많은 기기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결국 무엇보다도 그 기기 소유의 애초의 목적, 즉 음악 감상의 즐거움 그 자체를 잃게 됩니다. 사회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소외’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람들은 ‘소리’는 들을지언정 ‘음악’은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수집 취미와 음악 취미를 동시에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기기들의 음향적 가능성에만 관심 있는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창조하는 음악 세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이것은 매우 속되고 비천한 행위입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과 결혼해야지 그 여성이 지니고 있는 경제적 능력과 결혼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음악 그 자체를 위한 오디오여야지 돈을 위한 오디오여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오디오의 가격을 올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소위 ‘빈티지’라는 명칭이 붙어있는 오디오입니다. 이 기기들은 그것이 아니면 자아낼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음악적 분위기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이 타당한 가격에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어떤 분인가는 EMT 927을 30여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논의의 여지가 없는 매점매석 행위입니다. 이런 식으로 되어 900만원 남짓하던 가격이 이제 2000만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분은 행복해서 미치겠다고 합니다. 사실 그 돈들은 같은 애호가의 주머니를 털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행복한가요? 먹고 사는 문제만으로도 이 제로섬(zero sum)적 경쟁이 지겨운데 이제 오디오까지도 이 경쟁의 획득물로 내몰아야 하나요? 구역질이 나는군요. 음악애호가라기보다는 그냥 시정잡배입니다.  

음악 그 자체만을 위해서는 사실 제작이 언제나 더 낫습니다. 후세는 그 윗세대들에 비해 어떤 이득을 보고 사는 바 그것은 윗세대들의 업적 위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빈티지 오디오들의 회로와 구성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개선의 여지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부품만 구해지면 언제라도 빈티지 오디오들보다 더 나은 음을 내는 오디오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업그레이드할 때 발생합니다. 가치가 엄청나게 절하됩니다. 제작을 하시고자 하는 동호인들은 그러므로 가장 궁극적인 앰프로서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생각을 하시거나 싫증나거나 업그레이드할 때에는 자신의 앰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료나 헐값에 양도하겠다는 각오로 제작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음악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어떤 이득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기 때문에 좋아할 뿐이지요. 이는 마치 천문학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지구의 땅 한 평도 늘어나지는 않으며, 아무리 철학을 열심히 해도 먹고사는 데는 아무 보탬도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천성적으로 알고자 하기(Man by nature desires to know)" 때문에 천문학이나 철학 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선율과 화음의 울림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음악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그 기기가 나에게 어떤 이득을 주지 않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디오 기기로 돈 벌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디오 판매상이나 오디오 엔지니어로 충분합니다. 동호인까지 그 난장판에 끼어들지는 맙시다.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할 측면에 관하여 말해보겠습니다. ‘오디오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라는 단순한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오디오는 계측기들을 물리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디오 기기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주파수 특성 계측기나 오실로스코프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소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귀를 통해서입니다. 어떤 음향기기도 귀의 매개 없이 소리를 뇌로 곧장 전달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생리 기관은 물리학적으로 완벽성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즉 완벽한 방형파가 나온다 해도 우리 귀는 별로 만족스럽게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준수하고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대상은 우리의 ‘귀’이지 오실로스코프는 아닙니다. 그 불완전한 기관-연골과 말단 신경으로 이루어진 그 아슬아슬한 생리기관이 그래도 우리가 태어난 이래 세상의 여러 소리와 우리 자아를 연결시켜준 중요하고 친근한 감각 기관인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어떤 오디오 엔지니어 한 분이 자신이 제작한 라인단과 메인 앰프를 들고 저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득의만만하고 의기양양하셨습니다. 3만Khz까지 완벽한 방형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간결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져서 음악 이외의 다른 요소는 끼어들 여지도 없고 또 어떠한 종류의 왜곡도 일어날 수 없는 앰프라고 말했습니다. ‘The Simpler, the Better!'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러한 종류의 감동에는 쉽게 물들지 않습니다. 눈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정말이지 실망했습니다. 실망스러움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사막과 같이 삭막했고 선인장처럼 날카로웠습니다. 제 귀가 그렇게 느끼는데 도대체 만족스러운 주파수 특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과학적 도움을 받더라도 소리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디오 시스템은 일정한 전기적 특성을 지닙니다. 카트리지는 일정한 수치의 전류를 전달하고 그에 준하여 앰프는 일정한 양의 출력을 담당합니다. 이 에너지가 스피커 콘을 자극하고 이 자극에 따라 콘의 일정한 진폭이 생깁니다. 만약 콘의 진폭이 실제 소리의 정확한 양을 나타낸다는 가정이라면 우리는 소리의 양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먼저 왜곡이 있고 또한 실제 소리의 강도와 음량을 스피커 콘의 진폭과 비교하는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물론 특정 부하에서 소비되는 전력을 기초로 한 dB이라는 단위가 있지만 이것은 우리 귀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실제 소리의 측정치라기보다는 하나의 전기적 수치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문제의 끝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어떤 음이 좋은 음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단지 음의 물리적 측면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음질, 음색, 음악성 등의 요소는 음의 밸런스라는 물리적 요소 이상의 어떤 추상적 대상입니다. 동일하게 만들어지고 동일한 부품으로 만들어진 앰프라 할지라도 사실 위의 세 요소는 서로 다릅니다. 이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는 오디오에는 눈에 보이는 부품과 회로 이상의 어떤 것이 첨가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요리사의 ‘손맛’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에 더하여 사용자의 취향과 노력도 관계됩니다. 오디오는 이상하게도 사용에 의하여 감가상각되기보다는 오히려 가치가 더 커집니다. 그리고 특정 장르와 특정 음역대에 더 유연하게 대응하게 됩니다. 즉 주인님의 취향에 맞추어지는 것이지요. 제 오디오들은 클래식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대응하지만 가요나 팝에는 완전히 무능합니다. 폐차 직전 자동차의 뒤틀리는 미션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므로 오디오 기기와 관련해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두 번째 조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소리 자체에 집중하십시오. 즉 관심의 중심을 오디오로부터 여러분 자신에게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좋은 계측 특성을 지닌 오디오를 소유한 분이 여러분 댁을 방문하여 자신의 수치를 자랑하면서 여러분 기기의 수치 특성을 묻는다면, 여러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디스크를 조용히 올려놓고 “서로 입 닥치고 즐기기나 하자”고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중 어느 분인가가 오디오 입문자라 할지라도 오디오 스펙(audio specification)에 절대 위축되지 마십시오. 스펙에만 의존하여 기기의 구입 결정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당신이 아무리 초보자라 할지라도 ‘귀’와 관련해서는 어떤 전문가와도 겨룰 수 있습니다. 더하여 만약 여러분이 연주회를 다녀온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전문가보다도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기기와 더불어 살아나갈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언젠가 저는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할 일 없이 늙어가는 사람은 별 짓을 다합니다. 우선 헐리우드의 11명의 배우 사진을 모으고는 합성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부위들만을 골랐습니다. 샤론 스톤의 코,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 나오미 와츠의 이마, 헬레나 본 햄 카터의 눈 등을 차례로 한 얼굴에 합성해 나갔습니다. 결과는? 새로운 괴물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따위 장난은 절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을 정도의 이상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디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기기의 스펙이 좀 덜 완벽하더라도 조화와 에이징(aging)이 의미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스펙들의 조합은 오히려 이상한 괴물의 탄생을 낳게 됩니다. 여성들이 어느 정도 덜 아름다운 기관들을 얼굴에 지니고 있다 해도 살아가는 동안에 그 기관들을 조화롭게 사용하고 좋은 마음으로 사용할 때에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용모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화 속에 엉뚱한 부조화를 불러들이는 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한 기관이 성형으로 자리잡을 때입니다. 성형외과 의사들이 조화를 말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선험적으로 알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체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좀 부족한 기기들이 하나의 조합을 이룬다 할지라도 조금씩 개선시켜나가고 또 많이 사용해주면 스스로 명기가 되어 나갑니다. 완벽한 기기를 소유하기 위한 욕심보라는 완벽한 사용자가 되려는 각오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에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어떤 사용자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하루도 못 참아. 시원찮으면 당장 아웃이야.” 정말 잘난 사람입니다. 세팅시키자마자 좋은 소리를 내줘야 그 집안에서 견뎌낸다는 말씀인데 이 아저씨는 첫경험의 처녀와 어떻게 첫날밤을 지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숙맥인 그 첫경험의 아가씨와. 그러나 순결한 소녀는 첫사랑의 저녁에 고뇌를 알고 눈물짓습니다. 부디 좋은 소리를 낼 가능성의 시간 정도는 기다려줘야 합니다.


두 얼굴 9

오늘은 언젠가 예고해 드린 적이 있었던 ‘여성과 오디오’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성과 음악, 여성과 예술의 관계와 관련한, 해명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주제를 다루게 됩니다. <여성과 예술>과 관련해서는 ‘모순’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여러 상황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를 들면 남자 청중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여성 청중이 연주회장을 메웁니다. 더하여 음악대학이나 미술대학에는 남학생보다 압도적으로 여학생들이 많습니다. 피아노를 조금이나마 연주할 수 있는 경우를 살펴보면 역시 여성이 남성보다 몇 배쯤 많습니다. 저 역시 피아노를 즐겨 쳤습니다만 전공이 아닌 경우치고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상황이 그러나 본격적인 예술가에 이르면 확연히 역전되고 맙니다. 역전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성이며 동시에 천재적인 예술가는 전무합니다. 역사 전체를 통틀어 천재적인 영감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여성예술가는 몇 명이나 될까요? 진정으로 창조적인 예술가로 논의를 한정시키면 여성은 정말이지 한 명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예술에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여성 천재 과학자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간신히 마담 퀴리 정도를 꼽겠습니다만 그 경우도 상상력과 통찰력으로 이룬 업적이라기보다 근면과 관찰력으로 이룬 것입니다.

여자 뉴튼이라거나 여자 다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여성이 받은 억압, 즉 사회적 압력에 대해 말합니다만 저는 한 가지 반례만 들겠습니다. 노예와 귀부인 중 어느 쪽이 사회적 압력을 더 많이 받을까요? 노예 출신의 철학자와 노예나 진배없는 신분 출신의 천재들은 많이 있지만 귀부인 출신의 여성 천재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 논의를 남녀 차이의 근원적인 국면까지 밀고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설픈 일반화로는 절대로 ‘여성과 오디오’의 불화를 해명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아담과 이브에까지 이르러야 그리고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은 각각의 임무와 의무를 이해해야 ‘여성과 오디오’의 관계를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많이 거창해진다고 웃으시겠지만 사실은 그와 같습니다. 문제는 양보다 질입니다. 적당한 정도의 예술이라면 여성도 많이 참여하지만 궁극적인 곳까지 밀고 나가면 여성은 점점 없어집니다. 오디오는 절대 어설픈 유희가 아닙니다. 오디오가 별다르게 창조적이거나 고귀해서가 아니라 돈이 제법 많이 든다는 점, 집안을 온통 시끄럽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마땅히 여성에게 쏟아져야 할 관심이 그리로 향한다는 점 등에 있어서 오디오는 극단적인 유희의 대상인 것이지요.

