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1797~1828)의 피아노 소나타 op.78 을 tannoy "오토그라프"로 듣고 있으면,
약20분간 연주되는 1악장 fantasie- 끝나면 가슴이 뭉클하고 울음이 터질것 같은 감동이 있습니다.
"Vladimir Ashkenazy" 의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을즈음 녹음된 이음반은,1973년 "데카' 제작입니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독일어: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음악의 최고봉 중 한 사람이다. 관현악곡·교회 음악·실내악·피아노곡 등 명작이 많은데, 특히 리트(독일 가곡)에 뛰어난 작품이 많으며, 19세기 독일 리트 형식의 창시자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긴 채 31세로 병사한 그는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8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 리히텐탈에서 독일의 슐레지엔의 자작농 출신이자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요리사인 어머니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슈베르트를 5살부터 악기교육을 시켰다. 1년 뒤 그의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한 슈베르트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그의 형 이그나츠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켰다. 7살부터 슈베르트는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저로부터 교습을 받았다. 또한 가족 현악 4중주에서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de)는 바이올린, 아버지는 첼로, 자신은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하였다. 슈베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나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친 이유는 취미가 음악이었기 때문이었지, 슈베르트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된 슈베르트는 교사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04년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 재능을 인정 받기도 하였다. 1808년에는 스타드콘빅트 (궁정 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모차르트의 서곡이나 교향곡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존경하였다. 13세 때 변성으로 궁정학교 수업을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군복무를 일정기간의 교사근무로 대신하는 대체복무제를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14년부터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했다. 이때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해에 바 장조의 미사곡(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장례미사에 사용하는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의 독창을 부른 테레제 그로브는 슈베르트의 첫 번째 애인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1815년 18세 때에 그의 재능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곡의 가곡을 썼으며,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마왕》, 《휴식 없는 사랑》, 《들장미》 등의 명작도 이 해에 작곡되었다. 그가 지은 가곡 중 일부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책으로 편집되었다. 1816년 친구 쇼버의 권유로 친구 집에 머물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방랑생활이 시작되며, 죽는 날까지 그를 괴롭힌 매독 또한 이 시기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817년 당시 최고의 성악가이자, 25세 연상의 친구였던 포글을 만났다. 포글은 슈베르트의 재능을 존중하여 슈베르트가 지은 노래를 많이 불러 그의 노래는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1818년에는 가곡 《죽음과 소녀》, 《송어》를 작곡하였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 집안의 두 딸의 가정교사가 되어 한여름을 첼리즈에서 보냈다. 이듬해에 포글과 함께 오스트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다. 1819년 라이바흐 사범학교의 교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학교에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가곡 <유랑인>이나 <제5교향곡> 등이 이때의 작품이다. 1823년에는 《유랑인의 환상곡》, 《로자문데》 등을 발표했고 그 해 여름, 친구의 집에서 읽은 뮐러의 시에 감동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를 작곡하였다. 1824년 다시 에스테르하지 가의 음악 교사가 되어 전원 생활을 즐기며,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였다. 이듬해 다시 포글과 서부 오스트리아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였다. 1827년 30세가 되자 자신의 인생이 겨울을 맞았음을 아는 듯 《겨울 여행》를 작곡하였다. 1828년 3월 자작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뒤 교향곡 9번인 <대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출판된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가곡의 대부분이 그 해 8월에 완성되었다.
슈베르트는 한때 베토벤과 만난 적이 있었다. 평소에 베토벤을 존경해왔던 슈베르트는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자신의 소심한 성격 탓에 쉽사리 만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날 기회를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1827년 3월 19일, 베토벤 집에 방문하여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불과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에게 인사하는 한편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여준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베토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합병증으로 인해 힘이 들어 보였고 말할 때마다 계속되는 기침으로 슈베르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 후 베토벤은 청력상실로 듣지 못하는 탓에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음악가의 병이 든 처참한 모습을 보고 소심한 성격때문에 일찍 만나지 못한 자괴감과 후회감에 빠져 괴로운 나머지 인사말도 없이 그대로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1주일 뒤인 3월 26일, 베토벤이 죽자 그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베토벤이 죽고 1년 뒤인 1828년 그는 자신이 대위법이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공부하다가 11월 17일에 원인모를 병을 얻어 몸져 누웠다.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기억력이 감퇴되고 헛것이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빈에서 죽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유해를 교회에 묻으려 했으나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평소에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자고 제안을 해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슈베르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식중독으로 죽었다는 설,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설과 매독의 악화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는 매독으로 인한 사망에 신빙성을 얻고 있다.([주해 1]) 별세한 해에 만들어진 최후의 가곡 14곡을 모은 것이 《백조의 노래》이다.
