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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Sonatas for Piano and Violin-"시몬 골드베르그","라두 루프"[Lp,박스반의 음질].

chocho(조)의 탄노이(tannoy) 2018. 12. 1. 22:07

"모짜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어쩌면 주연이 피아노 인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화려한 피아노 音속에 동양란의

한떨기 꽃이 함초름히 피어나듯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선율은 마음속 가득 행복 함으로 다가옵니다.

"시몬 골드베르그"의 바이올린과 "라두 루푸"의 피아노 연주로 약 7개월에 걸쳐 녹음된 이 박스반(6 lp)은 1974년

"데카"레코딩 입니다.

이 음반은 박스반 이지만 복제반이 아니고 원반으로, 아주 어렵게 구입한 만큼, 음질, 음악성, 모든면에서 우수 합니다.

"모짜르트"바이올린 소나타 중 친숙하고 아름다운 3곡을 "오토그라프"사운드로 감상 하세요!!!

-"모짜르트"바이올린 소나타,.K.301('시몬 골드베르그' ,'라두 루프' 연주)- 

-"모짜르트"바이올린 소나타,.K.304('시몬 골드베르그' ,'라두 루프' 연주)-

-"모짜르트"바이올린 소나타,.K.303('시몬 골드베르그' ,'라두 루프' 연주)-

 

 

 

 

시몬 골드베르그, Szymon Goldberg (1 June,1909 - 19 July,1993)

 폴란드 태생의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20세기 들어 폴란드는 3명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를 배출했다.

3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파울 코한스키(Pawel Kochanski, 1887-1934)와 시몬 골드베르크(Szymon Goldberg),헨릭 셰링(Henryk Szeryng, 1921-1993) 등으로 이들은 모두 세련된 고전적인 스타일의 연주자였다.

바르샤바 필하모닉의 초대 악장을 지냈던 코한스키에 비해, 바이올린애호가에게 익숙한 인물은 골드베르크와 셰링일 것이다.

이 둘은 많은 레코딩을 남겼고, 특히 수많은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중에서도 정상으로 꼽을 수 있는 연주자들이어서, 모차르트 바이올린 애호가라면 이 두 연주자의 모차르트 음반을 구입하는 것은 바이올린 매니아의 과정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20세기의 위대한 연주자이자 교육자인 칼 플레쉬(Carl Flesch 1873-1944)의 제자였지만, 연주스타일은 상이하였다.

셰링이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것에 반해, 골드베르크는 비평가들과 진지한 일부 애호가를 제외한 대중들로부터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셰링이 골드베르그에 비해 외향적이라 볼 수 있으며,(셰링도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에 비한다면 내면적인 연주 부류에 속하지만), 이에 반해 골드베르그는 외형적 꾸밈이 없는 진솔한 연주를 들려 준다.

 

시몬 골드베르크는 1909년 6월 1일 바르샤바 근교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애호하는 가족 사이에서 성장한 그는 7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8살 때 플레쉬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12살 때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으로 바르샤바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으며, 2년 뒤에는 같은 곡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독일 순회 연주를 마친 그는 스승 플레쉬의 조언에 따라 1925년에 16세의 나이로 드레스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직을 맡았으며, 20세때인 1929년에는 대 지휘자인 푸르트벵글러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 34년까지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4년 유태계(系)이기 때문에 나치스의 박해를 받았고, 푸르트벵글러 등이 애쓴 보람도 없이 독일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골드베르크는 1948년 10월 10일에는 카네기 홀에서 피아니스트 에리히 이토르 칸(Erich Itor Kahn)의 반주로 미국 데뷔 연주회를 가졌으며, 두 달 후에는 다시 카네기 홀에서 발터 헨델이 지휘하는 필하모닉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특히 1950년 1월 14일, 카네기 홀에서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는 유명한데, 그것은 골드베르크가 빈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초고를 찾아내어 연주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그는 자신이 발견한 이 악보를 알리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골드베르크는 195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면서도, 1954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카잘스 음악제에 참가하는 등 유럽음악계와 관계를 하고 있었다.

1965년까지의 아스펜 음악제에서 그는 유명한 비올리스트 윌리엄 프림로즈, 첼리스트 니콜라이 그라우던, 피아니스트 빅터 바빈과 함께 아스펜음악제 4중주단을 결성하여 갈채를 받았는데, 이 피아노 4중주단은 그라우던의 사망으로 팀이 해체되기 전까지 모두 7장의 음반을 남겼다.

1955년부터 골드베르크는 네덜란드 챔버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을 맡아 지휘자와 예술감독, 독주자의 1인 다역을 수행하며 매우 활발한 녹음 활동을 했으며, 바흐의 <브란덴브루크 협주곡> 전곡 녹음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9년에 그는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와 새로운 듀오를 결성하여 슈베르트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들을 녹음했고, 이에 대한 호평에 힘입어 런던으로 건너갔다.

젊은 피아니스트 루푸와 나이든 거장 골드베르크의 결합은 전체적으로 아주 잘 진행되어 갔다.