저는 하나님이 주신 여러 은총 중 이브의 창조처럼 커다란 은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 부드럽고 달콤한 피조물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어떤 곳이 되었을까요? 저는 여자가 하는 모든 행동은 은혜요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분들이 이마라도 찌푸리면 제 마음은 철렁 내려앉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책이라도 읽고 있으면 마치 여신이 생각에 잠긴 듯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슬픈 표정이라도 지으면 이제 d단조로 변조되는 샤콘느의 절망입니다. 남자 100명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 해도 손실이라고는 안 하겠지만 여성 한 분이라도 없어지면 그것은 제게는 크나큰 손실로 느껴질 것입니다. 니체는 심지어 “여성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도 없다”고 까지 말합니다.
저는 이 사랑스런 여성들이 우리 오도팔(오디오에 발을 잘못 들여놓은 팔푼이)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따뜻하고 귀엽고 아늑한 피조물들이 우리로 하여금 심지어는 거짓말까지 하게 만듭니다. WE300B 두 알이 15만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15만원에도 입을 딱 벌리는군요. 하긴 전구 두 알치고는 터무니없이 비싸니까요. 아마도 여성 분들은 “이 양반이 술값이 아쉬우니까 이제 별 거짓말을 다 하시는구만.”이라고 혼자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다 대고 300만원이라고는 죽어도 말 못합니다. 여성 분이 기절해서 죽거나 우리가 맞아 죽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어쨌든 거짓말 없이는 우리 오도팔의 생활이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비극이지요.

우리 남자들이 지나치게 분별이 없는 것일까요? 집안 살림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오디오에만 돈을 퍼붓는 철딱서니 없는 오도팔들인가요? 그런데 분별없이 돈을 써대기로는 여성 분들도 뒤지지 않습니다. 남자만 신용불량되지는 않습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물건들과 성형수술에 대한 여성 분들의 도취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것”이상입니다. 저는 어떤 여자 분께서 30평 아파트에 8인용 식탁을 들여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만 대상이 다를 뿐이지 철없이 돈 쓰기로 맘먹자면 여성 분들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여성분들의 이러한 도취가 보석에 이르면 이제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8면체로 깎아놓은 유리 조각 하나가 2천만 원이라고요? 노란색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반지에 푸른 색 돌멩이 하나 박으면 이게 몇 백만 원입니다. 숨쉬는 데 아무 지장 없이 잘 작동하는 데도 불구하고 불만을 품으면 천만 원쯤은 들여야 날카로운 콧날로 바뀝니다. 산이나 헬쓰 클럽으로 가서 해결해야 마땅한 뱃살도 육백만 원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남자들만 철이 없다구요? 오후 1시쯤에 교외의 한정식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만 웨이터 빼고 남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저는 그런 데서 점심 먹기에는 간이 너무 작습니다. 자, 이상한 노릇입니다. 만 오천 원짜리 점심식사는 명백한 낭비가 되는 것이지만, 천오백만 원짜리 스피커는 당연한 쟁취의 대상입니다. 여성 분들에게는 그와 반대의 느낌이 들겠지요.

오디오 생활을 놓고 벌어지는 부부 간의 갈등은 그러므로 다른 각도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왜일까요? 여성 분들은 우리 오도팔의 오디오 탐닉을 왜 그렇게도 못마땅해 할까요? 여성들은 타고나면서부터 내핍을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 남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위의 반례에서 보인 바대로 터무니없는 가설입니다. 대상만 다를 뿐이지 남녀 공히 돈쓰자고 들면 겂없이 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의문은 다음과 같이 좁혀져야 합니다. 왜 여성 분들은 ‘오디오’에 돈 쓰는 것을 그리도 싫어할까요? 이 의문은 쉽게 풀리지도 간단히 답변될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어떤 분인가가 “오디오 동호회에서 여성 회원 찾기는 십자수 동호회에서 남자 회원 찾기보다 힘들다”고 선언하신 것으로 미루어 오디오에 대한 기호에는 남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도팔들은 집안 경제를 혼자 책임지는 사람이니까 관용적으로 봐주겠다는 정도가 마누라로부터 얻어내는 최고의 선처입니다. 그것도 그 외양이 가구적인 아름다움을 지녀야 허용됩니다. 어떤 여자 분들은 빈티지 오디오에 대해 ‘쓰레기들’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쓰레기 같은 오디오뿐만 아니라 쓰레기 같은 자기 영혼에 대해서도 무슨 생각인가가 있어야겠습니다. 제가 여러 오도팔 남편과 그 부인들을 관찰해본 결과는 어떤 부인도 오디오를 자기 남편과 더불어 혹은 남편이 좋아하는 정도로 좋아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오디오를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오로지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이지 오디오에 대한 일말의 사랑 때문은 아닙니다. 오디오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 정도면 마누라로부터 얻어내는 최선의 호의입니다.

저는 예전에 어떤 분인가가-사실 이 분은 유명한 오도팔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만-스피커를 팔았는데도 마누라는 어떤 변화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얘기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마운 노릇입니다. 들고나는 오디오에 그렇게 신경을 안 쓰시니.
다른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작년에 간이 부은 제 친구가 무려 천 육백만 원을 주고 클랑필름 RE604 앰프를 들여놨습니다. 듣고는 안 사고 못 배깁니다. 테레사 베르간자의 목소리가 RE604관을 통해 증폭되었을 때 그 소리에 둔감할 정도라면 살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좋기는 좋더군요. 정말이지 저는 그 앰프를 통해 나오는 바흐의 아리아에 넋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행복의 대가를 야무지게 치렀습니다. 눈치 없는 다른 친구하나가 그 가격을 앰프 주인의 마나님 앞에서 발설하고 말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천 육백만이면 비싸진 않네. 소리에 비하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친구는 틀림없이 독신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발생한 일은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외침이 가장 먼저 얻어들은 비난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그의 비자금의 역사가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심지어는 ‘이혼’이라는 무시무시한 먹구름도 한 동안 그 집안을 맴돌았습니다. 해결은? 해결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의 마누라도 오디오에 상당하는 소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습니다. 그 집에는 현재 여러 고급 구두와 고급 투피스들이 있습니다. 옷장도 새로 하나 들여놨습니다. 참으로 공평한 해결책이었지만 그 부부의 노년 대비는 재정적으로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구입과 관련한 모든 고비들이 수많은 설득과 기만과 협박과 애걸 속에서 무사히 넘어간다 해도 진정으로 힘든 고비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용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베토벤의 장엄미사나 쉔베르크의 무조 음악을 듣고 즐길 여성이 이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데에 제 앰프 한 대를 걸 수도 있습니다. 그 여성이 에스트로겐이 적정량 나오는 정상적인 여성이었을 때라는 조건만 붙는다면 말입니다. 우리 음악 감상은 가족의 분노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여성다운 여성, 진정한 여성, 매력적인 여성이라면 절대로 그 극단에까지 밀고나가진 예술을 즐기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예술-감상적이거나 얄팍한 예술-을 즐겨야 여성다운 여성입니다. 저는 이 사연과 관련해서도 딸 셋을 키우는 어떤 노인 분의 눈물겨운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놈이 집에 들어오면 일단 볼륨을 줄여. 다음 놈이 들어오면 아예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다시 줄여. 요새는 할망구도 볼륨이 어떤 건지 알고는 계속 줄여. 도대체 들려야 듣지.” 어떻습니까, 여러분. 비통한 눈물을 흘려야 마땅하지 않은가요?

오디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텔레비전입니다. 그 바보상자는 탄생 이래로 우리 인류를 그렇게까지 바보로 만든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마나님이 주무시기 1분 전까지 켜져 있어야 만족합니다. 저는 여성분들이, 자러가기 위해서 샤워를 할 때도 텔레비전을 켜놓고, 눕는 순간까지도 켜놓고 그리고 어느 경우에는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켜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음악 소리가 연속극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대화를 방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가 됩니다. 우리 아주머니들과 텔레비전의 궁합은 온달과 평강공주의 궁합 이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물건 둘을 꼽으라면 일본인들과 텔레비전을 꼽겠습니다. 그 둘은 자기 자신이 바보일뿐만 아니라 남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서 끔찍이 애쓰고 우리의 뇌와 감성에 무차별적이고 무식한 폭격을 감행해서 우리를 피폐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똑 같습니다.

좋아하는 연속극이 끝났을 때가 또 다른 공포의 순간입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듣는 음악도 이제 끝입니다. 대화의 순간입니다. 저는 여성분들의 대화에 대한 집착을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만 어떤 경우에는 이것도 도저히 못 견딜 때가 있습니다. 여성에게 일정량의 수다가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일정량의 음악소리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수다야말로 여성의 존재 의의의 하나고, 외부 세계와의 교섭 창구이고, 자기 행복의 근원이고, 공감과 감정 이입의 중요 수단이고, 남편에게 수면이나 음악 감상을 허락하는 전제 조건이고, 자기 과시와 허위의식의 중요 표출 수단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성에게 있어서 수다란 ‘일용할 양식’인 것입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보다 더 큰 향락은 인생에 없다”라는 프랑스 속담에 저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대화는 마땅히 재미가 있거나 의미가 있거나 둘 다가 모두 있거나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상과 연속된 사건들의 상세한 묘사와 자기 연민에 가득 찬 하소연을 한참 동안 듣고 앉아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입니다. 여성들은 그들의 오랜 선배인 이브 때부터 사용되었음직한 무기를 꺼내듭니다. “사랑하지 않는군요!” 그러니 모두 들어줘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에 시달려서 몸과 마음 모두 지쳐서 집에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저는 왠일인지 지치면 서글퍼집니다. 갱년기 증상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제 집안에서의 봉사가 남아 있습니다. 무릎을 바싹 맞대고 달려드는 마눌님의 얘기를 다 들어줘야 합니다. 가혹한 생존 조건인 것입니다. 사막에 둥지를 튼 갈매기 운명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 매체가 현대인의 대화 부족과 소통의 결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 남자들은 대화에 의무 의식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조용히 혼자 있다는 사실에 부채의식까지 짊어져야 합니다. 대화란 무조건족인 ‘선(善)’인 것이지요.

남성들은 다분히 독창적이고 독립적인데 반해 여성들은 다분히 공존과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대화가 있어야 한다고 어떤 위대한 신경정신과 의사 분께서 말씀하셨는데, 지금 생존이 위협받고 있거나 전쟁 시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화가 침묵보다 더 중요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단지 여성의 본능을 만족시켜줘야 집안에 평화가 있으니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여성이 큰소리치고 사는 세상이라야 더 좋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조용한 여성’이란 말은 형용모순(contradictio in adjecto)입니다. 즉 조용하면 여성이 아니고 여성이라면 조용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이것은 마치 ‘시끄러운 조개’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지요. 여성이 조용히 앉아 있다면 지금 수줍어하고 있거나 상황이 마땅치 않거나 둘 다 이거나입니다. 생각에 잠겨서는 아닙니다. 여성들은 절대로 오랫동안 생각에 잠길 수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눈망울을 굴리며 열심히 애교를 떨어야지요. 여성들의 관심이 전화와 연속극으로 이어지는 날은 어느 정도 운 좋은 날입니다. 이제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낮은 볼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좀 아쉽지만 참을 만합니다.

여성들은 음악이 싫다고는 절대로 말 안 합니다. 예술은 좋은 것이고 또 영혼을 고양시켜주는 것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으로 보자면 학교 교육도 영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음악 좋아해요. 그렇지만 지금은 대화 좀 해야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이때 우리 남자들은 끝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줘야 합니다. 그냥 “아름다운 목소리의 꾀꼬리가 노래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주면 됩니다. 그 내용을 낱낱이 새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지 내용이 있거나 해결책을 요구하거나 철학적 숙고가 필요한 말은 아니니까요. 여성과의 대화에서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시간이지 여러분의 판단력이나 사색적 능력은 아닙니다.