주요 작품
슈베르트는 그 짧은 일생에 수많은 가곡과 기악곡, 교향곡 등을 작곡하였으나,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가곡이다. 650곡에 이르는 가곡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평을 듣지만, 특히 《겨울 여행》이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 《백조의 노래》 등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며, 자유로운 표현력을 지니는 멜로디의 아름다움, 그리고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 낭만주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에서는 제8번의 《미완성》이 특히 유명하나, 제9번 《대 교향곡》의 아름다움도 잊어서는 안된다. 피아노곡에서는 《방랑자 환상곡》, 《스케르초》, 《악흥(樂興)의 한 때》 등이 알려져 있고, 실내악곡에도 《죽음과 소녀》나 《송어》 등 걸작이 많다. 그 밖에 오페라·음악극의 작품도 있으며, 가곡 약 650곡을 비롯하여 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 1,200여 곡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풍부한 색채감과 서정적 표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쉬케나지는 이 시대가 낳은 독특한 연주 품격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이며, 역사적 격동기에 정치적 시련을 거치면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예술혼을 지켜온 금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7년 구소련 고리키에서 태어나 6세때 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8세 때인 1945년 모스크바에서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데뷔, 그 천재성을 일찍부터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5년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 2위, 56년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1위로 일약 세계음악계의 주목을 받게된 아쉬케나지는 이를 계기로 58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데뷔, 크게 성공한후 1962년 콩쿠르의 최고봉인 제2회 차이코프스키국제콩쿠르 우승으로 또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콩쿠르 우승 직후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위해 고국을 떠날 결심을 하게된 아쉬케나지는 1969년 아이슬랜드로 망명, 세계음악계의 화제를 모으며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한다. 1975년 부터는 지휘에도 흥미를 가져 그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비롯, 로열필하모닉, 보스톤심포니,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런던심포니등 많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오고있으며, 1987년 런던의 로얄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그의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최고점에 다르게된다. 현재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서 "어떤 격식에 사로잡히지않은 순수한 천재성의 해석력을 가진 지휘자"라는 평을 듣고있다.
아쉬케나지는 연 100회 이상 정열적인 연주활동과, DECCA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활동을 하고있으며, 이차크 펄만, 린 해럴과 파트너를 이루어 챔버뮤지션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89년에는 조국을 등진지 26년 만에 귀국, 모스크바에서 로얄필과 콘서트를 가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현존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안정된 기교와 음악성을 갖춘 아쉬케나지의탁월한 리듬감각은 비견될 사람이 없으며 다양한 음색과 풍부한 울림, 거기에 성숙한 인간적인 면모까지 반영,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성팬들로 매진행렬을 이루고 있다.
'소나타,독주곡,실내악,조곡.外' 카테고리의 다른 글
"J.S.Bach(바흐)"Unaccompanied(무반주) sonatas & partitas - 하이페츠 연주[탄노이 사운드]. (0) | 2015.08.12 |
---|---|
"Jacqueline du pre"가 연주하는 "베토벤"첼로소나타 No.3,No.5. (0) | 2015.07.22 |
"베토벤" 첼로소나타(1번~5번) - "Pablo Casals" (0) | 2015.06.17 |
Baroque, "비발디" 첼로 협주곡 E단조, C단조. - 연주자"Pierre Fournier" 外[탄노이 사운드] (0) | 2015.05.24 |
"James Galway"가 연주하는 "Vivaldi 四季" (0) | 2015.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