 

골드베르크는 1978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예일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줄리어드 음대로 자리를 옮겼으며, 1982년부터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제자들에 의하면 골드베르그의 가르치는 방식은 그의 연주처럼 모든 것이 아주 정확하고 분명했으며,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칼 플레쉬의 교습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골드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여덟 살 때부터 그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기 때문에 내 지도 방법 속에는 틀림없이 그에게서 배운 것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겁니다.

내 나름의 생각들을 몇 가지 덧붙여서 말이죠."...

골드베르크는 1985년에 아내를 잃고 1988년에 일본인 피아니스트 미요꼬 야마네와 재혼했으며, 재혼한 부인과 함께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과 드뷔시의 <바이올린 소나타>, 힌데미트의 소나타 를 레코딩하며 80대에까지도 수준높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는 1993년 7월 17일에 일본 다테야마의 자택에서 심장쇠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골드베르크의 연주는 격조(格調)가 높고 깨끗하며 조금도 과장이 없다.

스케일은 크지 않지만 부드러운 표현이 생기있고 아름답다.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로 뛰어났던 특성이 반영된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그가 사용했던 악기는 1734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비타 남작'(Baron vitta)이었다.

레코드로서는 미요 지휘, 라무뢰 관현악단 연주에 의한 미요의 <사계> 그리고 네덜란드 실내관현악단을 지휘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반, 하이든의 <교향곡 제 83 번 - 암닭> 등을 대표반으로 꼽을 수 있다.

1976 년도 들어서는 루마니아 출신의 신예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와 콤비를 이루어 모짜르트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전 16 곡)>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라두 루푸, Radu Lupu (30 November, 1945 -     )

루마니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는 "루마니아가 2차대전 이후에 배출한 최대의 일재(逸才)"라는 찬사를 받았던 피아니스트이다.

1945년 루마니아의 갈라츠(Galaţi)에서 유태계인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12세 때에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연주함으로써 공식 데뷔하였다.

부카레스트 음악원에서 리파티의 스승으로 유명한 무지체스크(Florica Musicescu)에게 사사하였다.

1961년에 모스코바 음악원의 장학금을 받아 입학해서 명교수 에기야자로바(Galina Eghyazarova)와 겐리크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에게 배웠고, 나중엔 이 학교 최고의 명교수인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Stanislav Neuhaus)의 문하에서도 배웠다.

겐리크 네이가우스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와 에밀 길렐스 같은 유명한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라두 루푸는 이들 네이가우스 부자(父子)로부터 6년 동안 착실하게 피아노의 기예(技藝)를 익히고 닦았다.

그러는 동안 루푸는 1966년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였고, 이듬해 1967년에 열린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에서도 우승했다.

또한 1969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우승하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72년, 루푸는 뉴욕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클리블랜드 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미국 무대에 데뷔하였다.

쥴리아니(Carlo Maria Giulini)가 지휘하는 시카고 교향악단과도 협연하였고, 1974년에는 세이지 오자와가 지휘하는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였다.

1978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협연하였고, 1986년엔 무티가 지휘하는 빈 필과 역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협연했다.

라두 루푸는 세계의 유수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루체른 페스티발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엔 거의 고정적으로 초대받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라두 루푸를 두고 '리파티의 재래(再來)'라고 말하는데, 그 음악성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루푸의 연주 개념은 상당히 독특한 것이어서 기존의 스타일이나 전통과 일단 끊은 시점에서 다시 음악과 맞씨름하려는 것 같다.

그것은 템포의 설정이나 음색의 미묘함에서도 나타나지만, 악곡을 모티브나 프레이즈의 집합체로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음 하나 하나를 분해하여 그것들에 똑같은 의미와 에네르기의 불꽃을 부여한다.

부분부분의 상관관계로써 전체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낱낱의 음의 집합체로서 작품을 파악한다.

음반은 Decca 레이블로 발표하고 있으며, 상당히 많이 나와 있다.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기념반인 이오시프 콘타 지휘와 루마니아 방송교향악단 연주에 의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 황제>, 그의 명성을 결정적인 것으로 증명해준 에도 데 바르트 지휘와 런던 필하모니 관현악단 연주에 의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베스트 셀러반이다.

그밖에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8번 - 비창>, <제14번 - 월광>, <제21번 - 발트쉬타인> 결합반, 슈베르트의 <즉흥곡>과 브람스의 <간주곡>,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8번 - 환상> 외, 바이올리니스트 골드베르크와 협연한 모짜르트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전곡반 등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필과 녹음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여러 아티스트들과 녹음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실내악곡들, 특히 머레이 페라이어와 녹음한 2장의 앨범, 바브라 핸드릭스와 녹음한 슈베르트의 가곡앨범 등은 유명하다.

특히 슈베르트의 <소나타 가장조(D.664)>와 <D.960>은 그래미상을 받았고, 슈만의 <어린이정경>과 <유모레스크>는 1995년에 에디슨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미켈란젤리 상(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prize)을 받았다.