아쉬운 것은 여성들은 조용히 있을 때의 자기 자신들이 얼마나 더 매력적인지를 알면서도 일단 친근해지면 시끄러워진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 관리가 필요 없어서일까요? 아무튼 낯선 남자와의 만남에서 일단 새침을 떼고 조용히 있는 것은 새침한 것이 시끄러운 것보단 낫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기 본능을 억누르는 것이지요. 저는 언젠가 무심코 텔레비전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봤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일한 탤런트를 다른 연속극에서 또 우연히 봤는데 이번에는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여자 탤런트가 전에 벙어리 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예뻐 보였는데 다른 연속극에서 말문이 터진 것을 보자 모든 매력이 날아가버린 것이지요. 천사 같은 아가씨가 평범한 아가씨로 변모한 것입니다. 정말이지 벙어리일 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모 마리아처럼 아름다웠는데요. 그러니 벙어리 인어공주가 버림받았다는 설정은 안데르센이 크게 실수한 것입니다. 벙어리 공주라는 사실은 더욱 사랑받을 요건이지요. 얼마나 좋은가요. 마음놓고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이런 상황 속에서 탄노이를 듣는 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탄노이는 통울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스피커이고 적절한 통울림이 있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음량이 요구됩니다. 음량을 서서히 줄여나가면 어느 순간 저음이 아예 안 나옵니다. 유닛 자체의 소리만이 나오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 저음은 끝나는 것이지요. 반면에 유닛 소리만을 주로 듣는 독일계의 비오노르나 클라톤은 적은 음량에서도 저음을 내줍니다. 낮은 소리로 음악을 듣기에는 독일 계열 스피커들이 유리합니다. 우리 탄노이 애호가들은 그런 점에서 더 큰 곤욕을 치르는 것이지요.

더하여 오토그래프는 상당한 공간을 요구합니다. 소리 좀 마음 놓고 들어보겠다고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가면 엄청나게 벙벙거립니다. 스피커 업고 산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도대체 오디오와 여성과의 불화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남자들은 오디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내일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간다거나 새로운 침대가 들어온다거나 커튼을 새로 한다 해도 우리는 무심코 잠듭니다. 어떤 여자 분은 잠 못 들고 설렙니다. 그러나 새로운 오디오는 문제가 다릅니다. 내일 새로운 오디오가 들어온다고 하면 우리는 오늘 밤에 잠을 못 이룹니다. 잘 듣고 있던 오디오에 문제라도 생기면 하얗게 질립니다. 해결될 때까지는 속이 석탄 백탄 다 탑니다. 모 유명인사가 결혼을 하건 이혼을 하건 우리에겐 케이블 교환만큼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그러나 정류관을 업그레이드했을 때의 음의 변화는 미국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보다도 더 큰 사건입니다. 평소에는 10kg짜리 쌀 봉지도 못 들던 사람이 30kg이 넘는 오디오는 잘도 듭니다. 드는 정도가 아니라 주차장까지 운반도 합니다. 어떤 외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첫사랑 이후에 오디오에 대한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오디오에 대한 감정은 혐오와 분노입니다. 우선 시끄럽고, (빈티지일 경우에는) 절대 예쁘다고는 할 수 없고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듭니다. 마땅히 집안 살림살이에 보태져야 할 돈이 시끄러운 쇳덩이에 쓸모없이 낭비되니 허망하고 분노가 치밉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 녀석들이 남편과의 대화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일찍 퇴근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디오 앞에 앉아 그 녀석들하고만 친한 척하니 정말 못 참을 노릇입니다.  

예술을 향유한다고는 해도 예술을 그 근원적인 의미에 있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성은 없습니다. 즉 우리를 감동에 빠뜨리고, 우리 영혼을 고양시키고,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고 세계를 머무를 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의미에 있어서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우리 사랑스런 여성 분들은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있어 예술이란 하나의 장식이고 허영이고 감상입니다. 여성에게 있어 음악은 <열린 음악회> 정도의 수준이 가장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여성들은 예술이란 삶 그 자체의 문제고 우리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엄정하고 준엄한 것이란 사실을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여성인가가 대담하게도 남자들과 대등하게 예술에 대해 논하고 자기 자신이 의미 있는 예술가인 경우는 확실히 에스트로겐이 덜 나오는 여성입니다. 즉 남자 같은 여자인 것이지요. 저 그리스의 사포나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등의 여성 예술가들이나 퀴리 분인 같은 천재 과학자나 마리 로랑생 같은 화가는 사실 여성의 육체에 갇힌 남성이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제 여자 제자들에게 항상 다른 일을 하기를 권했고 그래도 굳이 하겠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곤 했습니다. “남자처럼 생각하고, 남자처럼 행동하고, 스스로가 마치 남자라고 믿어라!”

여성과 남성은 확실히 다릅니다. 저는 이 다르다는 데에 차별을 담지는 않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생물학적이기 때문에 숙명적입니다. 누구도 부탁해서 성을 선택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지요. 여성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숙명, 거의 전적이라 할 만한 숙명은 그들이 아이를 임신하고 분만하고 성숙시키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볼 때의 신혼부부들은 남자와 여자가 확연히 다른 심적 태도를 보입니다. 여성은 본능적으로 아기에게 사랑을 지니지만 남성은 어리둥절해 하고 낯설어 합니다. 남자는 씨를 퍼뜨리도록 운명지어졌고 여성은 그 씨앗을 잘 보존해서 종을 이어가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여성에게 있어 자기 자신이란 종을 운반하는 하나의 개체에 지나지않게 됩니다. 여성은 평생을 통틀어 가질 수 있는 아이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남성은 만들자고 들면 1개 여단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 있어서 자기 아이는 엄청나게 소중한 것이지요. 난자가 정자보다 훨씬 값비싼 것이지요. 여기에 더하여 인간이란 종은 유난히 성숙 과정이 길뿐만 아니라 자기 보호 능력이 떨어지는 종입니다. 사슴이나 말은 태어나서 5분만 지나면 이미 달릴 수 있고 늑대나 치타의 어린것들은 어미가 없을 때에 쥐 죽은 듯이 숨어 있을 줄 압니다만, 인간의 유아는 달릴 수도 없고 눈치도 없습니다. 졸려도 울고 배고파도 울고 심심해도 울곤 합니다. 도대체 어미가 붙어 있지 않는 한 보호할 방법이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보호가 십수 년이 이어져야 간신히 독립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인간의 경우에는 여성들의 모성 본능이 유난히 강해야 하고 길어야 합니다. 즉 여성들이 남성들 보다 동물적 본능에 더 많이 묶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명과 문화와 예술은 본능과는 배반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현실에 매몰되어 있으면서 창조적일 수는 없습니다. 여성 본래의 생물학적 임무는 종의 보존인 만큼 전적으로 안전과 안정과 현상 유지가 중요한 것이지요. 진화의 단서는 언제나 모험을 무릅쓴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수많은 어류 중에 누가 양서류가 되었을까요? 어떤 물고기인가가 물 속 세계의 따분함에 지쳐서 물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때때로는 나무를 기어 올라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을 테지요. 그리고 그러한 대담한 시도를 한 대부분의 물고기들은 물에서도 뭍에서도 온전하지 못한 채로 멸종했겠지요. 어쩌다 살아남은 어떤 종인가가 양서류와 파충류로 이어지는 진화에 불꽃을 당겼고 인류도 탄생도 그러한 물고기의 모험의 대가인 것입니다. 창조적 삶이라는 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울 만큼 무모한 삶입니다. 남자들이 여성들보다 더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은 더 잘나서가 아니라 생물학적 책임을 덜 짊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장 어린 것을 보호해서 종을 유지시키기도 얼마나 많은 난관을 무릅써야 하는데 혁신과 진화라니요.

본격적인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여성들의 무관심은 이렇게 해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예술을 위해서 파멸적인 도취와 자기 파멸을 겪을 수 있습니다. 단 한 경우는 빼놓고 말입니다. 종의 보존 문제! 그러므로 예술에 대한 여성의 관심은 예술 그 자체를 향하기보다는 예술과 관련된 다른 어떤 것을 향합니다. 가령 예술 애호가를 자처할 경우에는 확실히 더 좋은 수컷을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에 대한 여성의 사랑은 남자에게 보여주고 아양을 떨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만 잔인하고 식견 없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도 애정 어린 눈으로 여성을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요. 여성들이 어떤 음악인가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그 연주자가 멋있거나 혹은 그의 넥타이가 멋있거나 혹은 그 음악이 그녀의 첫사랑의 연인을 환기시키거나 안락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 음악 그 자체가 예술성이 있다거나 깊이가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는 훌륭한 여성 연주자도 만날 수 있고 훌륭한 여성 후원자도 만날 수 있습니다만 천재적인 여성 작곡가는 만날 수 없습니다. 창조라는 것에는 다분히 자기 파멸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자기를 둘러싼 현실에 무심하고 자기가 먹고사는 문제에도 초연하고 오로지 목숨을 걸고 덤벼들 때 의미 있는 창조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그 발생 때부터 종을 유지시키라는 본능이 심어져 있습니다. 자기가 파멸을 하면 누가 종을 지키나요.

여성의 예술 애호는 그러므로 허영과 가식이거나 예술이 환기시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계기와 맺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모두 생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 좋은 씨앗을 지닌 수컷을 만날 기회라거나 자기 유전 인자를 좀 더 안전하고 풍요롭게 부양해줄 수컷을 배우자로 맞을 기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성은, 그 중에서 특히 젊은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배제한 채로 삶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도 스스로 독자적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성의 보호와 인내가 없이는 그들의 어린 것들을 십 수 년 동안 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동물이 일정 기간 동안만 암수 간에 성적 교섭이 있지만 인간만은 연중 그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암컷으로부터의 그러한 성적 봉사가 없다면 어떤 수컷도 그들을 십 수 년이나 부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하나는 어떤 여자의 경우에는 예술 그 자체에 집중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여성도 있습니다. 어떤 여성의 경우에는 카트리지와 MC트랜스 간의 임피던스를 따지기도 합니다. 이 경우 그 여성은 확실히 남성적 성격을 지닌 여자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어떤 남자도 전적으로 남자이지만은 않고 어떤 여성도 전적으로 여성이지만은 않습니다. 남성에게서 어느 정도의 에스트로겐은 나오고 여성에게서도 어느 정도 테스토스테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남성의 경우에는 여성 호르몬이 평균보다 많을 수 있고 어떤 여성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남성 호르몬이 좀 더 많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남성들의 머리가 벗겨지는 것은 그 분들의 경우 여성 호르몬이 평균보다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스트레스에 의한 탈모가 아니라 자연스런 탈모의 경우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성적 흥분은 테스토스테론과 관련됩니다. 여성은 성적 흥분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아프리카의 야만적 부족에게나 있는 신념입니다. 여성도 많이 흥분합니다. 여성 같은 남자와 남자 같은 여자가 있습니다. 저는 단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경우만을 보았을 때, 그리고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남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온 것입니다.

두 번째의 반론은, “어떤 여성의 경우는 이제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남성의 부양이 필요 없는데도 여전히 예술이나 문명에 무관심하다”라는 것입니다. 제 논지와는 이상한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화나 관습에는 형식과 내용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용어로 말하자면 형상(Form)과 질료(Matter)가 있다는 것이지요. 형식과 내용은 함께 합니다. 즉 여성의 모성과 남성으로 부터의 보호의 필요가 여성으로 하여금 현재의 그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용이 바뀐 경우가 있게 되었습니다. 즉 여성이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성 노동력의 필요와 사회적 도움이 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2세의 양육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요. 그러나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죽은 세대가 산 세대의 목덜미를 누른다(마르크스)”는 것이지요. ‘여성답다’는 말에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가정한 편견이 들어 있지만 어떤 여성도 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수만 년 동안 축적된 본능이 뼈 속에 살아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일반적인 여성들은 경제적 능력을 갖추었다 해도 여전히 파멸적인 예술 활동은 못 하는 것입니다. 예술에 대한 애호가 피상적이거나 가식적이라고 해서 더 이상 여성들을 비웃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숙명을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명백히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잔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성적 문화가 없이 오로지 전진과 혁신만을 모토로 하는 남성적 문화만 있었더라면 아마 인류는 절멸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딪치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종은 없습니다. 반면에 남성이 없이 여성만이 있었더라면 우리 인류는 아직도 동굴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혁신과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할 의사가 여성에게는 자발적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해와 관용과 공감입니다. 이것들이 적당히 합쳐져서 승화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부릅니다. 즉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만이 존속과 개선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오디오 매니아도 자기 부인을 원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무식하다거나, 몰예술적이라거나, 돈밖에 좋아하는 게 없다거나 등의 상처 입히는 말로는 원망하면 안 됩니다. 예술에 대한 그러한 몰이해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존속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여성 역시도 남편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남성들은 엄청난 생존 경쟁 속에서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오디오는 유일하게 가능한 자기실현이고 꿈과 이상인 것입니다. 지나치면 물론 안 됩니다. 오디오 때문에 카드빚을 내거나 일상적인 직업이 방해받거나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때는 분노와 적개심을 보이기보다는 부디 호소와 탄식으로서 남편에게 상황을 환기시켜야 합니다.

나를 봐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내가 존재하지 않고 내가 봐주지 않을 때는 상대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은 양자역학과 상보성 이론의 궁극적인 결론입니다. 어떤 기적 같은 우연히 길을 잃고 헤매던 불쌍한 떠돌이별을 나의 궤도에 던져 넣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삶은 이해와 조화 속에서 훨씬 가뜬하게 굴러가게 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남성들의 삶은 고달픔과 무의미입니다. 어떤 남성도 탐욕 때문에 그렇게 힘들고 바쁜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단지 일상을 영위하고, 오늘과 내일을 간신히 엮어가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생존 경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떤 일탈도 없이 일개미처럼 지내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유희 없는 근로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 것은 영국 속담입니다만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사람에게도 맞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오디오란 어떤 경제적 동기나 이해관계 없이 몰두하게 되는 유희입니다. 아름다운 소리와 관련된 유희지요. 여성들은 현실적 계기와 맺어지지 않은 채로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이 이상한 취미를 분노와 혐오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만 자기 자신의 ‘이타심’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숙고해봐야 합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근원적인 측면에서는 누구도 진정으로 이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구나 이기적입니다. 단지 남성은 예술과 유희에 매여 있고 여성은 생물학적 동기와 본능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기심’은 동물의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단지 그 이기심이 ‘지혜로운 이기심’이 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오디오 매니아들에게는 절도와 절제와 분별이 지혜로운 것이고 여성들에게는 이해와 관용과 자기 반성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여성들이 오디오에 관심이 없는 현실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여성의 경우 도구나 기계에 상대적으로 별 호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남성들은 대체로 새로운 기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기계에 관한 한 남성들이 얼리 어답터(early adoptor)인 것이지요. 평생에 걸쳐 여성들이 사용하는 도구란 기껏해야 칼과 가위와 바늘과 실과 진공청소기, 냉장고, 텔레비전 정도입니다. 여성들은 그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하지는 못 한 채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정도만을 지닙니다.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기계를 뜯어보기를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에 시계나 라디오를 분해했다가 곤욕을 치룬 경험이 남자들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조립 후에 부품이 남거나 전원을 연결했을 때 연기가 폴폴 난 적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기계의 작동 원리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전형적인 남성의 경우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계에 관심이 많은 재미있는 여자 분도 있고 기계에 전혀 무관심한 색시 같이 얌전한 남성 분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남자들을 공구 상가에 데려다 놓으면 흥분합니다. 코를 벌름거리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로 기쁨에 가득 찬 표정을 짓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신기하고 재밌기 짝이 없습니다. 도구에 대한 이러한 태도 차이도 앞에서 말씀드린 남녀의 역할 차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변화와 혁신을 원하는 남자는 새로운 도구의 채용에 의해 우리 일상적인 삶이 많이 변화되고 많이 개선되리라고 믿습니다. 반면에 여성에게는 평화와 온존이 자식을 기르기에 훨씬 더 좋은 환경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새롭고 변화된 삶을 부르건 그렇지 않건) 새롭다는 사실 자체에 호의적일 수 없습니다.

여성은 도구 대신에 직관이라는 본능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표현도 못하는, 완전히 무기력한 아이들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감각적으로 아기의 상황을 포착해야 하고 피부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기분’이라고 부르는 직관에 관한 한 여자들이 확실히 뛰어납니다. 전형적인 여성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들의 모든 기질은 아이를 안전하게 잘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디오라고 하는 상당히 복잡한 기계에 대한 여성들의 무관심은 그러므로, 그것들이 오늘의 삶에 직접적인 쓸모가 없다는 사실에 그것들 역시 여성들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기계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남자들은 기계를 사용하고 그 작동 원리를 파악해 나가는 데 있어서 상당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잘 알고 지내는 부부의 부인께서 “롱암이 숏암보다 더 좋은 메커니즘이라고 할 만한 이유”에 대해 지난밤에 남편 분으로부터 장장 삼십 분 동안 강의를 들었다고 웃으면서 얘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롱암이 어떤 면에서 더 좋지요?”라고 물으니 그 부인께서는 머리를 저으며 “들을 땐 알았는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자입니다. 이 귀엽고 다정스러운 동물들을 여러분의 딱딱하고 싸늘한 기계의 세계로 인도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곧장 그들의 세계-자식과 남편과 함께 한다는 즐거움을 최고로 아는-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무기물 적 세계를 싫어합니다.

우리 문명의 변화는 내일을 위한 오늘의 희생에 빚지고 있습니다. 도구를 창안하고 그것을 제작한다는 것은 오늘의 여러 가지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편 그 제작이 성공적이었을 경우 미래에 엄청난 생산력으로 보상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초의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여러 노력의 경우 그들은 그들의 현실적인 삶을 많이 희생시켰고 미래 세대는 엄청나게 많은 혜택을 자동차로부터 얻게 되었습니다. 오디오라는 경이적인 기계의 경우 그 소유자는 ‘에스테르타지’가(家)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그리고 훨씬 더 능란한 악단원들을 거느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미래를 위한 오늘의 희생이 어떤 추상적 성격을 띨 경우 별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지금, 여기서’ 어떤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남자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거지요. 우리의 여러 꿈들이 여성에게는 한갓 백일몽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의 미래의 꿈을 곁들여서 여자 분을 유혹했고 그것이 결혼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젊은 시절의 꿈 때문에 여성이 여러분에게 인생을 의탁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꿈을 품을 줄 아는 패기 그 자체가 좋았을 뿐인 것입니다. 꿈의 내용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또 그 꿈의 실현 가능성을 믿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오디오에 대한 여성 분들의 무관심과 남성 분들의 열광의 근거가 모두 밝혀진 것 같습니다. 하이든은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밤과 낮의 교체와 강약의 교체에 의해 우주와 삶은 영위됩니다. 마찬가지로 ‘태초에 음과 양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도 옳을 것 같습니다. 밝음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남성이 있으면 여성이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세계의 반쪽씩을 나누어 가진 채로 서로 조화와 반발로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너무 조화만을 생각하면 변화가 없고 너무 반발과 갈등만을 겪으면 좌절감과 분노 속에서 우리 삶은 파멸로 치닫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확실히 다릅니다. 이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당위로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과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월드컵이나 메이저리그에 참여한다면 온갖 신기록이 양산될 것입니다. 반면에 남성들은 아이를 낳을 수도 없고 잘 키울 수도 없습니다. 여성들 없으면 성문 닫아야 하고 인류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어떤 분들은 한숨지을 것입니다. 결국 서로를 이해하기는 틀린 노릇이라고요. 그러나 그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여성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여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남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가 라는 사실을 그 근거에서부터 ‘안다’라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지성과 숙고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어떤 심리적 경향을 지니거나 어떤 행동을 지닌 사람들의 경우에도 만약 우리가 그(혹은 그녀)의 태도의 근저를 이해하고 그 동기를 이해하면 더 이상 차갑게 대하거나 분노로 대할 수만은 없게 됩니다. 오히려 측은지심이 생기고 다같이 불쌍한 중생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우리 증오와 분노의 동기에는 반드시 몰이해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잘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방법론적으로라도 그들의 입장에 몸을 담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좋은 사회적 삶의 근거는 지성과 역지사지의 태도인 것입니다.

 

두 얼굴 10

우리 모두는 삶에 있어서와 물리적 우주에 있어서의 진리의 존재와 그 확고함에 대한 암묵적 신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은 어리석고 결국 죽을 운명이고 공간적으로 제한된 운명이지만 그 한계를 벗어난 어느 천상에는 확고부동하고 항구 불변하는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품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삶이 한갓 순간에 지나지 않고, 그 순간   마저 탐욕과 미망 속에 헛되이 보내어진다 해도 우리는 우리 삶의 보든 것들을 ‘영원의 빛에 비추어’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차라리 우리의 순수함과 애처로움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처님께서 일찍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설파하셨고 또 부처님의 심오한 통찰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우리는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빛나는 별이여, 나도 그대처럼 확고하게 되고 싶어라”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우리는 모두 동굴 속에서 사슬에 묶인 채로 그림자만을 보고 산다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벗어나서 천상의 이데아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거기를 향하는 희망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실적 삶 전체를 미망으로 돌린 것이지요.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성과 노력만 있으면 결국은 진실에 우리를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지성이라니요? 도대체 지성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그 지성이란 것은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현대 철학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근세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은-역사학자들은 별별 학설을 다 들이댄다 해도- 지성에 대한 신념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구교가 심정이 아닌 지성으로 신을 포착할 수 있다는 오류를 저질렀고, 그러므로  그것을 역전시켜 심정으로 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영국의 데이빗 흄은, 외부 세계에 객관적 실체는 없고 단지 우리의 인식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느 현대의 과학 철학자는 “우주의 궁극적인 모습은 결국 우리의 얼굴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소위 말하는 지성의 한계는 결국 언어의 한계로 까지 축소됩니다.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고 사건의 총체”이고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요 인류는 일찍이 고대 아테네에서 인간 지성에 대한 신념을 그 끝까지 밀고 났고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이 신념은 다시 한번 복구되는데, 우리 시대는 이러한 신념을 꽤 오래전에 잃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진리하고 보통 말해지는 것은 절대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상대적인 인식인가?” 상대적인 인식이라고 말하시는데 걸겠습니다.

우리 시대는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신념-신에 대한, 지성에 대한, 과학에 대한- 이 모두 죽었지만 아직 상속자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상속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의 운명이란 본래 시냇물의 부평초처럼 부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생명이란 들의 풀에 지나지 않고 그 영광은 풀의 꽃에 지나지 않는 바,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되.....”

이러한 철학은 전형적으로 유럽적인 것입니다. 끝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왔고 마침내는 파국적이 양차 대전에서 인류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목격하고 체험했던 유럽인들에게는 이제 기대를 걸 곳도 활기 있게 살아나갈 의욕도 없어진 것이죠. 전후 문학 중 가장 슬픈 소설 중 하나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러한 슬픔을 너무도 애달프고 두렵게 포착합니다. 제 1차 세계 대전후 태동된 다다이즘은 인류의 정신적 파국을 가장 거칠고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선언하고 맙니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우리의 심정적 태도는 어떠한 것이 될까요?  

운명의 비극성과 덧없음에 대한 비장한 직시가 우선 하나의 태도가 됩니다. 까뮈가 말하는 바와 같이 몰이해하고 불친절한 우주가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에 대한 끝없는 직시와 절망적인 삶의 영위입니다. 삶이 행복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역겨운 허위의식을 벗어던지고 철두철미하게 무의미와 절망을 삶의 근원적인 태도로 살아나가는 것이지요. 유럽의 실존주의자들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비장함이 감도는 삶의 태도이지요.

그러나 미국식 해결책은 조금 달랐습니다. 미국의 지성인들 역시 절망합니다. 윌리암 포크너, 헤밍웨이, 도스페서스, 피츠제럴드 역시 절망합니다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향락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물론 그러한 향락은 전형적인 향락은 아닙니다. 삶의 무의미와 덧없음에 대한 행동주의로서의 반향인 것이지요. 그러나 해골이 그들의 파티를 내려다  보지요. 신이 죽은 이 세계에서 지상세계는 온전히 인간의 몫인 거고 자기들에게 부여된 시간을 절망을 잊고 지내기 위해서는 향락이 좋은 수단이지요.
  
유럽의 3극관과 미국의 유럽 3극관은 이 두 세계관을 정확히 반영합니다. 비장한 유럽 관과 향락적인 미국 관 이라고나 할까요. 유럽을 대표하는 3극관은 Ed, Ad1, RE604, Da, PX25, PX4 등이 있고 미국을 대표하는 3극관은 300B, 2A3, 45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Ed관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먼저 지멘스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멘스는 다시 신관과 구관이 있습니다. 신관은 메탈베이스를 노란 종이로 둘러친 것이고 구관은 그 베이스를 붉은 종이로 둘러친 것입니다. 구관은 그 소리가 부드럽긴 한데 해상도가 떨어지고 소리가 야무진 맛이 신관보다 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명이 짧습니다. 보통 RE604의 수명이 8000시간이고 지멘스 Ed구관이 12000시간 정도이고, 지멘스 Ed신관이 16000시간 정도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구관이 신관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독일 현지에서도 신관이 비싸고 일본에서는 신관이 구관보다 거의 두 배 비쌉니다. 신관이 더욱 선명한 소리를 내고 스피커 구동력도 더 좋고 고역도 더 가늘고 섬세합니다.

그리고 클랑필름 사와 텔레푼켄 사에서 나온 Ed가 있습니다. 보통 Ed라고 하면 지멘스 사의 것을 말하지만 사실은 클랑필름 사의 것이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클랑필름 사의  Ed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메탈베이스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이스가 베크라이트로 된 것입니다. 메탈베이스의 클랑필름 Ed 관은 매우귀합니다. 독일 사람들도 ‘sehr rar (very rare)’라고 말합니다. 텔레푼켄 사의 것은 베이스가 전부 베크라이트입니다.

마지막으로 발보 사의 Ed관이 있습니다. 발보 사는 Ed와 Ad1을 구분 없이 만들었습니다. 단지 7핀 짜리는 Ed라고 이름 붙이고 오리발 (side contact)로 된 것은 Ad1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발보사의 Ad1은 Ed관으로 분류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단 그 음색이 완전히 Ed쪽이니까요.

그러므로 지멘스 Ed, 클랑필름 Ed, 텔레푼켄 Ed, 발보Ed, 발보Ad1이 모두 우리가 보통 말하는 Ed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클랑필름 사의 Ed관이 가장 좋은 소리를 내는 것으로 들었고, 그 다음으로 지멘스 Ed 신관, 지멘스 Ed 구관, 텔레푼켄 Ed, 발보 Ed 순으로 좋게 들었습니다. 특히 클랑필름 사의 Ed는 매우 놀라운 소리를 냈습니다. 그런데 발보 Ed관 중에는 메시 플레이트로 된 것이 있는데  이 종류의 관 역시 깜짝 놀랄 정도의 소리를 냅니다. 제게는 이 관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평생에 유일하게 발견한 것인데 짝을 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Ed관은 매우 섬세하고 예쁜 고음을 가지고 있고 전체 대역에서 부드럽고 고운 음을 냅니다. Ed관은 심지어 “벼랑 위에 핀 꽃” 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정말이지 고역으로 올라갈 때의 그 아슬아슬한 청초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줍니다. 더 이상 훌륭할 수 없다는 표현만이 이 관에 대한 제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얼핏 들으면 무심한듯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서 듣고 완전히 음악에 몰두하게 되면 정말 훌륭한 관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선 슬픈 음조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쓸쓸한 비장감에 젖어 들게 됩니다. 특히 샤콘느가 단조로 변조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솟아나옵니다. 공감과 슬픔과 외로움과 서늘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의 덩어리인 것이지요. 저는 바하의 1번 프랑스 조곡을 듣다가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 단조의 미뉴엣이 얼마나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지 행복감에 울고 말았습니다. 저는 행복해서 운다는 것을 그때야 처음 알았습니다. 연주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 듣는 것만도 영광인 곡이지요. 시도하다 깨끗이 실패했습니다.

Ed관은 증폭률(뮤값)이 4입니다. 낮은 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천천히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PX25는 증폭률이 6으로서 약간은 급하고 위풍당당하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에 Ed관은 느리고 슬픕니다. 신념을 잃은 유럽인, 갈 곳을 잃고 부유하는 덧없음, 늙어가고 있는 영광스러웠던 유럽- 이 모든 것이 그 관에 들어 있습니다. 진공관으로 표현된 ‘유럽의 몰락(슈펭글러)’이라고나 할까요. 거기에다 Ed관은 특유의 품위가 있습니다. 도대체 거칠거나 부족한 데가 전혀 없는 관으로 특히 고역으로 아슬 아슬 하게 치솟을 때의 상승감은 마치 고딕 건조물의 내부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느낌을 줍니다. 마치 대리석으로 매끈하게 깎아놓은 듯한 Ed관의 음은 감히 최고의 소리로 평가 받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탄사모>들에게는 Ed관이 추천할 만한 진공관입니다. 우선 싱글로는 4W, 푸시풀로는 10W를 내기 때문에 밀폐형 인클로저가 아닐 경우에는 Ed싱글로도 모든 탄노이를 구동할 수 있습니다. 저는 텔레푼켄 싱글과 자작 푸시풀을 사용하고 있는바 양쪽 다 만족스럽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푸시풀의 경우에는 WE출력트랜스와도 조화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WE출력트랜스는 일반적인 바보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절대로 화려한 음을 내는 트랜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섬세하고 가냘프고 표현적인 음을 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WE 171C가 잘 어울립니다.

저는 <두 얼굴 1>에서 탄노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파워 앰프는 PX25를 추천했습니다만, 탄노이는 Ed와도 잘 어울립니다. 탄노이 역시도 WE 스피커와 JBL 스피커의 철없는 음을 내는 스피커는 아닙니다. 약간 슬프고 부드럽고 숙성된 음을 내지요. 그런 의미로 본다면 PX25와는 다른 측면에서 탄노이와 좋은 궁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탄노이 인클로저 특유의 목질(木質)의 홀 톤은 Ed관으로 단조 음악을 들었을 때 단연 백미(白眉)를 보여줍니다. 혼 스피커나 기타의 스피커가 내지 못하는 애조 띤 분위기- 마치 <여인의 사랑과 생애>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를 내 줍니다.

Ed관은 듣는 사람을 의식해서 만들어진 관은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해내는 전형적인 독일적 관입니다. Ed관으로 만들어진 앰프를 듣고 있으면 그 관이 참으로 초연하고 천상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만든 관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까지도 받습니다. 비장함이 신비감까지도 자아내는 것이지요.

 

두 얼굴 11

저는 언제나 단순하고 순수하고 소박한 인품이 가장 아름다운 인간미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아마도 제가 싫어하는 성향은 이와 반대되는 것들이겠지요. 치장, 허영, 허위의식, 거드름 등. 본래 모든 역겨움은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스스로를 더 과대평가하는데서 나옵니다. 누군가가 “근엄이란 정신적 결여를 육체적으로 때우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제 인생살이의 경험상 매우 정확하고 냉정한 야유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거드름을 많이 피우며 온갖 근엄을 내비치는 사람들이 대체로는 머리가 둔하고 인간성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사람들이 지혜롭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겸허와 내적 자신감은 같은 것입니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이 솔직할 수 있고 또 그 솔직함은 겸허로 이르게 되니까요.

 저는 누군가가 “나는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물으니까 소설 작가들이 자기 감상을 끝도 없이 유치하게 늘어 놓으며 장황하게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것이 역겹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어설픈 문학가들은 간결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이론상 가장 이상적인 문장은 명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형용사와 부사구들을 이리저리 늘어놓으며 온갖 끈적거림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글깨나 쓴다는 작가들은 상투적인 감상들을 늘어놓으며 독자를 진저리나게 합니다. 문학이 죽었다고 얘기합니다만 요새 우리나라에는 문학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소설들은 한갓 수다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학이 죽은게 아니라 문학가가 죽은 거지요.

 스피커 역사에 있어서 탄노이의 성공은 간결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탄노이는 기술적으로 대역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그 구성을 최대한 간소하게 가져갔으니까요. 물론 이것 외에도 탄노이의 여러 장점이 있지만 일단 간결하다는 점에서 탄노이는 기술적으로 탁월합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지껄이는 것보다는 지껄일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껄일 만한 사유나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조용하고 간결합니다. 경박하고 얇은 사람들이 항상 시끄럽습니다. 망치로 징을 두드리듯이 시끄럽습니다. 자기 치장과 소란스러움. 지겹습니다.  물론 풀레인지가 더 간결합니다만 이 경우에는 지나치게 대역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1만 2천 헤르쯔 이상은 안 나옵니다. 탄노이 이후로 많은 스피커 제조 회사들이 탄노이의 기술을 모방했습니다만 탄노이 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음악성 있는 소리”라는 문제가 대두되고 여기에서 탄노이는 특유의 품위와 호방함으로 여타 스피커와는 차원을 달리했습니다. 탄노이는 단순하고 순수하고 소박합니다. 그리고 어떤 치장이나 소란스러움이 없습니다. 허심탄회하고 시원스럽지요. 

저는 일군의 오디오 애호가들로부터 열광적인 찬사를 받는- 특히 성악 재생에 있어-어떤 고급 스피커를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제 취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 내보냈습니다. 매우 훌륭한 기기였지만 탄노이의 호방함이 없었습니다. 소리가 너무 복잡하다보니까 어린애가 칭얼거리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마누라가 바가지 긁는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아쉽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제 취향은 복잡한 것 못 참는 것이니까요. ‘간결이 지혜의 요체’이고 ‘존재는 이유 없이 증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이 진공관에도 적용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캐소드나 그리드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소리가 더 조잡해지고 거칠어지고 왜곡됩니다. 사실 저는 이 사실을 말하기를 여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입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취향일 뿐입니다. 저는 어쩌면 단순히 제 취향과 어긋난다고 해서 방열관이나 다극관에 대해 부정적인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으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렇게 치부해 주십시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초단과 드라이브관으로 3극 직렬관을 사용하게 되면 많은 분이 제 견해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Aa를 초단으로 Ca를 드라이브 관으로 출력관  Ed를 드라이브 했습니다. 이 앰프는 원래 텔레풍켄의 Ad1 SE 였습니다만 제 호기심이 오리지날 빈티지 앰프를 날려 버린 것입니다. 제게 오리지낼리티는 부차적인 의미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소리니까요.

그런데 이 앰프를 처음 듣고는 실망 했습니다. 좀 심심했습니다. 소리가 풍부한 맛이 없었습니다. 약간은 초라하고 삭막했습니다. 오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연주회장에 가면 어딘가 실황이 더 초라하고 삭막하고 힘이 없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이지요. 저는 씁쓸한 헛웃음을 날렸습니다. “또 기백만 원이 날아갔구나. 이 따위 짓은 그만 해야겠다. 실험정신이 왕성한 것은 좋지만 집안 거덜 나겠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습니다. 제 Ed앰프는 여전히 그 초라한 소리를 계속내고 있었고.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 소리가 좋아지기 시작한 겁니다. 사실 엔지니어도 이러한 구성에 반대 했었습니다. 직렬관 드라이브는 댐핑 팩터가 너무 작아서 힘이 없고 저역이 안 나온다는 이유였지요. 저는 제 고집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의 말도 좀 듣고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이 초라한 소리가 매력적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초라함이 소박함으로 바뀌고 약한 소리는 진실한 소리가 되고 삭막함은 간소함이 된 것입니다. 제가 바뀐 것일까요, 아니면 직렬관 드라이브가 원래 이렇게 좋을 수 있는 것일까요? 괜찮은 여자는 첫 눈에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한가락 했었는데, 첫 눈에 들어올 정도로 화려한 여자는 곧 싫증납니다. 첫 눈에는 마치 안개에 쌓인 듯이 애매하고 초라한 듯한 여자가 시간이 흐를수록 매력적인 여자로 드러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 여자가 지성적이라면 이 매력은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해 갑니다. 소박하고 순결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니 이제 성적 매력까지도 생겨나는 것이지요. 사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두세 번째 눈에는 싫증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은 3박4일이 아닙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여자를 골라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부디 이 왕년의 바람꾼의 충고를 새기기 바랍니다. 

  저는 홀린 듯이 이 직렬관 드라이브 앰프를 듣고 있었습니다. 들을수록 소리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는 LCR 포노단을 사용하는데 증폭관이 모두 3극 직렬관 (101F, HL2)입니다. 그리고 제 라인단은 WE49B인데 역시 264A라는 3극 직렬관을 증폭관으로 채용한 기기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3극 직렬관으로 된 시스템인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앰프를 클랑필름의 RE604 SE로 바꿔들었습니다. 저는 엄청나게 실망 했습니다. 이 앰프는 REN904로 드라이브 한 것인데 그 사납고 왜곡되고 거칠고 해상력이 떨어지는 소리에 저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3극 직렬관의 가장 큰 장점은 뛰어난 해상력과 소리의 직접성에 있습니다. 저는 어떤 얼치기 오디오 애호가가 “지나치게 해상도가 높으면 소리가 사나워진다”고 주장하는 말을 듣고는 기가 막혀서 웃음조차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해상도가 높으면 소리는 부드러워집니다. 이것은 마치 펜싱과 도끼의 차이와 같습니다. 펜싱은 정교하고 날카롭고 빠른 운동입니다만 오히려 그 동작은 우아하고 부드럽고 선명합니다. 도끼를 휘둘러 대면 그 동작은 거칠고 사납습니다. 본래 정확하고 정교한 언어는 글을 부드럽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언어는 글을 거칠고 우악스럽게 만듭니다. 정교한 사격은 총알 하나로 토끼를 잡을 수 있지만 정교하지 않을 경우 토끼를 잡으려면 마구잡이로 대포를 쏘아대야 합니다.

정교함은 부드러움을 부릅니다.  우리는 보통 공부를 잘한 사람들이 차갑고 냉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가까스로 학교 공부를 잘한 겉똑똑이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지적인 사람들은 겸허하고 부드럽습니다. 날카로운 지성이 오히려 심정적 온유함을 부르는 것이지요. 머리가 좋고 사유가 선명한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적 결함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또한 스스로도 그러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자기 인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온유하고 관용적입니다. 우리는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 사람들은 사실 영어, 수학이나 잘한 사람들이지 지성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초일류 대학을 나온 어떤 사람들이 천하에 둘도 없는 멍청이 들이라는 사실을 시시각각 확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3극 직렬관은 해상도가 높기 때문에 그리고 소리에 직접 닿기 때문에 오히려 부드럽습니다. 제가 제 직렬관 드라이브 앰프와 RE604 방렬관 드라이브 앰프와의 비교에서 느낀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방렬관 드라이브는 어딘가 우악스럽고 사납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박진감과 선명함을 느끼는가 본데 이것은 경험부족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경험이나 지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종종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근세의 인식론적 연구는 “우리 경험을 벗어나는 문제에 대하여는 어떤 추론이나 언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도 쉽게 말합니다. 그리고 우겨댑니다.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이깁니다. 직렬관 드라이브 앰프를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마치 들어본 것처럼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보는 것이 믿는 것”이상으로“듣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직렬관 드라이브 앰프를 듣다가 RE604앰프를 들으니 마치 딴 집 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해상도가 떨어지니 커튼 뒤에서 나오는 것처럼 멍청한 소리가 나옵니다. 저는 이번에는 방렬과 (12AX7)으로 만든 다른 LCR 포노단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식자우환”입니다. 이제 도저히 들어주지 못할 소리가 나옵니다. 마치 도끼로 주방 접시들을 부수는 소리라고나 할까요. 오디오와 관련한 제 운명이 또 다른 전기를 맞은 것입니다. 직렬관 드라이브가 제 운명이 된 것이지요.  

직렬관 드라이브에는 저음이 안 나온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직렬관 드라이브 앰프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지레 짐작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방렬관 드라이브 앰프에서 나오는 그 과장되고 부푼 솜사탕 저음(cotton sugar bass)을 진짜 저음으로 착각하고 있거나요. 직렬관 드라이브의 저음은 오히려 선명하고 잘 분화된 저음입니다. 좀 더 연주회장에 가까운 소리라고나 할까요. 실연과 상관없는 그 과장된 저음에서 오히려 오디오적 쾌감을 느낀다면 계속 그것을 즐기면 됩니다. 단지 소박하고 진실한 저음을 “없는 저음”이라고만 말하지 않으면 됩니다. 

  저는 사실 이 직렬관 드라이브 앰프를 많은 반대와 회의를 무릅쓰고 주문했습니다. 우선 모든 엔지니어들이 회의적입니다. 저음이 안 나올 것이다, 허밍 사운드가 심할 것이다, 플러터 노이즈가 심할 것이다 등등. 그들은 말합니다. “AF7이나 310A 한방이면 되는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드냐”고. 그러나 “되는 것”은 오디오에 있어서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디오는 단지 기기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로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희망하는 바의 좋은 소리를 향한 나름의 노력을 35년간 경주해 왔습니다. 제게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한”소리가 난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제 꿈이니까요. 물론 저는 제작자의 고충을 이해합니다. 또 이해해야 합니다. 저 자신 오랜 세월의 오도팔 생활 중에 온갖 풍상을 다 겪었는데 왜 그들을 이해 못하겠습니까? 3극 직렬의 드라이브 관은 우선 고전압을 요구합니다. 스윙시키기가 어렵지요. 그리고 히터와 캐소드가 하나이기 때문에 플러터 노이즈가 나기 쉽고, 증폭률이 낮고, 화이트 노이즈나 외부 유입 험에도 몹시 취약합니다. 이 모든 사항이 엔지니어들의 제작 능력의 극단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기피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전원부를 신호부와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히터 트랜스를 따로 만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외부 유입 험에 대한 모든 대비를 해야 합니다. 어려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기 때문에 시도해 볼 만하다고 말하겠습니다. 누구나 하는 것을 가까스로 하면서 스스로가 탁월한 엔지니어라고 자부하는 것은 가소로운 자기도취입니다. 저는 이러한 자기 망상에 빠진 엔지니어 몇 명을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실력 있는 오디오 엔지니어라고 자랑하고 싶다면 그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만약 험 없고 말끔한 3극 직렬관 드라이브의 파워 앰프를 어떤 엔지니어가 만든다면 저는 기꺼이 그 사람을 존중하고 칭찬하겠습니다. 그러나 안일한 세계에 잠겨있을 양이라면 자부심은 강아지에게나 양도해야 합니다. 강아지는 그 애교와 충성으로 돈 들이는 주인님을 만족스럽게 하니까요. 

어떤 분들은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많은 돈이 드는 것 아니냐. 나도 돈만 있다면 시도하겠다.” 그러나 직렬관 드라이브관이 절대 비싸지 않습니다. 310A나 ML4나 REN904보다 비싸지 않습니다. 수요가 상대적으로 없으니까요. Valvo Aa의 경우 신품이라고 해도 한 조에 20만원이고 philips Ca 관은 30만원,  ML4신품은 한 조에 30만원 REN904는 40만원 정도 되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용의 문제는 크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탄노이 애호가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탄노이 스피커의 구동에 있어서는 저역을 얼마큼 다스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탄노이는 확실히 저역에 있어 약점을 보입니다. 아차하면 벙벙거리며 멍청한 소리를 내니까요. 그러나 3극 직렬관 드라이브는 저역의 분해도가 높습니다. 그러니 드라이브를 무엇으로 해야 할지는 금방 드러납니다. 제가 알기로 어떤 사람들은 탄노이를 울리기에는 Decca의 PX4나 PX25의 앰프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천 만원 정도 되는 앰프일 겁니다. 저 같으면 그 반의 돈을 들여 PX4나 PX25 싱글을 101F와 102D로 드라이브 하겠습니다. 장전축에 붙어 있는 그 부품스러운 앰프가 그 가격이라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더구나 그 트랜스는  Kenyon사의 것입니다. 좀 그렇지요. 저도 한 조 가지고 있습니다만 고민입니다. 그 거칠고 수선스러운 소리를 듣자면 한 숨이 다 나옵니다.   

 

두 얼굴 12

혈혈단신으로 외국생활을 10여 년쯤 해보면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압니다. 정체성이 붕괴되어 갑니다. 삶이 진짜 삶이 아닌 것 같고 영혼은 나 자신과 일체가 되지 못한 채로 어딘가를 부유하는 느낌을 줍니다. 내가 겪은 일상들이 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사건인 것 같습니다. 어두운 바닷물이 나를 질식시키고 나의 낮조차도 어두움으로 가리지요. 그 두려움. 외로움이 누적되어 가다가 어느 순간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옵니다. 그때에는 술로 의식을 잠재웁니다. 먼저 술집에 들어가서 들이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맥주 몇 병과 보드카 한 병을 사가지고 집으로 찾아듭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완전히 폐허가 된 거실에서 뻗어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러고 나면 그럭저럭 보름쯤은 살게 됩니다.

  제가 10여 년의 유학생활 끝에 학위를 받고 정착했을 당시에 제 꼴은 이와 같았습니다. 제 실력과 학위는 한국의 대학에서 근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격요건이었나 봅니다. 도대체 받아주는 대학이 한 군데도 없었고 결국 그 오만하고 경박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시카고 대학. 그 도시는 인간이 살지 말아야 할 첫 번째 도시 중 하나입니다. 겨울에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대고 봄날은 온타리오 호수에서 솟아오르는 두터운 안개로 덮입니다. 공업도시이다 보니 주거환경도 형편없습니다. 거기에 근무했던 시간은 지금은 가끔 꿈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몸서리치며 깨지요.

  더 이상 교수 기숙사에 있기가 싫었습니다. 그 퀴퀴한 마리화나 냄새를 더 맡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나가기로 결정했는데 자동차를 사야했습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10년쯤 된 도요타나 혼다의 썩은 차를 사기로. 새 차일 때 어떤 매력도 없는 일본차들은 중고가 되었을 때 자못 쓸모 있는 차가 됩니다. 견뎌주니까요.

  중고차 매장들을 이리저리 전전했습니다. 제 발이 멈춘 곳은 일본차 매장이 아니라 독일차 매장이었습니다. 노천에 중고 포르쉐 한 대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황금의 밝은 태양빛을 배경으로 그 붉은 색 ‘꿈’은 언제라도 폭발하며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난했습니다. 꿈 밖에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환각과 몽상에 잠길 수는 있었습니다. 딜러에게 요청했습니다. 테스트 드라이브를 해보겠다고. 저 자신이 그 차를 감당할 만큼 부자라는 환각을 제 자신에게 부과했습니다. 단 한 시간.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자동차가 얼마만큼 매력적인 기계인가를 알기에는 그 한 시간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차는 기계공학이 극단에 이르면 어떤 쾌락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악셀레이터의 존재 이유가 “바닥까지 밟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줍어하고 소극적인 외피를 벗기면 열정과 소란스러움으로 꽉 찬 저의 내면이 있습니다. 악셀레이터를 바닥까지 밟자 그 차는 달리는 것이 아니라 폭발하는 것이었습니다. 250km/h. 이 속도가 정말 가능한 속도였습니다. 불안하고 동요하는 250km가 아니가 안정감 있고 자신감 넘치는 250km였습니다.

  딜러에게 키를 건네줄 때 이제 그 기계는 제게 하나의 로망으로 남았고, 환각이 현실에 자리를 양보할 때 10년 된 도요타 터셀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많이 낡은 이 차는 트렁크 덮개에 손가락이 두 개쯤 들어갈 만한 구멍이 두 개나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저는 청테잎으로 이 구멍부터 막았습니다. 안 그러면 트렁크가 수영장으로 변하니까요. 잊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날 출근길에 정지하거나 출발하거나 할 때 트렁크 수영장이 출렁거려 멀미가 났습니다. 결국 이 차는 2년 밖에 못쓰게 됩니다.

  이 차와 관련한 추억은 아름다운 이탈리아 아가씨와 맺어져 있습니다. 저는 이 차에 그 아가씨를 태우고 수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버팔로, 뉴욕, 토론토, 몬트리올 등. 그리고 그 안에서 셀 수 없는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아가씨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저는 이 차와도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이 차가 가슴 아픈 이별과 그 아가씨의 울음을 제게 계속 상기시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운전할 때마다 음료수 병을 건네주기도 하고, 담뱃불을 붙여주기도 하고, 계속 재잘거리며 내 귀를 시끄럽게 하기도 했던 그 아가씨에 대한 기억은 이 차가 사라지며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가끔 꿈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웠던 미소만이 잔류물처럼 나를 새벽에 깨게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수 십 년의 세월 속에 스러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에는 시간이 의사”라고 말한 사람은 그리스의 위대했던 핀다로스였지요.

  그 다음 차는 도요타 캠리. 이 차는 제법 차다운 차였습니다. 데모(demonstration)용으로 1700km를 주행한 차의 키를 기쁜 마음으로 건네받았습니다. 세월이 오래 흘러, 수백 년, 수천 년 흘러 제가 살던 그 마을이 폐허가 되고, 거기 세차장에 어떤 귀신인가가 차를 몰고 들어온다면, 그 귀신은 아마 저의 영혼일 것입니다. 저는 엄청나게 자주 세차를 했습니다. 가는 금줄을 길게 두른 녹색의 캠리는 북미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비취처럼 반짝였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그 차에 티끌 한 점 붙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강의 중에도 주차장을 내려다보기도 했습니다. 거기의 수많은 차 중에서 어떤 차인가가 황금빛 테두리를 두른 구름을 타고 떠올랐습니다. 저의 캠리였습니다.

  이 차가 훌륭한 세단이란 사실은 소비자 보고서(consumer report)에서 항상 만점을 받고 또 중고가치(resale value)가 가장 높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이 차는 우리 두뇌와 합리성에 호소하는 차이지요. 매우 경제성이 높고 단정하니까요. 그러나 이 차는 우리 가슴과 열정에 호소하지는 않습니다. 밋밋하고 평이하고 개성이 없습니다. 규범적이고 단정한 삶을 사는 모범생 같은 차입니다.

  저는 이 차를 몰고 국적을 바꾸게 됩니다. 이 차로 나이아가라 다리를 건너 토론토에 정착하게 되니까요. 캐나다! 이 나라는 제게 완전히 신천지였습니다. 제게 그러한 격렬한 정열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이 나라에서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땅에는 도로조차 없습니다. 저는 수많은 비포장 길을 달려 트레킹과 낚시와 캠핑을 다녔습니다. 저는 캐나다에서 친구들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제 차는 때때로 시속 100km도 내지 못했습니다. 네 명의 승객과 낚시의 포획물로 엄청난 하중을 짊어지고 달려야 했으니까요. 이 차는 일 년에 평균 6만km를 달렸습니다. 낚시여행을 가게 되면 왕복 1500km의 주행은 보통이었으니까요. 대견한 이 차는 그 모든 노역을 다 견뎌주었습니다. 차의 모범생! 이것이 캠리입니다. 계속 그대로 살았다면 저는 아마 침대에서 노년을 맞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부딪힌 위험한 순간들이 생명을 부지하기에는 너무 많았으니까요. 암벽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보트가 전복되기도 하고, 원시림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저는 제 묘비명에 “직업을 잘못 택한 사람 여기 잠들다”라고 써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제 기질은 탐험가, 모험가 등에 어울립니다. 아니면 하다못해 관광 가이드에 어울립니다. 얌전하게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은 제 본령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넓은 캐나다를 온통 쏘다니며 캐나다 물고기들을 잡아댔습니다. 그때에는 삶이 너무도 풍부하고 소란스러워서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제가 결혼 적령기를 지나 이미 냄새나는 중년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거지요.

  얼마 전에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습니다. 맥주로 시작해서 산사춘과 소주를 거쳐 위스키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간헐적으로 정신이 나는데, 제가 홀로 네온 사이를 헤매고 있었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밤이 현기증 나게 밝구나”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엔가 들어가서 또 한잔한 기억이 납니다. 다음 기억은 김포공항입니다. 일원동의 마지막 술집과 김포공항 사이가 기억의 진공상태입니다. 제가 왜 김포공항에 간 걸까요. 저는 추론했습니다. 아마도 택시기사에게 김포공항으로 가자고 했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술 마시던 중에 언뜻 들었으니까요. 예전에는 거기서 캐나다로 갔지요. 인천공항이 기억 안 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거기에는 잠잘 만한 싸구려 모텔이 없으니까요.

  캐나다에서 제 인생은 활기와 시끄러움을 노래했습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에 발생했던 일들이지요. 제 차에서는 퀴퀴한 담배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났습니다. 제가 무엇인가를 깔끔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첫 일 년간 그렇게 아꼈던 차가 조금씩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차의 주행거리가 30만km쯤 되었을 때 마침내 귀국이 가능해졌습니다. 한국에서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참동안을 차 없이 지냈습니다. 대중교통이 워낙 거미줄 같고 저렴한 것이 차 없이 살기로 결정한 첫 번째 동기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귀국한지 며칠 지나 길을 가다 약간은 이색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딱 붙은 두 대의 차 주인들이 각각 자기 차의 엔진소리를 응원 삼아 상대편에게 퍼부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퍼부어대는 말 중에는 여러 종의 동물의 보통명사들이 섞여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왜 동물에의 유비가 욕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을 ‘개 같은’ 혹은 ‘소 같은’ 놈이라고 말하면 상대편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인지요. 희한한 일입니다. 개와 소가 어째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 보면 개와 소 등은 그 품위와 지조와 성실성과 충성에 있어 최고의 품격을 가진 동물들입니다. 어째서 보통의 인간들은 개나 소보다 낫다고 생각할까요? 참 이상한 오만입니다. 사실 어떤 나쁜 사람에게 “개 같은 놈”이라고 말하게 되면 모욕을 당하는 것은 그 ‘놈’이 아니라 그 ‘개’입니다. 개가 들으면 어이없어 할 것 같네요.

  아무튼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차를 모는 과정 중에 길바닥에서 동물의 보통명사를 상대 면전에 퍼붓는 상황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상대의 눈흘김과 예언적 저주(~할 놈 등의)를 반드시 당하고 퍼붓는 경우가 생긴다. 나는 너무 오랜 외국 생활로 그 상황에 능란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이것은 면허시험장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을 먼저 배우지 않는 한 차를 몰면 안 된다 등등.

  제가 차를 사기로 결정한 때는 귀국한지 5년 만이었습니다. 5년간을 차 없이 지낸 것이지요. 나름대로 좋았습니다. 지하철에서 아찔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멋지게 틀어 올린 아가씨들을 마음 놓고 감상하기도 하고, 잡상인들에게서 때수건과 이쑤시개를 사기도 하고, 약간은 수상스런 김밥을 사먹기도 하고…. 이러면서 저도 점차로 능란한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도 누구 못지않게 동물과 인간을 비유하기도 하고, 저주를 퍼부을 줄도 알게 되고, 양심 없이 끼어들기, 양심 없이 꼬리 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한국의 국민차인 그랜저 XG를 샀습니다. 2003년의 일입니다. 그 차를 몰고 나간 첫 날, 저는 평생 얻어먹은 욕보다 더 많은 욕을 단 하루에 얻어먹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많은 주행거리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한들 그것은 북미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경험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길바닥에는 외국에 있는 모든 것이 있다 해도 양보와 자제는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모든 차량으로부터 경적소리를 얻어들었고, 창문에 대고 퍼붓는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운전이 공포 속에 지나가기를 한 달여, 저는 마침내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저는 배달민족의 후예였습니다. 모든 운전자와 대등하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으니까요.

  사실 그랜저는 참 좋은 차입니다. 캠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훌륭한 차입니다. 매끈하고, 부드럽고, 푸근하고, 민감합니다. 저는 이 차와의 드라이빙을 많이 즐겼습니다. 전국을 누볐습니다. 이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엔진이 깨졌답니다! 연료분사노즐 하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거기서 연료가 액체인 채로 흘러나와 실린더를 채운 끝에 엔진을 깨뜨렸답니다. 저는 어이없고 황당하고 화가 났습니다. 도대체 이런 종류의 고장은 상상도 못했고, 경험은 물론 못했고, 심지어는 누구에게 들어본 적도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총 430만원이 들었습니다. 엔진을 교체했습니다. 제가 캠리와 비교하며 불평하자 구의동의 정비사는 오히려 내게 화를 냈습니다. 일본차가 얼마나 많이 고장나는지 아느냐고. 그의 말이 맞겠지요. 그러나 나는 캠리나 렉서스의 엔진이 깨졌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조언합니다. 그랜저 살 때에는 엔진 깨지는 것을 조심하라고.

  그랜저와는 정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여러 선택의 가능성 가운데 고민했습니다. 제네시스를 살까, 벤츠 E클래스를 살까, 렉서스를 살까. 제네시스를 가장 먼저 제거했습니다. 현대차와는 다시 상종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제 벤츠와 렉서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와중에 이십년 전의 꿈이 불현듯 나의 가슴을 쳤습니다. 그렇다. 포르쉐가 있다. 포르쉐는 3억에 가까운 돈이 듭니다. 제게 이 돈은 없습니다. 포르쉐 중고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고, 의기양양하게 한 대를 골라잡아 시험주행을 했습니다.

  20년은 긴 세월입니다. 포르쉐는 여전히 같은 포르쉐였지만 제가 변했습니다. 좁고 시끄럽고 불편하고. 악셀레이터를 밟자 포르쉐는 폭발하듯이 뛰쳐나갔습니다. 한심하게도 악셀을 밟은 나 자신이 화들짝 놀랐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저는 어느덧 순화되고 길들여진 것입니다. 제 심장은 그 폭발을 견뎌낼 수가 없게 변한 것이지요. 제 정열과 패기는 조금씩 잠들어갔고 이제는 영원히 잠든 것 같습니다. 소란스러움과 활기 보다는 평온과 고요가 더 좋게 느껴지는 나이가 된 것일까요. 젊은 시절의 정열을 다시 깨울 수는 없는 것일까요.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꿈조차 품지 않는 노인이 되어가는 것일까요.

  노년이 생각만큼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젊었던 시절의 동요와 정념은 모두 사라지고 포기와 고요가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되겠지요. 날렵하고 매끈한, 처녀의 엉덩이 같은 포르쉐 보다는 펑퍼짐한 아줌마 몸매의 세단을 더욱 좋아하게 될 것이고. 저는 오늘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젊었던 시절의 정열을 다시 깨워 포르쉐를 시도해볼까, 아니면 이제 조용히 스러지는 노인이 되어 얌전하게 렉서스를 몰고 다닐까. 젊은 시절이 다시 깨워질 수 있을까? 20년간 순화되어진 나의 거칠었던 정열들, 코카서스와 시베리아의 모든 눈을 다 갖다 뿌려도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내 마음의 불길들. 젊었던 시절의 그 불길들.


  제가 PX25 앰프를 다시 시도해보기로 한 내면적 동기는 아마도 노인이 되어가는 내 마음에 기초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젊었던 시절에는 사실 이 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두루뭉술하고 뭉게구름 같이 펑퍼짐하고. 젊었을 때에는 무엇인가 좀 까칠한 개성이 있는 관이 좋았습니다. 독일계열 관들은 한 성질 합니다. 매섭고, 극단적인 해상도를 지니고, 거의 아슬아슬하다고 할 만한 고역을 지닌 독일계열의 3극관들은 제 젊은 시절에 엄청난 호소력을 지녔습니다. 저는 RE604, Ad1, Ed, Da 등의 관으로 증폭되는 소리를 좋아했습니다. Ed로 들은 바이올린의 고역은 정말이지 그 아슬아슬함이 “벼랑 위에 핀 꽃”이었습니다.
  
  제가 PX25 관의 소리를 언제,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관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제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 같습니다. 그 호방하고 순박하고 부드러운 푸근함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제가 여태까지 들은 PX25 관의 앰프는 전부 싸구려들이었습니다. 사실 Decca에서 만든 PX4와 PX25 앰프는 형편없는 소리를 냅니다. 온통 혼란스럽고, 해상도는 거의 방열관 수준이고 정신없이 분주한 분위기를 냅니다. 아마도 그 출력트랜스가 싸구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연한 노릇입니다. 프로장비도 아닌 앰프에 비싼 트랜스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자작품의 PX25 앰프들은 비슷한 수준입니다. 보통 MHL4나 ML4로 드라이브하고 그럭저럭하는 출력트랜스를 사용한, 싸구려로 만들어진 싱글 앰프들이지요. 이때 PX25는 더할 수 없이 멍청한 소리를 냅니다. 자작하는 소규모 공방의 엔지니어들이 반성 좀 해야 합니다. 엔지니어들의 그 드높은 자부심과 그 질 낮은 앰프와의 대비는 어떻게 설명할는지.

  저는 PX25의 가능성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계획을 세웠습니다. STC사의 3A/108A로 초단을 삼고, 3A/110A로 드라이브하고 페란티(Ferranti)사의 AF3 인터스테이지를 사용해보자. 그리고 출력트랜스는 해상도가 가장 선명하다고 하는 이소폰-클랑필름을 써보기도 하자. 계획과 행동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오디오에 관한한 제가 완전히 늙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장 나의 엔지니어에게 요청했습니다. “만듭시다!”

  여러분, 어떨 것 같습니까? 완전히 3극 직렬관 만으로 구동되는 PX25 앰프, 최고급으로 일컬어지는 트랜스들과 WE의 4각 오일콘덴서로 만들어진 PX25 앰프는 어떤 소리를 낼 것 같습니까? 이 앰프는 차로 말하면 이를테면 로터스 에스프리입니다. 호방하고 시원스러움은 여전합니다. 그 활기와 씩씩함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PX25 특유의 멍청함은 모두 사라집니다. 안개는 걷혔습니다. 감미롭고, 부드러우면서도 호방하고, 시원스럽고, 스케일이 큰 음이 지금 저의 탄노이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싱글 앰프에서 쏟아지는 풍부하고 선명한 저음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몇 명이 저의 집에서 감상했고 모두가 그 힘차면서도 부드러운 소리에 놀랐습니다. 이 앰프로 베토벤의 4번 교향곡 1악장을 들었을 때에는 제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습니다. 그 호쾌함. 방금 머리 위에서 깨진 천둥과 같은 그 강력함.

  저는 PX25 ST, PX25 Balloon, PP5/400 등을 차례로 교체해보았습니다. 슬프게도 황금이 만능이더군요. 비싼 관이 좋은 소리를 냈습니다.  ST관은 어딘가 평이하고 흔한 느낌을 주는 음을 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단조롭고 대중적인 느낌을 줍니다. Balloon관은 품위가 있고 스케일도 더 큽니다. 확실히 더 고전적이고 풍부한 소리를 내고, 어딘가 배음도 더 두텁다는 느낌을 줍니다. PP5/400은 관 중의 관이고 모든 출력관의 로제타스톤이라고 할 만합니다. 정숙하고 깨끗하고 단정하고 매끈합니다. 활기는 PX25에 미치지 못합니다. 좀 여성적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름답습니다. 마치 와또나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지요.

  중요한 사실은 정류관이 주는 차이가 출력관이 주는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저는 U52와 274B 각인관을 서로 교체하며 감상해보았습니다. 274B 각인관이 왜 좋은 관인가가 5분도 안되어 입증됩니다. U52로 들으면 어딘가 음이 억지로 끌려나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확실히 274B 각인관은 우수한 관입니다. 음이 시원스럽고 깔끔하면서도 매끈해집니다.

  이것이 제가 천 수 백만 원을 파워앰프 하나에 쏟아 부으며 얻게 된 결론입니다. PX25는 정말 훌륭한 관입니다. 단, 반드시 3극 직렬관으로 드라이브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PX25가 얼마만큼 훌륭한 관인가가 입증됩니다. 사실 초단관과 드라이브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설픈 엔지니어들은 초단관과 드라이브관에 3극 직렬관을 쓰기를 꺼립니다. 노이즈를 해결할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동호인은 101F와 216A로 드라이브한 205D 앰프를 어떤 엔지니어에게 제작 의뢰했는데 험이 반입니다. 그 엔지니어는 거의 아우라에 싸인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한데 실력은 그 모양입니다. 많은 엔지니어들은 자기 실력의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노력하기 보다는 다른 길을 택합니다. 직렬관으로 드라이브하면 저음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해가 안갑니다. 이론적으로 임상적으로도 이해가 안갑니다. 제 PX25 앰프가 쏟아내는 저음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관을 탓하기보다 먼저 스스로를 거울에 비춰보기 바랍니다.

  다른 조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파워앰프에서 인터스테이지 트랜스의 질은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게는 7, 8조의 인터스테이지가 있습니다. 저는 모든 트랜스를 번갈아 보며 시험해보았습니다. 끈질기고 극성맞은 오도팔입니다. 트랜스의 종류에 따른 그 엄청난 음의 변화에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페란티 인터스테이지가 음 자체의 질에 있어서 최고입니다. 사실 과장을 좀 하자면 경악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WE의  Acme가 좋았습니다.  Acme는 특히 WE 고유의 그 촉촉하게 화사한 음을 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몇 개의 탁월한 인터스테이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의 이야기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저의 자동차와 앰프에 관련한 최근의 경험과 인식이 여기에 그쳤다면 어쩐지 좀 밋밋한 이야기였을 텐데 제 마음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뒤늦은 반항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내가 52세이다. 이제 노년의 입구에 있다. 아무리 말해도 중년은 확실히 지났고 장년도 저물어가고 있다. 무기력한 회색의 노년이 기다리고 있다. 내 생물학적 나이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노년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젊은 시절은 불안과 동요의 시절이었다. 나이든 사람들의 평온과 안정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빨리 나이 들고 싶었었다. 이제 내가 젊은 시절에 요구했던 그 안정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과 안식은 평온이라기보다는 체념이고 포기이다. 이것이 내가 바랐던 노년이었는가. 나는 이러한 내 노년을 수용하고자 하는가.”

  제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 불만스러운 외침이 가냘프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이 들어가며 자꾸만 편해지려하고 있고 까다로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만 불편해도 잠을 자지 못하고 음식이 조금만 거칠어도 먹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까다로운 저를 “나이 들었으니까” 하고는 합리화해왔습니다. 주위에서도 그렇게 말하며 저의 합리화를 도와줍니다. “당신의 젊은 시절은 충분히 고생스러웠고 당신은 삶의 도전에 비교적 성실하게 응해왔다. 그러니 이제 좀 더 편안해져도 좋은 일 아니냐.”

모든 상황이 저의 노년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 곳에서나 숙면을 취할 수 있었고 삶은 감자 두 개와 우유 한 컵은 충분히 좋은 음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불이 조금만 접혀있어도 잠을 잘 수 없고 그럴듯하고 성의 있게 차려진 식사에나 만족합니다.

  제가 포르쉐를 포기한 동기는 이것이었습니다. 평온과 안식이 노년의 당연한 보상이라는 합리화가 정열과 활기에의 도전을 꺾은 것이지요.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년은 세월에서 보다는 마음에서 먼저 옵니다. 편안함과 사치스러움에의 요구가 노년보다 선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늙어가니까”라며 합리화합니다. 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는 이기적이고 안일한 한 늙기 시작하는 역겨운 사람, 교수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가진 한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종로 3가의 지하철역으로 갔습니다. 노숙자의 경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마음먹기였습니다. 서너 시간의 잠이 꿀맛 같았습니다. 라면박스도 훌륭한 쿠션이었고 신문지도 따뜻한 이불이었습니다. 노련한 옆의 노숙자가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언제 나왔수? 이 생활 자꾸 하지 마시오. 뭐라도 일자리를 구하시오. 습관 되면 여기가 당신 집이 되는 거요.”
  저는 가끔 노숙자 사이에서 잠을 청하려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늙은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안일과 까다로움 속에서 스스로 노년을 청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결국 포르쉐를 샀습니다. 세단을 포기했습니다. 검은 빛을 번쩍이며 품격과 성공을 상징하는 벤츠는 훌륭하지만 저는 제 평생 한 번도 그 끝까지 실현된 적이 없었던 제 마음의 불길을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엊그제는 영동 고속도로에서 시속 220km까지 달려봤습니다. 엄청난 굉음과 강력함!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침대에서 앓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못 놀라고 있습니다. 얌전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제가 살아온 세월들은 그러했습니다. 제 자신으로 살기 보다는 주위 사람들과 사회가 원하는 양식으로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제 자신의 마음속에는 학자나 작가 보다는 모험가와 탐험가의 영혼이 있습니다. 제가 시도했던 모든 모험은 주위의 만류로 항상 좌절되었습니다. 암벽 등반은 인수봉에서의 단 한 번의 추락으로 금지되었고, 오지 여행은 출발조차 못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위가 요청하는 이러한 삶을 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직업을 잘못 택한 사람입니다. 관광 안내원이었더라면 차라리 훨씬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저는 캐나다의 도로도 없는 호수나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어떤 오지에 이르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앰프를 다시 제작하려 합니다. 젊은 시절에 선호했던 그 음을 다시 한 번 추구해 보고자 합니다. Ba를 초관, Ca를 드라이브관, Da를 출력관으로 하는 파워앰프를 만들고자 합니다. 원래는 PX25와 비슷한 성향의 Da30 앰프를 만들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60이 넘었을 때 다시 시도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날카롭고 매서운 해상도를 가지는 Da 앰프를 만들겠습니다. 

 

조중걸 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중,프랑스로 유학, 서양문화사와 서양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미국 예일대학에서,서양미술사와 서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캐나다 토론토대학 부설 시각예술대학 교수로 미술사를 강의하며 새로운 예술사 집필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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